로마 제국 쇠망사 1권 13장(2)(에드워드 기번, 윤수인_김희용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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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저서 읽기/로마제국 쇠망사(에드워드 기번, 윤수인_김희용 옮김)

로마 제국 쇠망사 1권 13장(2)(에드워드 기번, 윤수인_김희용 옮김)

 

   평화 협상 페르시아 사절의 연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로마에 상주하면서 시리아에 감시 부대를 집결시켜 놓고 있었습니다. 그는 승전보를 듣고 나서 국경지대를 향해 진격해 나갔는데, 진격의 목적은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갈레리우스의 오만을 억제하려는 의도였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와 갈레리우스는 니시비스에서 만났고, 이곳에서 페르시아의 사신을 접견했습니다. 

니시비스(by 나무위키)

 페르시아 왕 나르세스는 자신이 가장 신임하는 신하 아파르반을 파견하여 로마 황제와의 교섭을 일임했습니다. 아파르반은 갈레리우스가 페르시아 왕가 가족을 보호하고 정중하게 대해준 것에 대해 고마움을 표시하고, 포로들을 석방해줄 것을 간청하였습니다. 그는 전쟁에서 이긴 갈레리우스의 우월성을 찬양했습니다. 그러면서 로마와 페르시아는 세계의 두 눈과 같아서 어느 한쪽이 뽑히면 세상은 불구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갈레리우스는 분노하면서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페르시아에 포로로 잡혔을 때 받은 모욕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아래 1권 10장(2) 참조)

2024.01.11 - [위대한 저서 읽기/로마제국 쇠망사(에드워드 기번, 윤수인_김희용 옮김)] - 로마 제국 쇠망사 1권_10장(2)(에드워드 기번, 윤수인_김희용 옮김)

로마 제국 쇠망사 1권_10장(2)(에드워드 기번, 윤수인_김희용 옮김)

2024.01.04 - [위대한 저서 읽기/로마제국 쇠망사(에드워드 기번, 윤수인_김희용 옮김)] - 로마 제국 쇠망사 1권_10장(1)(에드워드 기번, 윤수인_김희용 옮김) 수에비족의 기원과 명성 2. 엘베 강 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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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중용

  갈레리우스와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서로 생각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갈레리우스는 이참에 페르시아를 정복해서 로마의 한 속주로 만들어버리고 싶었고,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페르시아를 정복하는 것은 길게 봐서는 큰 실효성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두 안토니누스 황제의 온건 정책을 표방하여 유리한 조건으로 강화를 맺고 전쟁을 종식시키고자 하였습니다. 
 

   강화 조약의 체결

 디오클레티아누스와 갈레리우스 황제는 약속이행을 위해 비서관 시코리우스 프로부스를 페르시아 궁정에 보내 자신들의 최종 결정을 알렸습니다. 프로부스는 매우 우호적인 예우를 받았으나, 페르시아는 접견일을 미루었습니다. 마침내 메디아의 아스프루두스 강 부근에서 알현을 하기로 했는데, 접견이 늦어진 이유는 나르세스 왕이 군대를 모아 사신으로 온 프로부스에게 위압감을 주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로마가 제시한 최초의 조건은 니시비스를 쌍방 간의 교역 장소, 두 제국 간의 교역 중심지로 정하자는 것이었는데, 니시비스는 로마 영토 안에 있었고 로마가 이미 수출입을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여기에는 로마가 페르시아로부터 몇 가지 약속을 받아 내려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르세스 왕이 모든 조건 중에서 이 조건만 거부한 것으로 보아 나르세스의 자존심을 건드릴만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로마도 이 조항을 굳이 관철시키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조항들은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조약의 조항들

 1. 두 나라의 국경선은 아보라스 강, 즉 아라크세스 강으로 정했습니다. 이 조항으로 로마는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양도받게 되었습니다.
2. 페르시아인들은 로마인들에게 티그리스 강 너머의 다섯 개 주도 양도했습니다. 로마는 이 조항으로 방어력을 더욱 증강할 수 있었습니다. 
3. 티트리다테스를 아르메니아 왕으로 복귀시켰습니다.
4. 로마 황제들이 페르시아 왕으로부터 이베리아 왕의 지명권을 양도받았습니다. 이 조항으로 로마는 아시아에서의 세력이 더욱 강해졌습니다.
동방은 이 조약 이후 40년 동안 평화를 누리게 되었으며, 이 강화 조약은 티리다테스 왕이 죽을 때까지 엄격하게 지켜졌습니다. 이후 로마와 페르시아의 통치권에 변화가 생기면서 다시 두 나라는 전쟁의 소용돌이로 들어가게 됩니다. 
 

   서기 303년 11월 20일,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의 개선식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재위 20년째 되던 연초에, 로마에서 성대하게 개선식을 거행했는데 막시미아누스와 함께 영광을 나누었습니다. 전투의 공은 두 명의 부황제에게 있었지만, 영광은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 황제가 누렸습니다. 개선식에서 가장 눈에 띈 전리품은 포로로 잡힌 페르시아 왕의 여러 아내와 자녀들, 누이의 초상화였습니다. 이 초상화는 국민들의 허영심을 만족시켜 주었습니다. 
하지만 이 개선식은 로마 제국 마지막 개선식이 되었습니다. 이후에는 로마 황제들이 정복을 중단했기 때문입니다. 
 

   황제가 없는 로마 · 밀라노의 궁정 · 니코메디아의 궁정

 세계를 중심이라고 생각하던 로마의 카피톨리누스 언덕은 영원할 것만 같았지만, 정복지가 확장됨에 따라 카피톨리누스의 상징성은 점차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피정복민들은 로마에 대한 특별한 애정이 없이도 로마 시민의 이름과 권리를 얻게 되었습니다. 
로마 황제들은 속주 출신이더라도 황제가 된 후에는 로마에 머물렀는데, 그것은 로마가 권력의 본거지이고 제국의 중심이라는 관념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국가의 안전을 위해 출정할 때 외에 평화시에도 로마가 아닌 속주에만 상주한 황제는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 황제가 처음이었습니다.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경우에는 대체로 밀라노에 있었는데, 그 이유는 밀라노의 위치가 알프스 산기슭에 있었기 때문에 게르만족의 동태를 살피기에 용이했기 때문입니다. 밀라노는 황제가 머물렀기 때문에 황제의 도시답게 건물도 훌륭했으며, 시민들의 수준도 높았다고 합니다. 막시미아누스의 이름을 붙인 여러 건물들은 로마에 비해서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훌륭했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또한 자신의 통치 영역을 특별하게 만들고 싶은 욕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의 통치지역 수도인 니코메디아를 아름답게 꾸몄습니다. 그 결과 니코메디아는 몇 년 만에 엄청난 규모와 위용을 지닌 도시로 발전할 수 있었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와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특성은 실천하는 인생이었다는 점입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자신이 거처하는 니코메디아가 얼마나 좋았으면 통치 20년째에 로마에서 거행된 개선식이 있었을 때도 로마에는 2달 이상을 머물지 않았다고 합니다. 군인출신이었던 그는 로마 시민들의 격의 없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로마에 머무는 것이 얼마나 싫었으면 원로원에서 집정관직을 받기로 예정되어 있었음에도 13일이나 먼저 로마를 떠났다고 합니다. 
 

   로마와 원로원의 쇠망

 프로부스 황제 치하였을 때만 해도 원로원의 권력과 중요성은 보장되어 있었지만 그 이후로는 원로원의 존재는 관념적으로 남아있을 뿐이었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원로원의 남아 있는 권력과 중요성마저도 박탈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자신의 손에는 피를 묻히는 스타일이 아니었습니다. 행동 대장격인 막시미아누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막시미아누스는 원로원의  가장 유력한 의원들을 자신이 조작한 가공의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고발했던 것입니다. 고발당한 원로원 의원들은 멋진 별장과 기름진 경작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유죄의 증거로 판단되었습니다. 
 이제 원로원은 그야말로 무늬만 남은 허수아비와도 같은 존재가 되었던 것입니다. 황제들은 행정권과 입법권을 행사할 때조차도 원로원을 배제하고 자신의 장관들과 의논했습니다. 그나마 로마에 머물렀던 황제들은 원로원을 핍박하더라도 기본적으로 원로원의 역할에 대한 선은 지켰는데, 속주에 머물렀던 황제들은 이제 그 마저도 팽개쳐버렸습니다. 
 아마도 미천한 출신으로 황제에 올랐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원로원에 대해 기본적인 열등감과 그로 인한 분노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다 로마에 머물지 않았기 때문에 서로에 대해 이해할 시간이나 계기가 없었고 그 결과 그들의 관계는 더 악화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제쳐 놓은 행정관직 황제의 위엄과 칭호들

 로마 황제의 합법적 권력이란 집정관, 총독, 감찰관, 호민관과 같은 여러 문관직을 통합적으로 가지면서 형성되는 것인데, 이것은 황제가 독재가 아니라 공화정 로마에 기원을 두고 있다는 것을 국민에게 알려 주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로마를 떠난 황제들은 이런 칭호들에 의미를 두지 않게 되었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왕(king)이라는 칭호를 사양했고, 임페라토르(Imperator)라는 칭호를 더 선호했습니다. 임페라토르라는 칭호는 로마군의 총지휘관이라는 의미에서 로마 세계의 군주라는 의미를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어로 바실레우스(Basileus), 즉 왕이라는 칭호는 아시아 군주들에게 주로 사용되었는데, 가장 고귀한 지위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동방의 로마 속주민들이 로마의 군주를 부르는 경칭으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도 바실레우스라는 칭호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왕관을 쓰고 페르시아 궁정 의식을 도입한 디오클레티아누스

 로마 황제는 자주색 옷을, 원로원은 상의에 자주색의 넓은 띠를, 기사 계급은 상의에 자주 색의 폭이 좁은 띠를 착용함으로써 지위를 나타냈습니다. 그런데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페르시아 궁정의 화려한 기풍을 도입하면서 과감하게 왕관을 썼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옷은 비단과 금으로 만들었으며, 신발에는 귀한 보석까지 박혀있었다고 합니다. 환관들의 수가 증가할수록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에게 접근하는 일이 어려워졌으며, 황제를 볼 때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동방의 풍습대로 바닥에 엎드려서 주군의 신성을 숭배해야만 했습니다. 
 로마 초대 황제였던 아우구스투스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공통점은 연출된 겸손을 표현했다는 점입니다. 차이점은 아우구스투스의 경우 자신의 한 없는 권력을 감추려고 했던 반면,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한껏 과시하려고 했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새로운 통치 방식, 두 명의 황제와 두 명의 부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분할은 자치가 이뤄질 정도로 군사 행정과 민간 행정 등 모든 면에서 분할되었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는 손위 황제로서 아우구스투스(존엄자)라는 칭호로 구별되었고, 두 명의 부 황제는 카이사르라는 칭호를 썼으며, 순차적으로 황제의 지위로 옮겨 가기로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처음 계획했던 것과는 달리 로마 세계의 정치적 통일은 점차 멀어졌으며, 이 분할의 원리는 불과 몇 년 만에 동서 양대 제국으로 완전히 분리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세금의 증가

 분할의 최대 단점을 들자면 체제 유지 비용이 증가하면서 세금도 같이 늘어났다는 점입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트라야누스 황제는 거대한 제국을 통치하면서도 검소한 생활을 한 반면, 분할된 제국들은 경쟁하듯이 저마다 화려한 궁전과 건물을 짓기 위해 많은 비용을 써야 했습니다. 게다가 "받는 사람이 바치는 사람보다 많다"라고 할 정도로 많은 정부 관료들이 있어서 국민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고통스러운 조세의 부담을 안고 있었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분할 통치라는 정치체제를 만든 것에 관해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그의 통치에는 나름의 절제가 있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황제의 국고에는 여전히 상여금을 주거나 국가의 비상사태에 대비하여 충분한 재원이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의 퇴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그동안 어떤 황제도 실행한 적이 없는 퇴위 결정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그의 재위 21년째에 일어난 일입니다. 저자는 군인 출신의 황제에게서 볼 수 없는 철학적인 결정이라는 평가를 했습니다. 저자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퇴위를 16세기 카를 5세의 퇴위에 비교했습니다. 단지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성공적인 통치 중에 내린 결정이었고, 카를 5세는 계속되는 전쟁과 분쟁으로 지쳐있는 상태에서 내린 퇴위 결정이라는 차이가 있습니다. 공통점이라면 둘 다 50대의 나이에 퇴위를 결정한 것은 국가를 통치하면서 기력을 쇠해서 일찍 노쇠했다는 점입니다.

신성 로마 제국 합스부르크 왕제 제 3대 황제 카를 5세(by 나무위키)

 국가를 통치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고난의 길일 것 같습니다. 게다가 끊임없이 전쟁을 치러야 하는 상황이라면 두 말이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서기 304년,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오랜 투병·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신중함

 혹독한 날씨에 일리리쿰의 여러 속주를 순방하기 위해 동방으로 여행길에 오른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날씨와 여행의 피로로 인해 병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죽었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궁전에만 머물렀습니다. 그러다가 3월 1일 대중 앞에 나타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수척해진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나머지 생애를 정무에서 벗어나 명예로운 휴식을 즐기기 위해 두 명의 젊은 공통 통치자들에게 제위를 물려주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서기 305년 5월 1일

황제는 퇴위식을 갖자마자 고향인 달마티아의 은거지로 갔습니다. 같은 날 5월 1일에 막시미아누스도 밀라노에서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사실 막시미아누스는 퇴위할 마음이 전혀 없었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와의 약속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퇴위한 후 루카니아의 별장에서 은거했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은퇴 생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사망하기 전 마지막 9년은 평범한 시민으로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가 유유자적한 농가 생활을 즐기고 있을 때, 막시미아누스로부터 둘이서 다시 통치권과 황제의 자리를 장악하자는 간청을 담은 편지를 받았습니다. 이에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자신이 재배한 양배추를 그가 직접 볼 수만 있다면 자신에게 그런 행복을 포기하라고 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말을 담담하게 했다고 합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한 말에서 통치의 고단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네댓 명의 대신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결탁해서 군주를 속이려고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높은 지위에 올라 사람들로부터 격리되면 진실이 감춰져 군주 스스로는 알 수가 없게 된다네. 그는 오직 신하들의 눈을 통해서만 볼 수 있고 그들이 날조한 거짓말밖에 들을 수 없게 되지. 그는 가장 중요한 직책을 악하고 나약한 자들에게 수여하고, 신하들 가운데 가장 덕망 높고 유능한 사람들에게 치욕을 안겨 주기도 한다네. 이처럼 수치스러운 술책 때문에 아무리 훌륭하고 현명한 군주일지라도 이해타산적이고 타락한 신하들에게는 속아 넘어가게 되는 것이라네.

 이런 우려는 현대 정치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현명한 리더를 보는 안목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통치자로서 신실한 각료를 알아보는 안목은 갖추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아랫사람이 잘못했다 하더라도 그 최종적인 책임은 리더가 감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서기 313년,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죽음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말년에 사위이자 동방의 정제(황제)였던 갈레리우스가 사망하자, 그 자리를 리키니우스가 강점하였습니다. 위협을 느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외동딸 발레리아와 아내 프리스카는 리키니우스와 대적하던 막시미누스 다이아에게 의탁했습니다. 막시미누스 다이아는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해 발레리아에게 청혼했으나, 거절 당했기 때문에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를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강하게 항의하자 그들을 풀어주기는 했으나 재산을 몰수하고 시리아로 추방했습니다. 그 후, 리키니우스가 막시미누스 다이아를 무찌르자 발레리아와 프리스카는 리키니우스에게 의탁하려고 했으나, 그는 오히려 그 둘을 죽이려고 하였고, 도망 다니던 그들은 결국 참수형에 처해졌습니다.
  한때 로마 제국을 주도적으로 호령했던 디오클레티아누스로서는 치욕적인 사건이었고, 깊은 상처를 입었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달마티아 속주인 살로나에서 여생을 보냈는데, 살로나에서 6~7마일 떨어진 곳에 웅장한 궁전을 건설한 것으로 보아, 그가 이미 오래전부터 퇴위를 준비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살로나는 자연환경이 탁월해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단지 고향이라고 해서 살로나에서 여생을 보낸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살로나_ 현재의 크로아티아 스플리트(by triple.guide)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궁전에 두 개의 신전을 지어 숭배했습니다. 하나는 아이스쿨라피우스 신의 신전인데 이 신은 건강의 보호자로서 숭배되었으며, 또 하나는 유피테르 신의 신전인데 유피테르 신은 행운의 후원자로서 숭배되었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궁전은 형태가 다양하고 비율도 정확했지만, 방들에 창문이나 굴뚝이 전혀 없었다는 점이 특이한 점입니다. 아마도 안전에 대한 강박으로 인해 그런 것은 아닌지 조심스럽게 추측해 봅니다. 이 방들은 천장으로부터 빛이 들어왔다고 합니다.

살로나의 유적지(by expedia)

 

   예술의 쇠퇴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궁전이 있던 자리에는 아스팔라투스 마을이 생겼다가 그다음에는 스팔라트로가 새로 건설되었다고 합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궁전 일대(현재 크로아티아의 제2도시 스플리트)by 나무위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궁전_황금의 문(왕이 드나드는 정문) by 위키피디아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궁전을 보면 예술적이라기보다 기계적인 규칙에 의해 세워진 것처럼 느껴져서 예술성이 떨어진다는 견해가 있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심미안이나 철학적인 면에서는 거리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무덤위에 세워진 성도미니우스 대성당(크로아티아 스플리트 소재)by expedia

 

   학문의 쇠퇴

 로마가 외부의 침입을 계속 받는 환경이었기 때문에 어쩌면 필연적으로 군인출신 황제가 통치를 하게 되었는데, 그런 환경이 로마의 학문의 부흥에는 기여하지 못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신플라톤 학파

 이 시기에는 신플라톤 학파가 나타났고, 급속한 성장을 했고, 알렉산드리아 학파가 아테네 학파를 완전히 압도했습니다. 신플라톤 학파는 윤리학, 자연과학, 수학 등 인간의 상황과 능력에 적합한 학문 등은 모두 무시했고, 형이상학에 관한 논쟁으로 에너지를 소비했습니다. 또한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의 비밀을 탐구하려 시도하는 과정에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학설을 양립시키려고 노력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들의 그런 노력은 정작 당사자인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도 전혀 알지 못했던 문제들에 적용시키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공허한 망상에 빠져 철학 연구를 마법에 대한 연구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옛 철학자들은 대중적인 미신을 비판했지만, 신플라톤학파의 제자들은 알레고리(은유적으로 의미를 전하는 표현 방식)라는 공허한 겉치레로 감추면서 미신을 열렬히 옹호했다고 합니다.
 신플라톤 학파는 학문의 역사에서는 비중을 차지하지 않지만, 교회사에서는 자주 언급되는데 초기 기독교 신학자들이 교리와 신학을 정립할 때 이들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로마 제국 쇠망사 1권 13장(2) 요약

페르시아와의 전투의 처리를 위해 로마로 온 페르시아 사절은 페르시아와 로마의 필연적인 공존에 대해 이야기했고, 갈레리우스는 분노하며 과거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페르시아에서 포로의 신분으로 당한 모욕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갈레리우스는 페르시아를 정복하여 로마의 속주로 만들려는 야심이 있었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강화를 맺어 전쟁을 종식시켰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는 개선식을 거행했는데, 이 개선식이 로마의 마지막 개선식이었습니다. 이제 로마는 제국 수도로서의 상징성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황제들이 로마에 머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원로원을 존중하지 않았고, 필요한 경우 막시미아누스를 이용해 원로원 의원을 음해하여 고발하기도 했습니다. 니코메디아에 머물렀던 디오클레티아누스도 국가 운영에 더 이상 원로원의 힘을 빌리지 않고 자신이 임명한 장관들과 국정 운영을 하였으며, 페르시아의 궁정 의식을 도입하여 의상이 화려해졌음은 물론 왕관까지 썼습니다. 
분할 통치는 비용이 많이 필요했고, 국민들은 세금으로 고통받았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재위 21년째 되던 해 퇴위했습니다. 퇴위를 하기 싫었던 막시미아누스도 어쩔 수 없이 같이 퇴위했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은퇴 후 살로나에서 농가생활을 했습니다. 그가 세운 건축물들은 웅장했지만 예술성은 떨어진다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이 시기는 예술이 쇠퇴한 시기였다고 합니다. 학문으로는 신플라톤 학파가 성행하였는데, 이 학파는 학문적으로는 비중을 차지하지 못했지만, 기독교의 교리와 신학을 정립할 때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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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와 세 명의 동료 황제 막시미아누스, 갈레리우스, 콘스탄티우스의 통치· 질서와 평온의 전면적인 회복· 새로운 통치 방식·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와 막시미아누스 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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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마니아로 전쟁을 확대하는 프로부스 이전 황제들은 변경 지역 방어에 있어서 게르만족을 방어하는 정도로만 만족했지만, 프로부스 황제는 갈리아를 정복하고자 라인 강을 건넜고, 엘베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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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렐리아누스 황제 사후 군대와 원로원의 동향· 타키투스 황제, 프로부스 황제 및 카루스 황제 부자의 치세 황제 선택을 둘러싼 군대와 원로원 사이의 다툼 로마 황제들은 어떤 상황에 놓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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