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쇠망사 1권 14장(1)(에드워드 기번, 김희용, 윤수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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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저서 읽기/로마제국 쇠망사(에드워드 기번, 윤수인_김희용 옮김)

로마 제국 쇠망사 1권 14장(1)(에드워드 기번, 김희용, 윤수인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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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클레티아누 황제 퇴위 후의 혼란· 콘스탄티우스 황제의 사망·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막센티우스 황제의 즉위· 여섯 황제의 동시 재위· 막시미아누스 황제와 갈레리우스 황제의 사망· 막센티우스와 리키니우스에 대한 콘스탄티누스의 승리· 콘스탄티누스 치하의 제국 통일·법률·전면적인 평화

 

    서기 305년~323년 내전과 혼란의 시기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주도한 4명의 공동 황제 치하에서는 권력 균형이 이루어져서 내분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와 막시미아누스 황제가 퇴위한 후 18년 동안은 불안과 혼돈의 시기였습니다. 
 제국은 5차례에 걸친 내전으로 피폐해졌으며 내전이 없는 시기에도 평온한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황제들의 내분의 결과는 오롯이 국민들이 감당해야 했습니다. 
 

    콘스탄티우스의 품성과 입장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가 퇴위한 후 부황제였던 콘스탄티우스와 갈레리우스가 황제가 되었습니다. 두 명의 새 황제 중 콘스탄티우스가 선임 황제의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는 갈리아, 에스파냐, 브리타니아를 통치했습니다. 콘스탄티우스는 관대하고 온화한 성품으로 신하들 사이에 평이 좋았다고 합니다. 그는 겸손했으며 국민을 섬기는 자세를 지녔다고 합니다. 그의 건강이 악화되자 그의 통치를 받던 속주민들이 몹시 걱정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갈레리우스의 품성과 입장

 반면 갈레리우스는 강한 성격으로 국민들의 애정을 받았지만, 국민들을 섬기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게다가 페르시아 전쟁에서 승리한 그는 한껏 오만해져 있었습니다. 어떤 역사가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퇴위가 갈레리우스의 강요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추측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저자는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보고 있습니다.

갈레리우스의 개선문(서기 298~299년 건축, 페르시아의 수도 크세티폰 함락을 기념_그리스 테살로니키 소재)by 위키피디아
갈레우스의 원형홀_개선문(위의 사진)에 연결해서 건축(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지정)

   두 명의 부황제, 세베루스와 막시미누스

 두 명의 황제가 퇴위하고, 부황제 두 명이 황제가 되었기 때문에 새로운 부황제 2명을 임명해야 했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퇴위하면서 자신의 사위인 갈레리우스를 전적으로 믿고 권한과 책임을 모두 맡겼습니다. 부황제를 임명하는 과정에서 내분이 발생할 수도 있어서 조심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갈레리우스가 부황제로 승격시킨 한 사람은 갈레리우스의 조카였던 막시미누스였습니다. 여러 면에서 미숙했던 막시미누스는 이집트와 시리아의 통치권을 위임받았습니다. 또 한 명의 부황제는 자신의 총신인 세베루스였습니다. 그는 퇴위한 막시미아누스가 통치했던 이탈리아 및 아프리카의 통치권을 양도받았습니다. 두 명의 부황제를 영입한 갈레리우스는 제국의 4분의 3에 해당하는 세력을 확보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병을 앓고 있는 콘스탄티우스가 죽으면 로마의 유일한 지배자가 된다고 확신한 그는 자신의 권력을 세습한 후, 20여 년 후에 은퇴하려는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막시미누스 다자[동방 부제 305년 5월 1일~310년 (5년), 동방 정제 310년~313년 7월(3년)]
세베루스[서방 부제 305년 5월 1일~306년 7월 25일(1년 2개월0, 서방 정제 306년 7월 25일~ 307년 4월(9개월)]

   두 차례의 혁명으로 좌절된 갈레리우스의 야망

 갈레리우스의 계획이 무산된 것은 콘스탄티누스의 등극과 막센티우스의 반란으로 이탈리아와 아프리카를 상실한 후부터였습니다. 

   서기 274년, 콘스탄티누스의 출생, 교육 그리고 도피 · 서기 292년

 1.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인 헬레나가 브리타니아 왕의 딸이라는 소문도 있으나, 사실은 여관 주인의 딸이라고 합니다. 다만 헬레나가 콘스탄티누스의 아버지인 콘스탄티우스의 애첩이라는 소문이 있는데, 소문과는 달리 헬레나는 합법적인 배우자였다고 합니다. 
콘스탄티누스의 아버지 콘스탄티우스는 부황제가 되면서 황제였던 막시미아누스의 양아들이 되었고, 본처와는 이혼하고 막시미아누스의 딸과 재혼해야만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콘스탄티누스는 갑자기 굴욕적인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는 18세였습니다. 그는 자수성가하여 참모장교라는 지위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는 쾌락에 대해서는 냉정하고 무감각했다고 합니다. 국민들은 콘스탄티누스가 부황제가 되길 원했지만, 갈레리우스는 그에게 질투심을 느꼈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신변에 위협을 느꼈고, 아버지 콘스탄티우스는 걱정이 되어서 아들을 만나고 싶다는 편지를 갈레리우스에게 썼습니다. 갈레리우스는 같이 부황제를 지냈던 콘스탄티우스의 부탁을 계속 지연시킬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내 여행 허가가 떨어졌으나 신변의 위험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콘스탄티누스는 브리타니아로 출정하려고 준비하고 있던 불로뉴 항에 국민들의 환호를 받으며 도착했습니다. 

콘스탄티누스가 아버지 콘스탄티우스 황제를 만나러 가는 여정
콘스탄티우스 황제가 불로뉴 항에서 아들 콘스탄티누스를 만나다

 

   서기 306년 7월, 콘스탄티우스의 죽음과 콘스탄티누스의 등극

로마 제 44대 황제[306년 7월 25일~337년 5월 22(제위기간 31년)] by Phillip Jackson at York Cathedral, England.

 콘스탄티우스는 브리타니아 원정과 칼레도니아에서 거둔 승리를 마지막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부황제에서 황제가 된 지 15개월 만에 숨을 거둔 것입니다. 그가 사망하자 콘스탄티누스가 뒤를 이어 등극했습니다. 콘스탄티누스가 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세습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다고 합니다. 
 콘스탄티누스의 지지자들은 군단병들에게 콘스탄티누스의 지지를 호소했습니다. 그들은 군단병들이 지지하면 브리타니아, 갈리아, 에스파냐도 묵인해 줄 것이라는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 힘썼습니다. 콘스탄티누스가 바라는 것은 황제의 자리였습니다. 갈레리우스로부터 무수히 죽을 고비를 넘겨온 그로서는 살아남기 위해서는 황제가 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는 갈레리우스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어쩔 수 없이 휘하 군대의 강요에 의해 황제의 자리를 간청할 수밖에 없었다는 내용을 써서 보냈습니다. 갈레리우스는 엄청난 분노를 느꼈지만, 현실적으로 콘스탄티누스가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콘스탄티누스의 타협안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갈레리우스는 콘스탄티누스에게 황제의 자리를 주지 않았고 서열 4위의 부황제의 자리를 주었으며, 콘스탄티우스가 죽으면서 비어 있는 황제 자리는 자신의 총신인 세베루스에게 수여했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조급해하지 않고 황제가 될 때까지 기다리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의 형제자매

 콘스탄티누스의 아버지 콘스탄티우스는 두 번의 결혼으로 아들 3명, 딸 3명을 두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전처의 소생으로 미천한 처지였지만, 나머지 5명의 이복형제들은 황실 출신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콘스탄티우스가 굳이 전처소생인 콘스탄티누스에게 우선권을 준 것은 당시의 불안한 정세로 인해 가장 안전한 선택을 한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복형제 중 가장 나이가 많은 형제가 13살이었고 콘스탄티누스의 나이는 32세였기 때문에 죽음을 앞둔 콘스탄티우스로서는 현명한 선택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아버지의 간곡한 유언에 따라 이복형제들과도 반목하지 않고 황실의 특혜를 받고 살게 해 주었으며, 이복형제들도 콘스탄티누스의 탁월한 능력을 인정했다고 합니다. 
 

  세금에 대한 로마인들의 불만

 2. 황제들이 로마를 오랫동안 비우자 로마에서는 불만과 분노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두 황제가 퇴위했는데도 두 황제가 머물렀던 니코메디아와 밀라노가 편애를 받는다고 생각한 로마시민들은 이 현상이 일시적인 것이 아니고 항구적으로 계속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분노하였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퇴위한 후 그의 후계자들이 로마에 그의 이름으로 화려한 목욕탕들을 지어서 기증했지만 반응은 냉랭했습니다. 심지어 그 건물들을 지을 때 사용된 비용이 로마 시민에게 전가될 것이라는 소문까지 나돌았습니다. 
 이런 시기에 갈레리우스는 토지세와 인두세를 일괄 징수하기 위해 국민들의 재산을 매우 정밀하고 엄격하게 조사했습니다. 재산을 은닉하려는 사람은 고문까지 하는 등 철저한 조사를 해나갔습니다. 로마는 다른 속주에 비해 특혜를 많이 받았는데 더 이상 그런 특혜를 바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로마 시민들은 마케도니아 정복 후 인두세를 면제받고 있었습니다. 이 면세 특권만은 500년 동안 계속 누려왔던 것입니다. 그런데 갈레리우스 황제가, 더구나 로마에는 없고 먼 아시아에 머무는 황제가 로마를 속주들처럼 취급하는 것에 불만이 터져 나왔습니다. 황제들로부터 외면받았던 원로원은 시민들의 불만을 묵인했고, 비슷한 처지의 잔류 근위병들은 황제들을 추방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로마 시민들은 과거처럼 로마에 머무를 황제를 뽑고 싶었고, 로마 시민들의 바람이 막센티우스에게 유리하게 작용했습니다. 그는 디오클레티아누스와 같이 퇴위했던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아들이었습니다. 

   서기 306년 10월, 로마에서 황제로 선포된 막센티우스 막시미아누스가 다시 제위를 차지함

 막센티우스는 갈레리우스의 딸과 결혼했습니다. 전임황제의 아들이며, 현재 황제의 사위인 막센티우스는 제국을 승계할 가능성이 가장 큰 인물이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가 뛰어난 능력 때문에 오히려 배제된 반면 막센티우스는 악덕과 무능 때문에 배제되었습니다. 갈레리우스는 자신에게 무조건적인 복종을 할 공동 통치자를 임명하고 싶어 했기 때문에 자신의 총신인 세베루스를 공동 황제에 임명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콘스탄티누스가 군단병의 지지로 부황제까지 올랐다는 것을 알고, 막센티우스는 질투심으로 인해 이성을 잃을 정도로 분노했습니다. 그러나 막센티우스는 갈레리우스가 세금문제로 로마시민의 분노를 일으켰다는 것을 알고 그 분노를 교묘히 이용했습니다. 그는 근위대 지휘관 2명과 병참 장교 한 명과 공모하여 세베루스에게 충성하던 수도 총독과 몇 명의 행정관들을 학살했습니다. 그리고 원로원과 로마 시민들의 박수갈채 속에서 황제의 직위를 부여받았습니다. 
 막센티우스의 아버지 막시미아누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와 함께 퇴위한 후에도 항상 권력에 대한 욕망을 갖고 있었는데, 아들 막센티우스를 도와준다는 명분으로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여 다시 황제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이전 황제였던 막시미아누스의 등장은 막센티우스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세베루스의 패배와 죽음 서기 307년 2월

 세베루스 황제는 갈레리우스 황제의 명령에 따라 막센티우스를 응징하기 위해 로마로 달려갔습니다. 그는 경험 없는 막센티우스를 간단하게 제압할 수 있을 거라 판단했지만, 성문은 닫혀있었고 근위대장 아눌리누스도 막센티우스의 지지를 선언하고 그의 편에 가담했습니다. 예상과는 달리 상황이 상당히 불리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한 세베루스는 급하게 라벤나로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라벤나의 요새는 공격에 견딜만했고, 라벤나 함대에서 바다를 통해 보급품을 얼마든지 보급받을 수 있었습니다. 또한 봄이 되면 일리리쿰과 동방에서 오는 지원부대가 자유롭게 입성할 수도 있었습니다. 
 전쟁 경험이 많았던 막시미아누스는 라벤나의 요새를 공격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시간낭비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세베루스의 심리 상태를 이용해서 항복을 받아내려는 계획을 했습니다. 세베루스는 이미 로마에 있는 자신의 군대에게 배신을 당한 상태였기 때문에 심리적으로 상당히 위축되어 있었습니다. 막시미아누스는 그에게 명예로운 항복 조건을 받아들이라고 회유했습니다. 그러나 생명은 보장하겠다고 한 조건과는 달리 그는 죽음을 맞이해야 했고 황제로서의 장례식만을 허락받았습니다.
 

    서기 307년 3월, 막시미아누스가 콘스탄티누스에게 황제의 칭호를 부여함

 콘스탄티누스와 막센티우스는 서로 다른 성품을 가지고 있었지만, 갈레리우스라는 공동의 적에 대항하기 위해 연합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막센티우스의 아버지 막시미아누스는 연령이나 지위에서 콘스탄티누스보다 우위에 있었으나 직접 알프스 산맥을 넘어가 갈리아의 군주 콘스탄티누스와의 면담을 욕구했고, 동맹의 보증으로 딸 파우스타를 데리고 갔습니다.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딸 파우스타( by 나무위키)

 콘스탄티누스와 파우스타는 아를에서 성대한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막시미아누스는 부황제였던 콘스탄티누스에게 황제의 칭호를 수여했습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는 막시미아누스와의 연대를 흔쾌히 받아들이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자신의 여건상 거절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마지못해 받아들인 것으로 보입니다. 
 

   갈레리우스의 이탈리아 침입

 세베루스 황제가 죽게 되자 갈레리우스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에 진입했습니다. 그는 분노하여 원로원과 로마 시민들을 절멸시키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전쟁 경험이 많았던 막시미아누스는 방어를 철저히 했습니다. 갈레리우스는 이탈리아 침입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화해를 시도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로마시민들은 세금으로 인해 갈레리우스에게 반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무찌르는 데 많은 재산을 내놓았습니다. 막센티우스와 막시미아누스는 많은 돈을 살포하고, 더욱 많은 포상금을 주겠다는 소문을 퍼뜨려서 갈레리우스가 데리고 온 일리리쿰 군단들의 전의를 꺾고 충성심을 와해시켰습니다. 마침내 갈레리우스가 퇴각 명령을 내렸을 때는 군기마저 버리고 도망가는 고참병들을 말리지도 못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갈레리우스의 후퇴

 갈레리우스의 군단병들은 퇴각 도중에도 약탈을 자행하고 마을마다 불을 지르는 등 한심한 행동을 했습니다. 막센티우스는 그들의 배후를 추격하기는 했지만 그들과의 교전은 피했습니다. 막시미아누스는 이제 사위가 된 콘스탄티누스를 설득하여 추격에 참가하게 하여 확실한 승리를 하고 싶었으나 콘스탄티누스는 세력균형을 위해 전투에 참가하는 것을 꺼려했습니다.
 

  서기 307년 11월, 리키니우스가 황제의 자리에 오름·

막시미누스의 등극 ·서기 308연, 여섯 명의 황제

 

 갈레리우스는 자신과 비슷한 취향과 성격이었던 리키니우스를 각별하게 생각했습니다. 군대 시절부터 같이 생활하면서 승진도 같이 하면서 우정이 돈독해졌습니다. 갈레리우스는 콘스탄티누스의 자리였던 서방황제의 자리를 리키니우스에게 넘기기로 했습니다. 그는 실패했던 원정에서 돌아오자 죽은 세베루스를 대신해 리키니우스를 앉혔고, 일리리쿰 속주를 직접 통치할 수 있는 권한도 주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갈레리우스의 조카 막시미누스는 질투와 불만을 나타내며 갈레리우스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부황제를 벗어던지고 황제가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6명의 황제가 로마 제국을 다스리는 특이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서방에서는 막시미아누스, 막센티우스, 콘스탄티누스가 동방에서는 갈레리우스, 리키니우스, 막시미누스가 통치하게 되면서 제국은 두 개의 적대적인 세력으로 분열되었습니다.
 

    막시미아누스의 불행 서기 310년 2월, 막시미아누스의 죽음

 처음 막시미아누스가 디오클레티아누스와 함께 퇴위했을 때 그는 철학적인 황제로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막시미아누스는 누구보다 권력욕이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그의 아들 막센티우스도 권력욕이 강했습니다. 이런 두 사람이 사이좋게 권력을 나눈다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서로의 입장차이가 컸는데, 막센티우스는 자신이 잘나서 스스로 황제가 되었다고 생각하였고, 아버지 막시미아누스는 자신의 후광으로 아들이 황제가 되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근위대가 막센티우스를 지지하자, 막시미아누스는 리키니우스가 통치하고 있는 일리리쿰으로 갔습니다. 이에 화가 난 갈레리우스는 자신의 영토에서 떠나라고 강요했기 때문에 막시미아누스는 사위 콘스탄티누스의 궁정으로 피신하게 됩니다. 콘스탄티누스와 딸 파우스타는 막시미아누스를 따뜻하게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막시미아누스는 권력에 대한 강렬한 야망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사위 콘스탄티누스가 프랑크 족을 무찌르기 위해 라인 강 유역으로 출정한 사이 자신이 황제가 되어 아를에 있는 많은 재물을 다 차지했습니다. 그는 그 재물들을 병사들에게 마구 나누어주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나타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소식을 들은 콘스탄티누스는 급히 돌아왔습니다. 콘스탄티누스가 아를의 성문 앞에 데리온 병력은 막시미아누스가 대적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니었기에 그는 마르세유로 도망쳤습니다. 
 마르세유는 요새화되어 있었고 필요한 경우 바다로 도망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는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아들 막센티우스가 아버지를 구한다는 명분을 핑계로 갈리아를 차지하기 위해 구원군을 보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콘스탄티누스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속전속결로 마르세유를 점령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공성용 사다리들이 마르세유 성벽에 비해 너무 짧아서 공격이 쉽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르세유의 수비대는 콘스탄티누스에게 겁을 먹고 막시미아누스와 도시를 모두 넘겨주었습니다. 
 그는 세베루스와 같은 방법으로 죽었는데, 대외적으로는 죄책감에 시달리다 자살했다는 것으로 발표되었다고 합니다. 저자는 콘스탄티누스가 자신의 장인인 막시미아누스를 용서해주었다면 한층 높은 평가를 받았을 것이라며 아쉬움을 나타냈습니다. 
 

  서기 311년 5월, 갈레리우스의 죽음·

막시미누스와 리키니우스에게 분배된 갈레리우스의 지배권

 갈레리우스는 이탈리아에서 막센티우스와 막시미아누스 부자에게 패배한 후에도 4년 정도 더 살면서 쾌락을 즐기고 공공사업을 실행하는 데 여생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무절제한 생활로 몸은 비대해졌고 온몸이 종기로 뒤덮인 채, 그 종기를 벌레떼가 파먹어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가 니코메디아에서 숨을 거두자, 그의 지원으로 황제가 되었던 리키니우스와 막시미누스는 갈레리우스가 가지고 있었던 영토를 분쟁 없이 분할했습니다. 아시아의 속주들은 막시미누스가, 유럽의 속주들은 리키니우스가 차지했습니다. 

로마 제국을 관통하는 두 해협에 엄청난 병력과 무기, 요새로 뒤덥혔다.(막시미누스(아시아)와 리키니우스(유럽)의 통치권이 해협을 사이에 두고 있음)

 막시미아누스와 갈레리우스가 사망함으로써 이제 황제는 6명에서 다시 4명이 되었습니다. 국민들은 다시 유혈사태가 생길까 봐 공포에 떨고 있었습니다.
 

  서기 306~312년, 콘스탄티누스의 갈리아 통치

 콘스탄티누스는 재위 6년째 되던 해 오툉을 방문해 공납금 전액을 탕감해 주었을 뿐 아니라 인두세와 토지세의 과세 표준이 되는 인구수를 2만 5천 명에서 1만 8천 명으로 줄여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때는 국민이 도탄에 빠져 있는 때라 이런 혜택도 국민들에게는 그렇게 와닿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무거운 세금을 피하기 위해 유랑민이나 부랑자로 사는 것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콘스탄티누스가 통치하는 갈리아는 그의 용맹성으로 야만족의 침입에서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프랑크족과 알레만니족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후 그들의 왕들 가운데 몇 사람을 트레브의 원형경기장에서 맹수들에게 내던지게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행동은 국가 간의 규약과 인도주의적 원칙에 위배된다고 합니다.
 

   서기 306~312년, 이탈리아와 아프리카에서의 막센티우스의 폭정

 막센티우스의 악덕은 콘스탄티누스의 미덕을 더욱 돋보이게 했습니다. 갈리아의 속주들은 행복을 누린 반면, 이탈리아와 아프리카의 속주민들은 잔인하고 탐욕스러운 폭군의 통치 아래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막센티우스는 아프리카에서 단지 소규모 반란이 일어났다는 이유로 키르타와 카르타고를 비롯해 속주 전체를 창검과 화재로 황폐화시켰습니다. 아프리카에서는 반란과 관련하여 엄청난 수의 밀고자들이 나타나면서 부자들이 반란 가담자로 지목되어 재산을 몰수당했습니다. 막센티우스는 반란 진압을 축하하기 위해 성대한 개선식을 거행했습니다. 
 막센티우스는 자신이 황제가 될 때 지지해 준 원로원들에게 자발적 기부금이라는 명목하에 돈을 거두었고, 각종 명목으로 기부금을 받았고, 액수도 점점 커졌습니다. 게다가 원로원의 부인과 딸들은 호색한 황제 때문에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막센티우스 황제 앞에서 채찍질 당하는 알렉산드리아의 성 카타리나(야코포 틴토레토)

 막센티우스가 눈치를 보는 사람들은 오직 군인들 밖에 없었습니다. 군인들은 약탈과 범죄를 저질러도 제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폐해는 모두 로마 시민들의 몫이었습니다.
 로마시민들은 황제가 로마에 머물지 않아서 불만이었는데, 이제는 로마에 머무는 막센티우스 때문에 6년 동안이나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로마제국 쇠망사 1권 14장(1) 요약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주도로 4명의 공동 황제가 제위 하였을 때는 힘의 균형이 잘 이루어졌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와 막시미아누스 황제가 퇴위한 후 18년 동안은 혼란한 상태가 지속되었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
(퇴위)
막시미아누스(황제)
(퇴위)
갈레리우스(부황제 )콘스탄티우스(부황제)

 부황제에서 황제가 된 갈레리우스는 자신의 조카와 총신을 부황제로 영입함으로써 병으로 고생하는 콘스탄티우스만 사망하면 자신이 제국을 장악할 수 있을 거라 예상하고 세습을 준비했습니다.

콘스탄티우스(황제)
(병으로 사망)
갈레리우스(황제)막시미누스
(부황제_갈레리우스의 조카)
세베루스
(부황제_갈레리우스의 총신)

 그러나 변수가 생겼는데, 콘스탄티우스의 아들 콘스탄티누스와 막시미아누스의 아들 막센티우스의 등장이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국민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갈레리우스가 그를 없애려 하였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우여곡절 끝에 아버지 콘스탄티우스를 만났고, 얼마 후 아버지 콘스탄티우스는 병으로 사망했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죽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려고 했으나, 갈레리우스는 그를 제지하고, 마지못해 서열 4위인 부황제 자리를 주었습니다.
 로마에서는 세금 징수를 위해 재산을 조사하는 갈레리우스 황제에게 불만이 터져 나왔고, 그 기회를 포착하여 퇴위하였던 막시미아누스와 그의 아들 막센티우스가 황제가 되어, 로마 제국은 6명의 황제가 공동 통치하는 사상 초유의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갈레리우스(황제)세베루스(황제)_사망막시미누스
(황제)
콘스탄티누스(황제)
막시미아누스(황제)막센티우스(황제)

 세베루스가 로마를 차지한 막센티우스와 막시미아누스를 제압하려 갔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자 후퇴했다가 막시미아누스의 심리전에 당해 목숨을 잃었습니다. 갈레리우스는 세베루스의 황제 자리를 자신의 군대 동기였던 리키니우스에게 주었습니다. 

갈레리우스(황제)_사망리키니우스(황제)막시미누스
(황제)
콘스탄티우스(황제)
막시미아누스(황제)_사망막센티우스(황제)

 한편, 아들 막센티우스와의 불화로 사위인 콘스탄티누스를 찾아갔던 막시미아누스는 사위의 제위를 뺏으려다 죽음을 맞았고, 갈레리우스는 무분별한 생활로 비만과 피부에 생긴 종기로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갈레리우스가 죽자 그의 통치권은 리키니우스와 막시미누스가 넘겨받았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갈리아를 잘 통치하여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고, 막센티우스는 로마에서 폭정을 일삼았기 때문에 로마 시민은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리키니우스(황제)막시미누스
(황제)
콘스탄티누스(황제)막센티우스(황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