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제국 쇠망사 1권 14장(2)(에드워드 기번, 윤수인, 김희용 옮김)
본문 바로가기

위대한 저서 읽기/로마제국 쇠망사(에드워드 기번, 윤수인_김희용 옮김)

로마제국 쇠망사 1권 14장(2)(에드워드 기번, 윤수인, 김희용 옮김)

서기 312년, 콘스탄티누스와 막센티우스 사이의 내전

 저자는 콘스탄티누스가 막센티우스에게 핍박받는 로마인들을 구하기 위해 출정했다는 추측에 대해서는 근거가 없다는 입장입니다. 콘스탄티누스의 장인인 막시미아누스가 사망하자 그의 호칭이 소멸했음은 물론 조각상들도 무참히 파괴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는 반역자에 대한 관례적인 조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막센티우스는 효심이라는 가면을 쓰고 이탈리아와 아프리카에 있던 콘스탄티누스의 조각상도 똑같이 파괴했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막센티우스의 행동에 처음엔 반응하지 않았지만 결국 한 번은 결전을 치를 수밖에 없다는 판단을 했습니다. 
 막센티우스는 갈리아를 침공하기 위해 대규모 병력을 라에티아 방면에 집결시켜 놓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뇌물과 감언이설로 일리리쿰의 용맹한 군단들을 포섭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하고 있었습니다. 
 폭정에 시달리던 원로원과 로마 시민의 사절을 비밀리에 만난 콘스탄티누스는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의 심장부에서 결전을 벌이기로 결심했습니다.
 

  준비

 막센티우스는 근위대의 병력을 8만 명으로 증대시켰습니다. 또한 4만 명의 무어인과 카르카고인 병사들을 모집해 두었습니다. 시칠리아에서 공급된 군사들까지 하면 총병력은 보병 17만 명과 기병 1만 8000명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탈리아는 전쟁준비로 피폐해졌습니다. 
 이에 비해 콘스탄티누스의 병력은 보병 9만 명과 기병 8000명의 규모였습니다. 게다가 라인 강 방어를 소홀히 할 수 없기 때문에 이탈리아 원정에 군사력의 반 이상을 동원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4만여 명이 병사를 동원했는데, 이는 막센티우스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병력이었습니다. 그러나 병사들의 정신력과 용맹함에 있어서는 향락에 찌들어있는 로마 군대에 비해 훨씬 우세했습니다. 
 군사력의 규모만으로 자신만만했던 막센티우스는 승리의 기대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알프스 산맥을 넘는 콘스탄티누스· 토리노 전투

 콘스탄티누스는 코티안알프스(몽스니) 가도를 통해 피에몬트 평원으로 내려갔는데, 막센티우스는 콘스탄티누스가 출정했다는 보고도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시간을 다투고 있었기 때문에 몽스니 산기슭에 있는 도시인 수사를 포위 공격 없이 바로 정면 돌파했습니다. 

 이탈리아 군대는 토리노 평원에 대규모의 이탈리아 군을 집결시켜 놓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동방에서 온 중기병대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밀집 종대형으로 정렬한 상태로 자신만만하게 콘스탄티누스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토리노의 위치

 콘스탄티누스는 상대군이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정렬 대형을 분리하였고, 당황한 이탈리아 군대는 토리노로 도망쳤지만, 성문이 굳게 닫혀 있었기 때문에 거의 모든 병사들이 죽음을 피하지 못했습니다. 이로써 거의 모든 도시들이 콘스탄티누스의 통치권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베로나 공성전

 콘스탄티누스는 아이밀리아 가도(街道)와 플라미니아 가도를 통해 400마일(약 640km) 가량을 쉽게 진군할 수 있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막센티누스와 교전을 하기 전에 자신의 진격에 방해가 되거나 만일의 경우 퇴각할 때 퇴로를 차단할 수도 있는 이탈리아 부대를 정리하려고 했습니다.
 베로나 본부에서 베네치아 속주에 있는 모든 군대를 지휘하고 있는 루리키우스 폼페이우스 장군은 콘스탄티누스가 진격해 온다는 보고를 받고 대규모 기병대를 파견했습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 부대는 패배했고, 콘스탄티누스 부대는 베로나 성문까지 폼페이우스 부대를 바싹 쫓아갔습니다.

베로나 (이탈리아 북부 베네토주 아디제 강 유역에 위치해 있는 도시)
아디제 강(이탈리아) by 나무위키

베로나 성은 삼면이 아디제 강의 급류에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서쪽의 좁은 반도형 지역을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베로나에서 위쪽으로 얼마쯤 떨어진 곳에, 물의 흐름이 완만한 곳을 알아내어 강을 건넌 후 베로나를 포위공격했습니다. 끝까지 콘스탄티누스와 맞서던 폼페이우스 장군은 결국 도주했습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 장군은 곧 충분한 규모의 군대를 조직해서 콘스탄티누스의 포위 공격에 맞서게 됩니다.
 콘스탄티누스는 포위공격을 위해 군대의 일부를 남겨놓고 막센티누스와의 결전을 위해 정예부대를 이끌고 진군했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숫적인 면에서 훨씬 불리했지만, 밤새도록 사투를 벌인 끝에 동틀 무렵이 되어서야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의 승리가 알려지자, 베로나는 즉시 항복했습니다. 콘스탄티누스의 장교들은 온몸을 바쳐 싸운 콘스탄티누스에게 이제 로마 제국의 안위를 위해서 몸을 보존할 것을 당부했습니다.
 

   막센티우스의 나태함과 두려움

 막센티우스는 내전이 벌어지고 있는 와중에도 쾌락의 탐닉에 몰두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패배를 국민에게 은폐하고, 헛된 자신감에 빠져 호언장담하며 대비책을 강구하는 일에 시간만 지체시켰습니다. 
 아버지 막시미아누스 휘하에서 복무했던 노련한 고참병들은 어쩔 수 없이 막센티우스에게 현실을 인식하게 하고, 남은 병력을 모아 결사항전해야 한다고 조언했습니다. 이제 근위대를 주축으로 제3의 군대가 편성되었습니다. 막센티우스는 몸소 출전할 의사가 전혀 없었으나, 그런 그를 시민들이 경멸했기 때문에 수치심에서 어쩔 수 없이 출전했습니다. 격앙된 시민들은 오히려 콘스탄티누스의 기백을 찬양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서기 312년 10월, 로마 근교에서 콘스탄티누스의 승리

 콘스탄티누스는 막센티우스가 전쟁에 나타나지 않고 로마의 성벽 안에 머물 경우, 로마을 파괴해야 하는 상황을 우려하고 있었는데, 막센티우스가 출전했다는 것을 알고 놀라면서도 기뻐했다고 합니다. 막센티우스의 병사들은 테베레강을 배수진으로 하고 광활한 평원을 가득 메웠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몸소 돌격했습니다. 그의 용감한 돌격에 이탈리아군은 군기를 미련 없이 버리고 도주했습니다. 근위대는 막센티우스와 같은 배를 탔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목숨 걸고 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근위대가 있던 자리는 시체로 뒤덮였고, 막센티우스 군은 추격에 쫓겨 테베레 강의 급류 속으로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막센티우스도 밀비우스 다리를 건너 도주하려고 했으나 사람들에 밀려 강물로 떨어졌고 갑옷의 무게로 익사했습니다. 진흙에서 찾아낸 막센티우스의 시체는 참수되었고, 콘스탄티누스는 생애 최고의 날을 맞이했습니다. 

밀비우스 다리 전투, 줄리오 로마노(by 브리태니커)

  콘스탄티누스의 조치

 콘스탄티누스는 막센티우스의 두 아들을 사형에 처하고 그 일족을 모두 몰살했습니다. 이는 전투에 패배했을 때 통상적으로 이루어지는 처분이었습니다. 그동안 학정에 시달렸던 로마 시민들은 더 많은 죽음을 원했지만 콘스탄티누스는 평정심을 찾고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무고하게 감옥살이를 했던 사람들은 대사면령이 내려져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원로원에 나타나서 원로원의 위엄과 특권을 회복시켜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원로원은 세 명의 황제 가운데 콘스탄티누스를 선임 황제로 결정했습니다. 
 저자는 승리를 기념하여 건축한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은 당대 예술이 이미 쇠퇴기에 접어들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말합니다. 개선문에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개선문에서 떼어낸 조각도 붙였습니다. 파르티아인들 하고 싸워본 적이 없는 콘스탄티누스의 발밑에 파르티아인 포로들이 무릎 꿇어 엎드려있습니다. 개선문은 예술성도 없이 조잡하게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계속된 내전으로 경제난을 겪고 있었으며, 로마에서는 더 이상 실력 있는 조각가들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콘디탄티누스 개선문(By 위키백과)

 막센티우스를 위해 목숨 걸고 싸웠던 근위대는 전면 해체되었습니다. 남아 있던 소수의 근위대 병사들은 변방 지역으로 추방되었습니다. 이제 로마는 무장 해제되어 버렸습니다. 로마 시민들은 갈레리우스 황제의 세금정책에 반기를 들어 막센티우스를 황제로 추대했었습니다. 그런데 막센티우스가 원로원에게 자발적 기부금이라는 명목으로 공납금을 거둬들였던 반면, 콘스탄티누스는 원로원의 공납금을 아예 항구적인 세제로 전환해 버렸습니다. 더구나 가난한 사람에게 까지 금화 일곱 닢을 부과했다고 합니다. 콘스탄티누스는 막센티우스와 전투가 끝난 후 2~3개월 정도 로마에 머물렀을 뿐 그 이후로는 여러 속주를 돌아다니며 임시로 머물렀을 뿐 로마에는 머물지 않았다고 합니다.
 

   서기 313년 3월, 리키니우스와 제휴한 콘스탄티누스 서기 313년, 막시미누스와 리키니우스 사이의 전쟁 

  4월, 막시미누스의 패배  8월 막시미누스의 죽음

 

 콘스탄티누스는 막센티우스와 결전을 치르기 전에 일리리쿰 황제인 리키니우스에게 중립을 지키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었고, 전투가 끝난 후 콘스탄티누스의 여동생과 리키니우스의 결혼식을 치르기로 하였습니다. 
 막센티우스와 동맹관계에 있던 막시미누스는 막센티우스의 패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리키니우스를 공격하기 위해 혹독한 추위를 이겨내며 보스포루스 해협에 도달했습니다. 막시미누스는 11일간의 포위 공격으로 비잔티움의 항복을 받아내었습니다. 막시미누스와 리키니우스는 협상을 하다가 협상이 결렬되면서 전투를 하게 되었습니다. 
 리키니우스의 3만 명의 병력은 막시미누스의 7만 명 이상의 병력에 압도당했습니다. 그러나 리키니우스와 휘하 군사들이 정신력에서 우세를 보여서 전투에서 승리했습니다. 막시미누스는 빛처럼 빠른 속도로 도주하여 160마일(약 257km)이나 떨어진 니코메디아에 나타났습니다. 그는 리키니우스와의 전투 후 3~4개월밖에 더 살지 못했습니다. 그의 사망 원인에 대해서 여러 가지 가설들이 있지만, 중요한 것은 어느 누구도 그의 죽음에 슬퍼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막시미누스가 죽은 후 동방의 여러 속주들은 흔쾌히 리키니우스의 권위를 인정했습니다.
 

   리키니우스의 잔인성

 막센티우스에게는 7~8세 가량의 어린 아들과 딸이 있었는데, 리키니우스는 위협적인 존재도 아닌 그들을 죽였습니다. 또한 자신의 전임황제인 세베루스의 아들 세베리아누스와 자신을 황제로 만들어준 갈레리우스의 사생아 칸디디아누스를 죽임으로써 배은망덕한 인성을 나타냈습니다. 심지어 디오클레티아누스의 황제의 아내와 딸도 그의 잔인성에 희생되었습니다.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자신이 은혜를 받은 사람들의 가족을 죽였다는 것입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4명이 공동 황제로 있을 때 갈레리우스를 양자로 삼고 부황제 자리를 주면서 자신의 딸 발레리아를 갈레리우스와 결혼시켰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퇴위하면서 갈레리우스에게 황제 자리와 자신의 모든 권한을 물려주었습니다. 발레리아는 황후의 역할에 충실했고, 자녀가 없었기 때문에 갈레리우스의 사생아 칸디디아누스를 아들로 삼아 친아들처럼 잘 키웠습니다. 
 갈레리우스가 사망했을 때, 당시 갈레리우스의 조카이면서 공동황제를 맡고 있던 막시미누스가 발레리아의 매력과 재산에 눈이 멀어 자신의 아내와 이혼까지 불사하면서 발레리아에게 구혼했습니다. 발레리아는 막시미누스의 사자로 온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정절만을 고려하면 저와 같은 처지의 여성들도 재혼을 생각해볼 수 있겠지만, 품위를 고려하면 적어도 남편이자 은인인 분의 시체의 온기가 채 가시지도 않았을뿐더러 제 마음 또한 여전히 슬픔에 잠겨 상복을 입고 있는 이 시점에 폐하의 구혼에 귀 기울이는 것은 허용될 수 없는 일입니다. 또한 감히 말씀드리거니와 정숙하고 애정이 깊은 아내를 버리려는 무정하고 변덕스러운 분의 고백은 신뢰할 수 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막시미누스는 사랑이 분노로 돌변하여 그녀의 재산을 몰수했으며, 그녀의 환관과 하인들에게 비인간적인 고문을 가했으며, 그녀의 명성을 무너뜨리려고 그녀와 친분이 있던 훌륭한 부인들 마저 간통이라는 죄목으로 처형했습니다. 또한 발레리아 자신과 어머니 프리스카는 유배형에 처해졌습니다. 그들은 시리아 사막의 외딴 마을에 감금되어서 수치스러운 삶을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퇴위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막시미누스에게 항의하고 자신과 함께 살로나에서 은퇴생활을 할 수 있게 해달라고 애원했으나, 막시미누스는 이미 이빨 빠진 호랑이였던 디오클레티아누스를 냉담하게 경멸할 뿐이었습니다. 그가 죽자 두 모녀는 유배지를 탈출하여 변장을 한 채 리키니우스의 궁전으로 향했습니다. 리키니우스는 갈레리우스와 군대시절 친한 동기였고 갈레리우스가 리키니우스에게 황제자리를 주는 등 많은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두 모녀는 환대받으며 입성할 것이라 기대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배은망덕의 최고봉인 리키니우스가 자신이 공들여 키운 양아들 칸디디아누스를 죽인 것은 물론, 니코메디아의 궁전에서 연일 피바람이 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리키니우스가 막시미누스보다 더한 폭군이라는 것을 알게 된 두 모녀는 서둘러 도피했습니다. 15개월 동안이나 속주 여러 곳을 전전하던 두 모녀는 이미 사형선고가 내려졌기 때문에 테살로니카에서 발각된 즉시 참수되었다고 합니다. 이들에게서는 어떠한 범죄 사실도 발견할 수 없었고, 세간의 평판이 좋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들의 죽음을 슬퍼했다고 합니다.
 

   서기 314년,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 사이의 불화

 

 이제 막센티우스와 막시미누스가 죽음으로써 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누스의 서방 제국, 리키니우스의 동방 제국으로 양분되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여동생 아나스타시아를 명문가이면서 부유한 바시아누스와 결혼시키면서 부황제로 등용했습니다. 그러나 기존의 관례대로라면 이탈리아와 아프리카까지 바시아누스가 통치해야 했지만, 이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습니다. 바시아누스의 부황제 자리는 리키니우스의 동의를 얻어 이루어졌습니다. 
 교활한 리키니우스는 바시아누스와 편지를 교환하면서 무력으로라도 권리를 차지하라고 부추겼습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가 이 음모를 간파했고, 바시아누스의 부황제의 지위를 박탈하고 처형했습니다. 또한 리키니우스가 범죄를 공모한 세라키오를 넘겨달라고 했는데, 리키니우스가 거절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저자의 기록과 다른 의견도 있습니다. 콘스탄티누스의 아내 파우스타가 임신하자, 아이가 태어나면 나중에 부황제인 바시아누스와 정적이 될 수 있을 거라 판단하여 일부러 반역을 조장하여 처형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탈리아 변경 지대의 아에모나에서 콘스탄티누스 조각상에 대한 모독 사건이 발생했는데, 이 사건은 두 군주 간의 불화를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 사이의 제1차 내전

  최초의 전투는 키발리스 부근에서 벌어졌습니다.

사바 강변에 위치한 판노니아의 도시 키발리스(현 크로아티아)의 위치

 
 두 황제의 병력이 소규모인 것을 볼 때, 갑작스럽게 전투가 전개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콘스탄티누스의 병력은 2만 명, 리키니우스의 병력은 3만 5천 명이었습니다. 첫 번째 전투는 숫적으로 열세한 콘스탄티누스의 승리였습니다. 
 해가 뜰 무렵부터 늦은 저녁 시간까지 승패를 알 수 없는 전투가 계속되고 있었는데, 콘스탄티누스가 이끄는 우익이 맹렬하고 결정적인 돌격을 감행하자 리키니우스는 퇴각명령을 내렸고, 진지와 군수 물자를 모두 버린 채 휘하 군사와 함께 은밀하게 도주하였습니다. 그는 빠른 퇴각으로 시르미움에 맡겨 두었던 가족과 재물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그는 도주하는 동안에 일리리쿰 변경을 관할하는 휘하 장군 발렌스에게 부황제 자리를 주었는데, 발렌스의 지휘 아래 군대를 모았는데 그 공으로 부황제 지위를 준 것 같습니다. 그러나 리키니우스의 배은망덕한 성격으로 보았을 때 위급 상황에서의 즉흥적인 행동이었던 것 같습니다.
 

   마르디아 전투

마르디아

 두 번째 전투인 마르디아(현 불가리아) 전투도 콘스탄티누스의 대승리였습니다. 리키니우스의 군대는 마케도니아의 산악 지대로 무사히 퇴각했습니다. 리키니우스의 특사 미스트리아누스가 콘스탄티누스에게 화평을 제의하자 콘스탄티누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짐이 서쪽의 대양 연안에서 출발하여 연전연승을 거두며 진군해 온 것은 그러한 목적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배은망덕한 친족을 쫓아낸 짐이 어찌 비천한 노예를 동료로 받아들이겠는가. 발렌스의 퇴위가 강화 조약이 첫 번째 조건이어야 한다.

 반역을 꾀한 자신의 여동생의 남편 부황제 바시아누스도 처형했는데, 리키니우스가 정한 발렌스의 부황제 자리는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12월, 평화 협상

 콘스탄티누스의 화평조건에 따라 불운한 발렌스는 재위 며칠 만에 제위와 생명을 모두 빼았겼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세력면에서 있어서는 우위에 있었지만, 계속 전쟁을 해왔기 때문에 더 이상 전쟁을 하는 것은 어렵겠다는 판단을 하였습니다. 그는 화평을 청해온 리키니우스에게 트라키아, 소아시아, 시리아, 이집트의 영유권을 넘겨주었습니다. 그러나 판노니아, 달마티아, 다키아, 마케도니아, 그리스와 같은 속주 들은 모두 서방 제국에 포함시켰기 때문에, 콘스탄티누스의 영토는 칼레도니아의 국경지대부터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끝까지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통치지역(빨간색), 리키니우스 통치지역(초록색)

 이 강화조약에는 두 황제의 아들인 세 명의 젊은이들이 제위 계승권자로 명기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서방제국은 크리스푸스와 콘스탄티누스 2세가 부황제로 선포되었으며, 동방 제국에서는 리키니우스의 아들이 부황제로 선포되었습니다. 

크리푸스 (부황제_콘스탄티누스이 아들)

 서기 315~323년, 콘스탄티누스의 전반적인 평화와 법률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는 8년이 넘도록 평화를 유지했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이 시기에 법령을 제정했는데 개인의 권리와 재산 그리고 재판 절차에 관한 것으로써 공법보다는 사법 체계에 속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저자는 여러 법령 중에서 특히  2가지에 대해서 언급했습니다. 
 첫째, 당시 과도한 세금으로 인해 신생아를 유기 또는 살해하는 끔찍한 일이 빈번하게 발생했다고 합니다. 부모들은 자신들은 물론이고 자녀들이 커서 세금으로 고통받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그런 일을 했다고 합니다. 콘스탄티누스는 빈곤한 아이들을 행정관 앞에 데려오기만 해도 충분한 구제 기금을 지급하도록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현시대도 마찬가지지만 혜택을 받기 위해 끊임없이 타인에게 가난을 증명하는 일이 부정적으로 작용하였고, 또 그 기준이 모호하여 전반적인 구제 방법이 되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두 번째는 시대에 앞선 것으로 보이는 법령인데, 강간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강제로 난폭하게 폭행했을 때는 물론 25세 미만의 미혼 여성을 부모의 집에서 가출하도록 유괴하는 경우에도 죄를 범한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다만 그 처벌방법이 잔인하여서, 죄질이 악질적일 때는 화형에 처해지거나 원형경기장에서 맹수에게 갈가리 찢겨져 죽음을 맞았다고 합니다. 강간이나 유괴에 관한 신고는 제3자도 고발할 수 있게 했습니다.
 그러나 역사적 기록으로 유추해보면 법령만 강력했을 뿐 행정을 처리하는 사람들은 제대로 법령을 처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서기 322년, 고트 전쟁

 콘스탄티누스의 아들이자 부황제인 크리스푸스는 라인 강변의 지휘권을 받은 이후, 프랑크족과 알레만니족에게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어 자신의 명성을 알렸을 뿐만 아니라 이 변경 지역의 부족들이 그를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노련미가 필요한 도나우 전역을 맡았습니다. 고트족은 지난 50년동안 로마 제국의 위력을 인정하고 협조했습니다. 그러나 힘을 회복한 고트족과 맹방(동맹을 맺은 나라)을 자처하며 고트족의 깃발 아래 모여든 사르마티아족의 연합군들이 일리리쿰의 여러 지방들로 밀려들어왔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캄포나, 마르구스, 보노니아의 전투에서 완강한 저항에 부딪혔으나 결국 싸움에서 이겼고, 고트족은 약탈품과 포로들을 반환하고 퇴각을 허락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콘스탄티우스 황제는 분이 풀리지 않아서 도나우 강을 건너 다키아의 오지로 쳐들어갔습니다. 그는 고트족에게 보복을 가하였고, 필요할 때면 언제라도 4만 명의 병사들을 제공한다는 것을 조건으로 강화를 허락했습니다. 저자는 실제로 이들이 로마의 군대로 편입되었을지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서기 323년,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 사이의 제2차 내전

 콘스탄티누스는 이제 1인자가 되고 싶었습니다. 리키니우스는 늙은 데다 백성들의 인식도 좋지 않아 쉽게 이길 수 있을 거라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은 리키니우스도 아직까지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동방군의 전 병력을 집결시키자 하드리아노폴리스 평원과 헬레스폰토스 해협이 군인과 함대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리키니우스의 육군은 보병 15만 명과 기병 1만 5000명으로 편성되었습니다. 함대는 3단 노의 갤리선 350척으로 구성되었습니다. 
 

3단 노의 갤리선(by 위키피디아)

 
 콘스탄티누스의 군대는 테살로니카에 집결했습니다. 그들의 병력은 기병과 보병을 합해 12만 명이 넘었습니다. 그들은 리키니우스의 군대보다 적었지만, 전투에 있어서는 17번이나 경험한 고참병들이었습니다. 그들의 함선은 소형 선박 200척에 불과했습니다. 로마가 제국의 중심역할을 하지 못함으로써 미세눔과 라벤나의 해군 시설들도 서서히 방치되었던 것입니다. 제해권에서는 콘스탄티누스가 확연히 열세였습니다.
 

   서기 323년 7월,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

 리키니우스는 필요이상으로 신중하게 생각해서 요새화 된 하드리아노폴리스 근처 진영에서 적군이 오기만을 기다렸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테살로니카를 출발하여 하드리아노폴리스로 진격해 갔지만, 헤브루스 강(현 에르게네 강)의 빠른 물살에 가로막혔습니다.

하드리아노폴리스(현 에디른, 터키의 가장 서쪽에 위치한 도시)
콘스탄티누스의 경로[테살로니카(현 그리스 북부 중심도시)에서 하드리아노폴리스(현 터키의 에디른, 가장 서쪽에 위치한 도시)

 게다가 강가에서 하드리아노폴리스에 이르는 언덕의 오르막을 리키니우스의 군대가 가득 메우고 있었습니다. 서로 먼 곳에 진을 친 채 소소한 전투를 치르며 시간만 보내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던 콘스탄티누스는 불과 기병 12기 만을 거느리고 헤브루스 강의 급류에 뛰어들어 15만 대군을 도주하도록 만들었다고 합니다. 
 콘스탄티누스의 군대는 교량을 건설하고 있었는데 적군이 교량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을 때 5000명의 궁사들이 몰래 배후에 침입해서 공격했기 때문에 당황한 리키니우스의 군대는 노련한 콘스탄티누스의 고참병들에게 허무하게 당했다고 합니다. 무려 3만 4000명이 살육되었다고 합니다. 리키니우스는 비잔티움 성 안으로 도주하여 나오려 하지 않았습니다.
 

   비잔티움에 대한 포위 공격과 크리스푸스의 해전 승리 

 이제 콘스탄티누스는 즉시 비잔티움을 공격하기 시작했지만, 리키니우스가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는데다 은 견고했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좁은 해협에서 하릴없이 시간만 보내고 있었습니다. 빨리 전쟁을 끝내고 싶었던 콘스탄티누스는 해군 지휘관들에게 헬레스폰투스 해협의 통로를 강행돌파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콘스탄티누스의 아들 크리스푸스가 이 작전의 수행을 맡았고, 성공적으로 수행해 내었습니다. 첫째 날 전투에서는 양측 함대가 상당한 손실을 입고 각자의 진지로 돌아갔습니다. 둘째 날은 남풍이 불어 거센 물살이 잠잠해지자 크리스푸스의 함대가 적진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크리스푸스는 곧  전면적인 승리를 했습니다. 

헬레스폰투스 해협(다르다넬스 해협) 길이는 61km이지만 폭은 1~6m로 좁다.

헬레스폰투스 해협이 열리자 콘스탄티누스의 진영으로 군수물자가 들어왔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비잔티움의 성벽과 같은 높이의 성벽을 쌓았습니다. 콘스탄티누스의 공격이 계속되자 리키니우스는 칼케돈으로 피신했습니다. 리키니우스는 이번에는 나랏 일중 한가지를 맡고 있던 마르티니아누스에게 부황제의 칭호를 수여했습니다.
 

 크리소폴리스 전투 리키니우스의 항복과 죽음

서기 324년, 제국의 재통합

 리키니우스는 콘스탄티누스가 비잔티움 포위 공격에 집중하는 동안 비티니아에서 5~6만 명의 새로운 군대를 모았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소형 선박을 이용해 병사들을 보스포루스 해협 건너편으로 이동시켰습니다.

 두 군대는 크리소폴리스 고지에서 결전을 벌였습니다. 리키니우스는 필사적으로 저항하였지만 결국 2만 5천명의 휘하 병사들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는 시간을 벌기 위해 서둘러 니코메디아로 도주했습니다. 리키니우스의 아내는 콘스탄티누스의 이복동생 콘스탄티아였습니다. 그녀는 남편 리키니우스의 목숨을 위해 중재에 나섰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리키니우스의 여생을 보장하는 대신 부황제로 임명되었던 마르티니아누스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크리소폴리스(현  위스퀴다르, 터키 이스탄불의 한 지구)

 리키니우스는 자존심도 버린 채 콘스탄티누스의 발 아래 황제의 자주색 의복을 벗은 채 엎드렸습니다. 그는 그날 콘스탄티누스의 연회에 초대되었지만, 연회가 끝난 후 바로 테사로니카에 유폐되었습니다. 이후 리키니우스는 반역을 모의했다는 이유로 처형되었는데, 저자는 콘스탄티누스가 반역을 빌미로 리키니우스를 죽였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습니다. 
 이로써 디오클레티아누스가 4명의 공동황제 통치를 실시한 지 37년 만에 콘스탄티누스의 단독 통치가 시작되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복원도(https://i1.ruliweb.com/ori/22/01/14/17e57c321001235e3.jpeg)로마제국 제 44대 황제(제위기간 31) 306~337년

 저자는 자신이 이렇게 콘스탄티누스가 단독 황제가 된 과정을 상세히 기록한 것은, 그 과정에서 내란으로 인해 인명과 재산 피해가 계속되어 로마 제국의 쇠퇴를 촉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이 과정의 귀결은 콘스탄티노플의 건설과 그리스도교의 승인이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15장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1권 14장(2) 요약
콘스탄티누스는 이탈리아에 출정하여 막센티우스에게 승리했습니다. 막센티우스는 콘스탄티누스와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퇴각하던 중 밀비우스 다리에서 떨어져서 익사했습니다. 
막시미누스는 리키니우스와의 전투에서 패배한 후 3~4개월 후에 병으로 사망하였습니다. 리키니우스는 무차별적인 처형으로 배은망덕의 끝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제 로마 제국은 콘스탄티누스와 리키니우스의 대결로 압축되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여러 가지 불리한 환경을 극복하고 결국 최후의 1인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랜 내전으로 국력은 소진되었고, 인명과 재산피해가 상당했기 때문에 로마 제국의 미래는 불안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