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1.04 - [위대한 저서 읽기/로마제국 쇠망사(에드워드 기번, 윤수인_김희용 옮김)] - 로마 제국 쇠망사 1권_10장(1)(에드워드 기번, 윤수인_김희용 옮김)
수에비족의 기원과 명성
2. 엘베 강 넘어 위쪽 작센 지방에는 수에비족의 본거지인 성스러운 숲이 자리하고 있는데 18세기에는 이곳을 루사체 후작령이라고 불렀습니다. 수에비족은 자신들이 게르만족과 동일한 혈통에서 나왔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은 특이한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었는데, 긴 머리를 정수리에서 거친 매듭으로 모아 땋는 특이한 방식으로 다른 게르만족들과 구별되었습니다. 게르만족들이 수에비족의 전투력을 인정할 정도로 수에비족은 용감했다고 합니다. 수에비족과의 전투에서 패한 것은 치욕이 되지 않을 정도로 이들은 용맹함에 있어서는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알레만니라는 이름으로 불린 혼성 집단인 수에비족
카라칼라 황제 치세에, 수많은 수에비족이 인근 로마에 출몰했는데, 이때 여러 무리가 연합해서 하나의 거대한 종족을 이루었는데, 이들을 알레만니(Alemanni), 즉 모든 사람들(Allmen)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용맹했으며, 주로 말을 타고 싸웠습니다. 이들 기병대가 잘 훈련된 경보병대와 혼성 배치될 때는 더욱 막강해졌습니다. 이들 경보병대는 기병대와 보조를 맞춰 싸울 수 있게 잘 훈련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갈리아와 이탈리아를 침입함· 원로원과 평민들에 의해 로마에서 격퇴당함
호전적인 알레만니족도 로마의 방대한 군대 규모에는 경악하기는 했지만, 데키우스 황제 사망 이후 변경 지대에 출몰한 이들로 인해 전국적인 혼란이 가중되었습니다. 그들은 갈리아의 속주들을 침입했으며, 도나우 강을 건너고 알프스를 넘고 롬바르디아 평원까지 진출하였고 마침내 라벤나에까지 진격하여 로마의 목전에서 승전기를 펼쳐 보였습니다. 이때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동방에, 갈리에누스 황제는 라인 강 유역에 출전 중이었기 때문에 로마인들은 원로원을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원로원은 근위대를 재정비하여 근위대 병력을 확충했습니다. 갑자기 수적으로 우세한 로마 군대를 보자 알레만니족은 게르마니아로 후퇴했습니다. 로마인들은 후퇴하는 알레만니족을 보고 자신들이 승리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원로원 의원들의 군역을 면제한 갈리에누스
갈리에누스 황제는 원로원의 용기에 기뻐하기보다 오히려 불안해했습니다. 다시 공화국으로 회귀할 것을 두려워한 그는 원로원 의원들이 군사 활동과 심지어 병영에 접근하는 것 마저 금지시켰습니다. 그러나 원로원은 이러한 황제의 조치를 황제의 의도와는 반대로 특혜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은 군복무에서 벗어나 향락을 즐기는 것을 더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알레만니족과 동맹을 맺은 갈리에누스
밀라노 근처의 한 전투에서 알레만니족 30만 대군을 갈리에누스가 몸소 지휘한 1만 명의 로마군에 의해 격퇴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역사적 기록은 황제에게 잘 보이기 위해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합니다. 갈리에누스는 수에비족의 한 지파인 마르코만니족 왕의 딸인 피파와 결혼을 했는데, 이 부족은 종종 알레만니족과 혼동되기도 했습니다. 갈리에누스는 피파의 아버지에게 동맹의 대가로 광대한 판노니아를 주어 정착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로마 시민들은 피파를 야만인 출신이라는 이유로 싫어했으며, 심지어 첩이라는 말로 모욕했습니다.
고트족의 침입
3. 도나우 강 접경지역은 게르만족, 사르마티아족의 침입에 끊임없이 시달렸지만, 로마인들은 훨씬 성공적으로 이 지역을 잘 방어했습니다. 로마 군대는 일리리쿰 속주에서 병사들을 확충할 수 있었으며, 이들 중 몇몇은 장군이 되어 활약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들 야만족들은 마케도니아 국경 지대까지 침투하기도 했지만, 대개는 황제의 부관들이 잘 방어했습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에 정착한 고트족은 흑해 북부 연안의 지배자가 되었는데, 흑해 남쪽에는 이들이 탐낼만한 풍요로운 소아시아가 위치해 있었지만, 소아시아 속주민들에게 방어수단은 전혀 없었습니다.
고트족의 보스포루스 해협 정복· 해군력을 획득한 고트족
마이오티스 호를 흑해와 이어 주는 해협에 수도를 둔 보스포루스 왕국은 퇴보한 그리스인들과 반쯤 문명화된 야만인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 소왕국은 폰토스 왕국의 군주 미트리다테스가 스키타이족의 침략으로부터 그들을 지켜주겠다는 미트리다테스의 약속을 받아들이는 대가로 합병되었고, 이후 로마군의 압박으로 쇠퇴하게 되었습니다. 보스포루스 왕국은 로마의 동맹국으로써 힘은 미약하였지만, 사르마티아족들을 잘 방어하고 있었습니다. 이 왕국이 안정기 때에는 자신들의 책무를 잘 이행하고 있었으나, 내분으로 인해 왕국이 불안해지자 급기야 고트족을 불러들이게 되었습니다.
고트족은 보스포루스 왕국으로 인해 비옥한 토양은 물론 해군력까지 갖추게 되었습니다. 고트족들은 흑해에서 사용되던 철재는 전혀 쓰지 않고 목재로만 만든 배를 타고 강제로 동원된 선원들을 다그쳐서 미지의 바다로 겁 없이 나갔습니다. 고트족은 날씨와 바다의 상태를 살피는 선원들을 답답해하며 불만을 터뜨렸습니다. 바다에 대한 무지가 두려움 없는 용감함으로 나타났습니다.
고트족의 제1차 해군 원정
고트족의 선단은 키르카시아 해안을 좌측에서 통과하여 처음으로 피티우스 앞바다에 나타났습니다. 고트족의 예상과 달리 힘없는 수비대로부터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서 고트족은 격퇴되었습니다. 피티우스의 고급 장교 수케시아누스의 진두지휘로 고트족은 격퇴되었고, 이 소식을 들은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수케시아누스를 안티오키아로 소환한 뒤 높은 지위를 주어 안티오키아를 재건하는 중책을 맡겼습니다. 이후에는 근위대장까지 역임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피티우스를 떠나자 고트족은 다시 피티우스를 공략하였고 도시를 파괴했습니다.
트레비존드를 포위 공격해서 점령한 고트족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지원으로 인공 항구를 조성해서 부와 번영을 누렸던 트레비존드는 규모가 크고 인구도 많았습니다. 이 도시에는 병력 1만 명이 증원되어 수비가 강화되었으나 수비병들의 방탕과 사치로 인해 난공불락으로 보이는 요새의 안전은 보장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고트족은 그들의 나태를 알아채고, 과감하게 성벽을 넘어 도시를 파괴했습니다. 트레비존드에는 여러 이웃 지방의 재물이 맡겨져 있었기 때문에 고트족은 어마어마한 전리품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고트족은 폰토스 전역을 휩쓸고 다녔기 때문에 엄청난 수의 포로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고트족은 전리품을 배에 가득 실고 포로들을 시켜 노를 젓게 했습니다.
고트족의 제2차 원정· 비티니아의 도시들을 약탈한 고트족
고트족이 제2차 원정은 더욱 많은 인원과 선박이 동원되었고, 흑해 서부 연안을 따라 보리스테네스 강, 드니에스테르 강 및 도나우 강의 넓은 어귀 앞을 지나갔습니다. 고트족은 여러 척의 어선들을 빼앗아 함대 규모를 늘려가면서 흑해의 물이 지중해로 나가는 좁은 해협으로 다가갔습니다.
칼케돈의 수비대는 유피테르 우리우스 신전 부근의 이 해협 입구를 내려다볼 수 있는 곶에 주둔하고 있었고, 수적으로 우세한데도 불구하고 무기와 재물이 가득 비축되어 있던 칼케돈을 고트족의 손아귀에 내주고 말았습니다. 고트족이 다음 목표지를 구상하고 있을 때, 도망병 중 한 명이 니코메디아가 손쉬운 정복지라는 정보를 주었고, 고트족은 니코메디아를 무력으로 손쉽게 정복했습니다. 비티니아 속주 전역은 고트족의 침입에 너무도 쉽게 무너졌습니다. 그들은 군사력 확충에는 관심이 없었고, 목욕탕, 신전, 극장의 건설에 세입의 대부분을 쓰고 있었습니다.
고트족의 후퇴
한때 미트리다테스 왕의 맹공을 견뎠을 만큼 단단한 키지쿠스도 예전의 힘은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프루사를 약탈한 고트족은 이 도시를 파괴하기 위해 18마일 떨어진 곳까지 진격해 왔지만, 운 좋게 우기에 접어들어 불어난 강물이 고트족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고트족은 비티니아에서 빼앗은 약탈물들을 가득 싣고 함대가 정박해 있는 헤라클레아로 후퇴하였습니다.
고트족의 제3차 원정 · 보스포루스 해협과 헬레스폰투스 해협을 통과한 고트족
고트족의 함대가 500척이었다는 가설을 받아들여서 한 척에 25~30명 정도까지 태울 수 있다고 했을 때, 기껏해야 15000명 정도였을 것이라고 합니다. 고트족은 이제 흑해 해역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고 항로를 킴메리아 보스포루스에서 트라키아 보스포루스로 돌렸습니다.
그들은 키지쿠스라는 작은 섬에 상륙하자마자 도시를 폐허로 만들었습니다. 고트족은 에게 해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섬들 사이를 누비고 다녔습니다. 마침내 고트족의 함대가 아테네에서 5마일 떨어진 페이라이에우스 항에 닻을 내렸고, 아테네는 옛 성벽들을 보수하는 등 미리 방어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고트족은 아테네, 스파르타, 코린토스, 아르고스 등 그리스 남부 지역의 도시들을 약탈하였습니다. 그러나 민병대를 조직한 덱시푸스(역사가)에 의해 고트족은 북쪽으로 밀려납니다.
그리스를 약탈하고 이탈리아를 위협한 고트족 · 고트족의 분열과 후퇴
덱시푸스에 의해 북쪽으로 밀려나서 분노한 고트족은 그리스 전역에 불길이 치솟게 하였습니다. 고트족은 이미 이탈리아가 눈에 보이는 곳까지 진격했고, 환락에 빠져있던 황제 갈리에누스도 무장을 하고 출전했습니다. 황제의 등장에 고트족의 전력이 분열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고트족과 함께 싸웠던 헤룰리족의 족장인 나울로바투스가 명예로운 조건부 항복을 하여 로마군에 참여하였으며, 집정관의 직위까지 부여받았습니다.
고생스러운 항해에 염증이 난 고트족은 바다가 아닌 모에시아 지방을 통해 자신들의 정착지인 우크라이나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이들의 무모한 계획은 로마 장군들의 불화로 인해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나머지는 배를 타고 헬레스폰투스와 보스포루스 해협을 거쳐 돌아갔습니다.
고트족의 병력은 줄어든 수만큼 게르만족이나 사르마티아족 출신의 도망노예 무리에 의해서 끊임없이 보충되었습니다. 이렇게 혼성된 집단에 종종 스키타이인이라는 통칭이 붙게 되었습니다.
에페수스 신전의 파괴
일곱 번의 재난으로도 매번 복구되었던 에페수스 신전은 고트족의 제3차 침입으로 전소되고 말았습니다. 그리스의 예술과 아시아의 부가 상호작용하여 만들어진 이 신전은 127개의 이오니아식 대리석 원주가 있었는데, 이 기둥들의 높이는 60피트에 달했고 독실한 군주들의 헌납으로 세워졌습니다. 에페수스의 다이아나 신전은 세계적인 불가사의로 경탄의 대상이 되었으나, 원시적인 고트족들에게는 관념적인 공포를 주는 대상에 불과했습니다.
아테네에서 고트족의 행동
고트족이 아테네를 약탈하면서 도서관의 모든 책들을 불태우려고 했는데, 그들 중 한 족장이 나타나 그리스인들이 학문에 빠져 있는 한 결코 군사 훈련에 전념하지 않을 것이라는 논리로 이 계획을 단념시켰다고 합니다. 저자는 학문의 시대는 대개 군사력과 승리의 시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페르시아의 아르메니아 정복
4. 아르사케스 왕가의 여러 군주들 중 호스로우만이 목숨을 부지하면서 페르시아로부터 독립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30년 동안 전쟁에서 굴복하지 않았던 그가 페르시아 왕 샤푸르가 보낸 밀정에 의해 암살되고 말았습니다. 아르메니아의 애국적인 태수들은 후계자인 호스로우 왕의 아들 티리다테스의 편에 서서 로마의 보호를 간청했지만 그의 아들은 아직 어렸고, 로마의 도움을 받을 여건이 안되었기 때문에 아르메니아는 27년간이나 페르시아의 속령으로 남아 있게 되었습니다. 로마가 쇠퇴하고 있었기 때문에 페르시아는 이 기회를 틈타서 유프라테스 양안 지대를 유린하며 공포를 퍼뜨렸습니다.
동방으로 행군하는 발레리아누스 · 서기 260년, 포로가 된 발레리아누스
샤푸르 왕의 야망이 달성도어 갈수록 로마의 위기감과 모욕감은 높아졌습니다.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라인 강과 도나우 강의 안전은 충분하다는 판단하에 유프라테스 강의 방어를 위해 나섭니다. 그는 에데사 성벽 부근에서 페르시아의 왕과 충돌하다 샤푸르 왕에게 포로로 잡혔습니다. 발레리아누스는 무능한 근위대장 마크리아누스를 맹목적으로 신임했기 때문에 로마는 위험한 처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로마군은 발레리아누스 황제에게 항복할 것을 요구하였고, 로마군은 퇴각을 위해 막대한 양의 금을 내겠다는 치욕스러운 제안을 했으나 페르시아 왕은 거절하였습니다. 결국 로마 황제는 포로가 되었고 군대는 항복했습니다. 로마의 제위는 샤푸르가 지정한 키리아데스가 차지했는데, 그는 안티오크 출신의 미천한 망명자였습니다.
시리아, 킬리키아 그리고 카파도키아를 침략한 샤푸르
노예의 처지가 된 로마 황제는 조국을 배신하는 행위를 자행했으며, 페르시아 왕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로마 황제의 인도로 샤푸르는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칼키스를 거쳐 동방의 중심 도시로 향했습니다. 아티오크는 갑작스러운 침입에 화를 당했습니다. 페르시아 군대는 거침없었는데, 에메사 신전의 제사장이 투석기를 이용해 농민들과 함 물리친 것을 제외하고는 페르시아를 가로막는 일은 없었습니다.
페르시아가 카파도키아의 수도인 카이사레아를 포위했을 때, 방어를 지휘했던 데모스테네스는 오랫동안 카이사레아의 방어를 했지만, 마침내 도시가 함락되자 적 뚫고 탈출했습니다. 그러나 시민들은 샤푸르의 대량 학살에 희생되었고, 로마에 근거지를 마련할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던 샤푸르는 자신들이 지나간 자리를 황폐화하는 데 열중했습니다.
샤푸르와 싸운 오다이나투스의 배짱과 승리
팔미라에서 가장 부유한 원로원인 오다이나투스가 한 통의 편지와 함께 낙타 행렬에 진귀하고 값진 물건들을 실어서 샤푸르 왕에게 보냈습니다. 샤푸르 왕은 편지를 읽고 오다이나투스가 보낸 선물들을 유프라테스 강에 던져 버리라고 명령하였고 그의 양손을 묶어 자신 앞에 무릎 꿇어 엎드리게 하지 않는다면 온 나라를 파멸시킬 것이라고 소리쳤습니다. 사라센인(아랍인)의 왕이라고 불렸던 오다이투스는 용기를 내어 페르시아 군 주변에 출몰하면서 그들의 퇴로를 끈질기게 공격하여 보물을 일부분 빼앗았습니다. 이에 당황한 샤푸르는 서둘러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로마의 위엄이 한 아랍인에 의해 지켜졌던 것입니다.
발레리아누스의 처리
역사적 기록은 기록되는 순간 객관성이 결여되기는 하지만, 역사적 기록에 페르시아 왕 샤푸르가 말에 올라탈 때면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의 목을 발판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수치심으로 사망한 발레리아누스를, 샤푸르 왕은 피부 속에 짚을 채워 넣어 페르시아의 가장 유명한 신전에 오랫동안 보존하도록 했다는데 진실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발레리아누스가 로마 황제 중에 유일하게 적의 수중에 떨어진 왕인 것은 확실하지만, 샤푸르가 발레리아누스에게 한 행동은 합리적으로 추측할 때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의견이 있습니다.
갈리에누스의 성격과 통치
갈리에누스는 공동황제였던 아버지 발레리아누스의 소식을 듣고 "나는 내 아버지도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임을 알고 있었다. 그분이 용감한 사람답게 행동하셨으니 만족할 따름이다."라고 냉정한 태도로 공언했습니다. 갈리에누스는 공동황제에서 단독황제가 된 것을 속으로 기뻐하였습니다. 그는 천재성이 있기는 했으나, 정작 필요한 전쟁과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거듭되는 침입과 패배, 반란에 관한 소식마저 무심하게 웃는 얼굴로 보고받았다고 합니다. 그는 분노하다가도 유혈상태에 염증을 느끼게 되면 온순하고 나태한 성격으로 되돌아갔다고 합니다.
30인 참주(제왕의 이름을 참칭하는 자)들 · 실제로는 열아홉 명이었다.
갈리에누스의 통치 기간에는 오직 19명의 제위 참칭자들이 나왔습니다. 황제의 칭호를 취했던 장군들은 황제로 추대될 만큼 존경받는 인물들이 많았습니다. 19명의 참주들 가운데 원로원 의원은 테트리쿠스 한 사람뿐이었고 귀족도 피소 한 사람뿐이었습니다. 피소는 누마 왕 28대 손이었으며, 카이사르의 폭정에서 살아남은 칼푸르니우스 가 태생이었습니다. 피소는 갈리에누스에 맞서 싸우다 죽었지만, 황제의 허락을 받아 추모하는 기념물을 제작하기로 할 만큼 존경을 받았던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참주들이 반란을 일으킨 요인들
페르시아에 포로로 끌려갔다가 사망한 발레리아누스와 아들 갈리에누스는 공동황제였는데, 아버지 발레리아누스에 대해서는 신하들이 존경하는 마음이 있었지만, 그의 아들 갈리에누스에 대해서는 두려움으로 인한 반역을 꿈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반역을 생각하는 자들도 변덕스러운 군대의 폭력성을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군대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 황제가 여럿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황제가 될 만한 사람이라고 선포되는 순간 죽음의 순간을 생각해야 했습니다. 반역은 이런 두려움에서 현실화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사투르니누스는 황제로 등극하던 날 "너희들은 잃었노라, 유능한 지휘관을 잃었노라, 그리고 매우 비참한 황제를 만들었노라,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참주들의 변사
사투르니누스의 예언은 적중해서 19명의 참주들 가운데 안정된 삶을 누리거나 자연사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습니다. 황제의 자의를 입는 순간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안에 떨어야 했습니다. 한편 이탈리아 본토와 로마시 그리고 원로원은 일관되게 갈리에누스의 대의명분을 지지했으며 로마 제국의 황제로 생각했습니다. 갈리에누스가 페르시아 왕을 몰아낸 오다이투스의 공훈을 인정한 것은 오다이투스가 갈리에누스에게 언제나 정중한 태도를 견지했기 때문입니다. 오다이투스는 원로원의 승인으로 아우구스투스의 칭호를 얻게 되었고 동방의 총독이 됩니다. 이후에 그는 조카에 의해 암살되었고, 그의 부인 제노비아가 쿠데타를 제압하고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내세우고 섭정을 하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오다이투스와 전처 사이에서 낳은 아들 하이란 1세도 죽었다고 합니다. 그런 이유로 제노비아가 자신의 아들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암살자 마에오니우스를 부추겼다는 추측도 있습니다.
참주들에 의한 권력 찬탈의 치명적인 결과들
잦은 반란과 황제들의 옹립은 결국 신하와 지지자들 모두를 파국으로 몰았습니다. 군대에 대한 보상은 국민이 낸 세금에서 쥐어 짜낸 기부금으로 충당되었기 때문입니다. 또 황제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비용이 필요했기 때문에 약탈과 잔혹행위를 자행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깨달았습니다. 반역 사건에 연루된 사람은 자신의 휘하 부대와 속주들까지도 피해를 겪었습니다. 일리리쿰에서 황제를 사칭했던 인게누우스를 진압한 후 갈리에누스가 대신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보낸 매우 난폭하고 잔인한 내용의 명령서를 보면 그 참상을 알 수 있습니다.
무기를 들고 나섰던 자들을 모조리 없애 버리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네. 전투를 통해서만이라도 그 정도 효과는 거둘 수 있었을 것이네. 모든 연령대의 남성은 절멸시켜야만 하며, 다만 어린아이와 노인을 처형할 때는 짐의 평판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도록 하게. 중략
인게누우스가 황제인 양 행동했던 자임을 잊지 말고 그를 찢어 죽여 잘게 조각내도록 하게. 짐이 그대에게 짐의 손으로 친히 글을 써 보내는 것은 그대에게 짐의 감정을 느끼도록 하기 위함이네.
로마가 이렇게 내부적으로 분열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침략자들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심지어 야만족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로마의 심장부로 그들을 끌어들이는 어리석은 선택까지 하게 됩니다.
시칠리아의 소요
1. 이제는 최하층조차도 통치권이 극도로 약화되었다는 것을 알 정도가 되었습니다. 시칠리아 섬을 지리적인 여건 상 무방비 속주였습니다. 이곳에서 한동안 노예와 농민들로 구성된 방자한 무리가 약탈을 일삼으며 이 지방을 통치했는데, 이 지역에는 부유한 원로원들의 비옥한 사유지가 많았기 때문에 그 피해는 막심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폭동
2. 알렉산드리아는 필리푸스의 아들이 구상을 하여 뛰어난 완성을 이루어내었습니다. 당시에는 대략 30만 명의 자유시민과 비슷한 수의 노예가 살았다고 합니다. 이곳 사람들은 남녀노소 누구나 부지런했습니다. 그러나 기질에 있어서는 허영심이 많고 변덕스러운 그리스인의 기질과 고집이 세며 미신을 잘 믿는 이집트인들의 기질을 함께 지니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 기질로 인해 사소한 일로 화를 내기도 하고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페르시아의 포로가 되고 그의 아들 갈리에누스가 게으름을 피우게 되자, 시민들은 분노했고 12년 이상 내란이 발생했습니다. 이 폭동으로 인해 알렉산드리아는 옛 모습을 잃고 피폐해진 모습만 남았습니다. 아름다웠던 브루키온 지구는 황량한 상태가 되었는데 저자가 살던 18세기에도 여전히 그 상태였다고 합니다.
이사우리아인들의 반란
이사우리아에서 황제를 사칭했던 트레벨리아누스가 일으킨 반란은 작은 속주의 보잘것없는 반란이었지만, 주목할 만한 점은 이들은 반란이 실패하자 본연의 야만적인 생활양식으로 되돌아가서 타우루스 산맥의 한 지맥에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곳에서 경작하며 생필품은 조달했고, 사치품은 약탈을 통해 충당했습니다. 고립으로 인한 무기력에 빠져있던 그들은 킬리키아의 서부 지방 및 산악 지대를 장악했습니다. 이 지역은 유명한 해적 집단의 본거지였는데, 이들을 소탕하기 위해 대(大) 폼페이우스의 지휘 아래 거의 전체 병력을 투입하였던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기아와 페스트
당시에는 자연재해나 질병 등 여러 가지 암울했던 상황이 펼쳐졌는데, 무엇보다도 힘이 들었던 것은 오랜 기간 계속된 대(大) 기근으로 인한 배고픔이었습니다. 기근이 들면 음식이 부족해지고 불결해지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전염병이 뒤따랐습니다. 250년에서 265년 사이에 로마 제국의 거의 모든 속주를 휩쓸었던 맹렬한 전염병으로 매일 5000명이 죽었으며, 주민이 완전히 절멸된 곳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영향으로 인구가 감소했는데 기록으로 알 수 있는 것은 알렉산드리아의 배급 명부입니다. 이 명부를 바탕으로 유추해 볼 때 과거 40~70세의 인구와 갈리에누스 치세 이후까지 살아남은 14~80세의 인구가 비슷했다고 하니 인구가 얼마나 많이 줄었는지 유추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근거에 의하면 알렉산드리아 인구의 절반이상이 사망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추세가 다른 곳에도 적용되었다면 인류의 절반이 사망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로마 제국 쇠망사 1권 10장(2) 요약
로마는 계속되는 야만족의 침입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게르만족, 수에비족, 고트족, 알레만니 족등 다양한 야만족의 침략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또한 페르시아가 로마를 공격해왔는데 화친하려는 로마의 제의를 거절하고 페르시아 왕 샤푸르가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를 포로로 잡는 일까지 생겼습니다.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샤푸르 왕의 비인간적인 대접으로 인해 절망하여 사망하였고, 아들 갈리에누스는 단독황제가 되었습니다. 갈레리아누스는 천재성이 있었으나 판단력이 결여되어서 시급한 전쟁과 정치는 외면하였습니다. 그는 방탕한 쾌락에도 빠졌있거나 국가가 위급한 상황에도 부적절하게 태연하게 행동하는 등 황제답지 못한 면모를 보였습니다. 야만족의 침입으로 어수선한 로마는 황제를 참칭하는 참주들도 여러 명이 나타나 내분을 겪고 있었습니다. 내분으로 인해 야만족의 침입을 막지 못하였고, 설상가상 대기근과 전염병이 돌아 인구의 거의 절반이 사망하는 등 그 어느 때보다 위기를 맞고 있는 로마를 볼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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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 쇠망사 1권_10장(1)(에드워드 기번, 윤수인_김희용 옮김) (4) | 2024.01.04 |
로마 제국 쇠망사 1권_9장(에드워드 기번, 윤수인 ㅣ 김희용 옮김) (3) | 2023.12.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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