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쇠망사 1권 13장(1)(에드위드 기번, 윤수인_김희용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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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저서 읽기/로마제국 쇠망사(에드워드 기번, 윤수인_김희용 옮김)

로마 제국 쇠망사 1권 13장(1)(에드위드 기번, 윤수인_김희용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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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와 세 명의 동료 황제 막시미아누스, 갈레리우스, 콘스탄티우스의 통치· 질서와 평온의 전면적인 회복· 새로운 통치 방식·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와 막시미아누스 황제의 퇴위

 

  서기 285년,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등극과 품성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부모는 로마의 원로원 의원인 아눌리누스의 집에서 일했으며, 그 또한 달마티아 속주의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그의 아버지는 가족의 자유 시민권을 획득하고 서기직을 했다고 합니다. 
 야심만만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모에시아 속주의 총독, 집정관, 궁정수비대의 주요 지휘관직으로 승진을 거듭했습니다. 그가 두각을 나타냈던 것은 페르시아 전쟁 때였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자신의 책무를 수행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으나, 황제가 지녀야 하는 탁월한 능력은 부족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자신을 억제할 줄 알았으며, 군인으로서보다는 정치가로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그는 정책을 통해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때는 무력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관용과 승리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독특한 유화정책을 펼쳤는데, 내전이 처리되는 과정에서 전임 황제 밑에서 일했던 재상 아리스토불루스를 그대로 신임하며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또한 자신에게 반기를 들었던 사람들의 생명, 재산은 물론 지위까지도 존중해 주었고 전임 황제 카리누스의 수많은 신하들까지도 각자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이 중에는 전임 황제를 배신하여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도움을 준 사람도 있었고, 전임 황제에게 순수하게 충성했던 사람도 있었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입장에서는 각 부처에 배치한 우수한 인재들을 제거하는 것이 공공의 이익에 해가 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는 국민들에게 자비로웠던 마르쿠스 안토니누스 황제의 정신을 본받고 싶다고 선언하며 이미지 메이킹에 성공했습니다.
 

  서기 286년 4월, 막시미아누스와의 제휴

로마 제국 제 43대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좌)와 막시미아누스 (부황제에서 황제가 됨)(우)

 그는 막시미아누스를 공동 통치자로 선정했으며, 나중에 아우구스투스의 칭호까지 부여했습니다. 그러나 마르쿠스는 아들인 콤모두스에게 황제의 자리를 줌으로써 잔인한 황제로인해 국민들이 고통받았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동방과 서방의 방어를 위해 동료 군인인 막시미아누스를 선택하는 합리적인 판단을 하였습니다. 
 막시미아누스는 글을 배우지는 못했지만 전투에 있어서는 두각을 나타내었습니다. 그는 용기와 지조가 있었으며,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수행할 끈기가 있었습니다. 또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정략적으로 숙청이 필요하면 언제나 막시미아누스가 전면에 나섰고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나중에 나타나서 몇 명을 구해주고는 막시미아누스의 잔인한 처벌을 나무라며 이미지 메이킹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자신과 막시미아누스를 비교하는 것을 즐겼다고 합니다. 둘은 서로의 장점을 존중했으며, 사람들에게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유피테르의 이미지, 막시미아누스는 헤라클레스의 이미지로 인식되었다고 합니다. 
 

  서기 292년 3월, 두 명의 부황제 갈레리우스와 콘스탄티우스와의 제휴 네 명의 황제의 통치 지역과 조화

로마 제국 제 43대 황제 갈레리우스(좌)와 콘스탄티우스(우)(두 사람 모두 부황제에서 황제가 됨) by 나무위키

 그러나 이미 로마는 힘이 쇠약해졌기 때문에 국가를 운영하기에는 두 황제의 힘으로도 역부족이었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사방에서 몰려드는 여러 민족의 맹공을 막아내기 위해 거대한 권력을 분산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그는 능력이 입증된 두 사람에서 아우구스투스보다 한 단계 낮은 칭호인 카이사르라는 칭호를 주어 부황제로 임명하였습니다. 그 둘은 갈레리우스와 콘스탄티우스입니다. 갈레리아누스는 어린 막시미아누스라고 불렸다고 하는데 목동 출신인 데다 용장의 기질이 있어서 그렇게 불렸다고 합니다. 반면 콘스탄티우스는 4명의 황제 중에서 가장 황제의 기질을 타고난 것으로 인정받고 있었습니다. 그는 다르다니아에서 유력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고, 그의 어머니는 클리우디우스 황제의 조카딸이었습니다. 
 두 황제는 두 부황제의 아버지 역할을 맡았는데,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갈레리우스를, 막스미아누스는 콘스탄티우스를 양아들로 받아들였습니다. 양아버지들은  그들을 이혼시킨 후, 자신의 딸들과 결혼시켰습니다. 이렇게 해서 네 명의 군주가 로마 제국을 분할 통치하게 되었습니다. 

4두 정치의 네 황제(베네치아의 산 마르코성당)(by 나무위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주도 아래 3명의 황제가 협조하는 형식으로 이끌어 갔기 때문에 조화롭게 통치될 수 있었습니다. 만약에 4명의 힘의 크기가 비슷했다면 또다시 내전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갔을지도 모릅니다. 4명의 공동 황제라기 보다 1+3황제의 공동 통치라고 보는 것이 더 맞을 것 같습니다.
 

일련의 사건들

 네 명의 황제가 공동 통치를 한 것은 두 명의 황제가 6년을 통치 한 후 이루어졌습니다. 저자는 책에서 연대기적 순서보다 논리적 순서에 의해 그 당시의 여러 조치들을 기술하려고 했습니다. 
 

서기 287년, 갈리아 농민들의 상태

막시미아누스가 갈리아 농민이 일으킨 대반란을 진압했습니다. 이것은 14세기에 영국과 프랑스에서 일어난 농민 반란과 유사한 형태를 보였습니다. 그 당시 대다수의 갈리아인들은 족장의 절대적인 권리 아래 끊임없는 노동에 시달렸고, 족쇄와 다름없는 법률의 속박에 의해 토지에 얽매이게 되었습니다. 갈리에누스 황제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통치 기간을 걸쳐 반란이 계속되었는데, 농민들은 주인, 야만족, 군대, 조세 징수원 등에 의해 4중의 고통에 시달려야만 했습니다. 이들은 가만히 앉아서 죽으나 반란을 일으키다 죽으나 같은 결과라는 극단적인 생각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갈리아 농민들의 반란 · 갈리아 농민들에 대한 응징

계속되는 착취에 억누를 수 없이 격분한 농민들은 농기구를 들고 봉기했습니다. 농부는 보병이 되었으며, 목동은 기병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야만족 못지 않게 피해를 입혔습니다. 그러나 로마군이 나타나자 그들은 쉽게 제압당했고, 고된 생활은 더욱 공고하게 되었습니다. 반란의 주모자인 아일리아누스와 아만두가 그리스도교라는 설이 있지만 신빙성은 떨어진다고 합니다.
 

  서기 287년, 브리타니아에서 카라우시우스의 반란

 막시미아누스는 갈리아에서의 반란은 제압했지만, 카라우시우스의 찬탈 행위로 브리타니아를 잃었습니다. 카라우시우스는 중대한 비리를 저질렀다는 이유로 막시미아누스에게 사형선고를 받은 상태에서 브리타니아를 일시에 정복해 스스로 브리타니아 제국의 황제가 되었습니다.
 프로부스 황제 치하에서 프랑크족이 범선을 이용하여 여러 속주들을 약탈하는 것을 막기위해 해군을 창설할 필요를 느꼈고, 영국 해협에 인접한 겟소리아쿰, 즉 불로뉴 항을 로마 함대 근거지로 정하고, 카라우시우스에게 통솔권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게르만족 해적단의 약탈품을 뺏아서 부유해졌고, 그 일로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그러자 그는 휘하 병사와 야만족들을 돈으로 매수한 후, 블로뉴 항에서 브리타니아로 건너가서 브리타니아를 지키고 있던 군대를 설득하여 스스로 황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브리타니아의 중요성· 카라우시우스의 힘

브리타니아 제국 초대 황제 카라우시우스(286~293)

 로마인들은 브리타니아의 상실을 진심으로 슬퍼했습니다. 브리타니아의 자연 환경에서 얻을 수 있는 세금 수입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카라우시우스는 이곳을 7년 동안 점유했습니다. 그는 프랑크족의 영토 주변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프랑크족의 비위를 맞추면서 우호관계를 맺고자 했습니다. 젊은 프랑크족들을 육군이나 해군에 배속시켰고, 군사 기술도 전수해 주었습니다. 그는 센 강과 라인 강은 물론 대서양 연안까지 약탈하고 다녔기 때문에 헤라클레스의 기둥 너머로 까지 그의 이름이 알려질 정도였다고 합니다. 

 

  서기 289년, 황제들에게 인정받은 카라우시우스 · 서기 292년

 카라우시우스가 불로뉴 함대를 장악했기 때문에 로마 제국으로서는 그에게 복수할 동력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새로운 함대를 창설했지만, 해전에서 잘 훈련된 불로뉴 함대를 이길 확률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로마는 어쩔 수 없이 그를 인정하고 평화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 그러나 젊은 두 황제가 영입되자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콘스탄티우스 황제가 브리타니아와의 전쟁을 지휘하게 되었는데, 그는 항구로 들어가는 길목을 거대한 방파제로 쌓아 올려 고립시킴으로써 기선을 제압했습니다. 결국 완강하게 저항하던 브리타니아군은 항복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콘스탄티우스는 브리타니아를 공격하기 위해 3년 동안 함대를 준비하였고, 한편으로는 갈리아 연안 지역을 확보하고 프랑크족의 영토까지 침공하여 카라우시우스가 동맹군들의 지원을 받지 못하도록 치밀하게 준비했던 것입니다. 그는 뛰어난 준비와 전략으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것입니다.
 

  서기 294년, 카라우시우스의 죽음 서기 296년, 콘스탄티우스의 브리타니아 재탈환

 준비가 다 끝나기도 전에 콘스탄티우스는 카라우시우스가 죽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참모 알렉투스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알렉투스는 황제가 되고 싶었으나 용맹함이나 권력을 행사할 능력이 없었던 인물이었습니다. 
 로마군은 짙은 안개를 틈타 와이트 섬 부근에 정박 중이던 알렉투스 함대를 피해 서부 해안 지대에 상륙했습니다. 전투를 지휘하던 아스클레피오도투스는 상륙하자마자 모든 선박에 불을 질렀습니다. 알렉투스는 콘스탄티우스의  공격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새로운 적의 급습으로 서쪽으로 이동했고, 결국 소규모 부대로 로마군의 전 병력과 전투를 치르게 되었습니다. 이 전투는 알렉투스의 패배와 죽음으로 바로 종결되었습니다. 
 콘스탄티우스가 켄트 해안 지대에 상륙했을 때, 이미 그 일대에 투항한 사람들이 콘스탄티우스 황제를 환호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브리타니아가 다시 로마 제국에 편입된 것을 기뻐했다고 합니다. 

켄트(by quora)

  변경 지역 방어· 야만족들의 불화

 브리타니아는 바다로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내부의 적이 가장 두려운 존재였습니다. 스코들랜드나 아일랜드의 문명화되지 않은 부족들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더 급한 것은 제국의 경계선을 여러 부족으로부터 방어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집트로부터 페르시아 영토에 이르기까지 일렬로 방어진을 구축하고 각 진지마다 상비군을 충분하게 배치했습니다. 또한 안티오크, 에사, 다마스쿠스에 병기고를 새로 만들고 온갖 종류의 무기를 공급받았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이 밖에도 방어선에서 취약한 곳이 있으면 재건하거나, 새로운 성채를 만들어 빈틈없이 방어했기 때문에 고트족, 반달족, 게피다이족, 부르군트족, 알레만니족은 로마 제국을 침입하는 것이 어려워졌고, 그에 대한 분노로 서로 싸우면서 힘을 소진시켰습니다. 부족 간의 내분을 이용하려던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계획이 성공한 것입니다.
 

  황제들의 처신 부황제들의 용기

그러나 매순간 철저하게 방어를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고, 다른 부족들의 내분이 계속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가끔 속주들이 침입받을 때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직접 나서는 것에는 신중했습니다. 자신이 위험에 노출되지 않더라도 현명한 수단을 이용하여 성과를 올렸습니다. 또한 힘든 전쟁이 예상되면 막시미아누스가 나서게 했습니다. 그러나 부황제 영입 후에는 그들에게 도나우 강과 라인 강의 방어를 맡겼습니다. 
 부황제들은 전투에 있어서 뛰어난 자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콘스탄티우스 부황제가 위험에 빠졌던 적이 있었는데 소수의 근위병만을 거느리고 이동 중 갑자기 많은 수의 적군에 둘러싸인 것입니다. 콘스탄티우스는 간신히 랑그르로 퇴각했지만, 시민들은 적군의 수에 두려워 성문을 열어주지 않았고 부상당한 콘스탄티우스는 밧줄에 묶여 성벽으로 끌어올려졌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로마군이 그를 구조하기 위해 몰려들었고, 콘스탄티우스는 알레만니족을 무찔렀습니다. 
 

  야만족들에 대한 처리

 프로부스 황제가 포로들을 죽이지 않고 로마군에 편입시켰던 것처럼, 디오클레티아누스도 그 선례를 따랐습니다. 그는 전쟁으로 인해 인구가 감소한 여러 지방으로 포로들을 보냈습니다. 그들은 양치기나 농부는 될 수는 있었지만, 무기의 사용은 금지되었습니다. 로마의 보호를 간청하는 부족들에게는 토지를 보유할 수 있도록 해주었습니다. 속주민들은 이전에는 적대적이었던 여러 부족들이 자신들에게 노동력을 제공한다는 데 대해 우월감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평화로운 시기에는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이들이 언제 로마의 심장부에 칼끝을 겨눌지 모르는 위험을 안고 있음을 속주민들은 알지 못했습니다. 
 

  아프리카와 이집트 전쟁 · 서기 296년, 이집트에서의 디오클레티아누스

 나일 강에서 아틀라스 산까지 아프리카 전체가 무장 봉기한 사건이 일어나자 두 황제가 직접 나섰습니다. 무어족 계열의 다섯 개 나라가 연합체를 형성한 후 로마 속주들을 침공하기 위해 사막으로부터 진격했다는 것입니다. 

북아프리카에서의 아틀라스산맥(주황색)

 
 막시미아누스는 접근 하기 어려운 지형을 가지고 있는 마우리타니아의 적군을 일시에 제압했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알렉산드리아의 포위를 시작으로 이집트에서 전쟁을 개시했습니다. 그는 나일 강으로부터 나오는 수도를 끊었습니다. 8개월의 포위 공격 끝에 황폐해진 알렉산드리아가 항복을 했으나 가장 가혹한 징벌을 받았습니다. 수천 명의  시민들이 무차별적으로 학살되었으며 유서 깊은 도시 부시리스와 인도 교역으로 부유했던 도시 코프토스가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때때로 알렉산드리아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로마의 존립이 위태로웠던 적이 있었기 때문에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다시는 도발할 수 없게 하려는 의도에서 그토록 가혹한 처벌을 내렸던 것으로 보입니다. 
 

연금술에 관한 책들을 금지한 디오클레티아누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이집트에서 연금술에 관련된 책을 모두 불태웠습니다. 백성들이 이성과 재산을 쓸데없는 곳에 낭비하지 않도록 보호하기 위해서 그런 조치를 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이후 아랍인이 이집트를 정복하면서 이 허무맹랑한 이론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고 합니다. 그러나 연금술은 근거없는 이론으로 인식되었고, 마침내 사라졌습니다. 누구도 금을 만들어낸 사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집트 진압이 끝나자 페르시아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아르메니아인 티리다테스· 서기 282년

티리다테스 3세

 발레리아누스의 치세하에서 아르메니아는 페르시아에 의해 정복되었습니다. 당시 아르메니아 왕이었던 호스로우 왕이 암살되었고, 어린 티리다테스는 구출되어 로마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티리다테스는 용맹스럽고 영웅적인 면모를 보였습니다. 
 그는 프로부스를 황제를 암살하기 위해 난동을 부린 군으로부터 리키니우스를 구하기 위해 온몸으로 막아냈습니다. 리키니우스는 갈레리우스의 동료이자 친구였습니다. 티리다테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 치세 3년째에 아르메니아 왕국의 왕이 되었습니다. 이제 그는 제자리로 돌아간 것입니다.
 

서기 286년, 티리다테스가 아르메니아 왕국에 복귀함 ·

민중과 귀족들의 반란· 맘고 이야기

 

 26년동안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아르메니아는 옛 왕의 아들인 티리다테스가 나타나자 기쁨의 환성을 질렀습니다. 페르시아인들은 역대 아르메니아 왕들의 조각상과 해와 달의 성상들을 산산조각 냈습니다. 
아르메니아의 귀족들은 티리다테스에게 달려가 자신들이 뺏겼던 명예와 보상을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군대의 지휘권은 아르타바스데스에게 주어졌습니다. 그의 아버지가 바로 어린 티리다테스를 구해준 인물이고, 그런 이유로 가족이 몰살당하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군의 최고 직책은 오타스에게 주어졌는데, 그는 외딴 요새에 피해있다가 자신의 누이와 재산을 왕에게 바쳤습니다. 아르메니아 귀족들 중 맘고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는 스키타이족 출신이었습니다. 그는 중국의 주변 지역에서 야영을 하다가 중국 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페르시아 왕 샤푸르 1세의 보호를 간청했습니다. 샤푸르 1세는 맘고를 서방의 변경 지역으로 추방하겠다고 약속함으로써 겨우 전쟁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맘고 일행이 추방된 곳이 아르메니아였는데, 페르시아는 이들에게 티리다테스의 침공을 저지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맘고는 페르시아의 편을 들지 않고 티리다테스 편에 서기로 마음먹었고, 티리다테스는 그를 극진한 예로써 대접했습니다.
 

  아르메니아를 재탈환한 페르시아인들

 얼마 동안은 티리다테스가 우세한 것으로 보였고, 그는 아시리아의 심장부까지 군대를 이끌고 가서 침략을 단행했습니다. 이때 페르시아 왕국은 두 형제가 왕위를 놓고 내전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티리다테스에게 유리했습니다. 그러나 페르시아의 내전은 곧 끝났고, 왕위 다툼에서 이긴 나르세스가 페르시아 왕으로 인정되었습니다. 나르세스는 외적을 무찌르는 데 전력을 기울였습니다. 아무리 용맹한 티리다테스였지만 페르시아의 막대한 군사력에는 당해낼 수 없었습니다. 티리다테스는 아르메니아 왕위에서 다시 쫓겨나서 로마로 피신했습니다. 나르세스는 티리다테스를 보호해 주는 로마에 적대감을 품고 동방 정복의 열의를 다졌습니다. 

페르시아 왕 나르세스 1세 (위키피디아)

 

  서기 296년, 페르시아와 로마의 전쟁· 갈레리우스의 패배

 로마는 다시 쫓겨난 아르메니아 왕의 대의명분을 위해서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치르기로 했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안티오크에서 군사 작전을 지휘하였고, 갈레리우스가 군대의 지휘를 맡았습니다. 양군은 메소포타이아 평원에서 마주했습니다. 처음 두 번의 전투는 승패가 정확하지 않았으나, 세 번째 교전은 로마군의 참패였습니다. 갈레리우스가 소규모의 부대로 성급하게 페르시아의 대군을 공격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갈레리우스가 패한 지역은 불모의 사막으로, 로마군은 샘물도 없는 그곳에서 열기와 갈증으로 절박한 위기에 빠졌고, 결국 화살에 맞아 궤멸하였던 것입니다. 아르메니아 왕 티리다테스도 곤경에 빠졌는데, 그는 강물로 뛰어들어 강 반대편으로 도착해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 갈레리우스는 살아돌아오긴 했으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분노한 모습과 마주해야 했고, 황제의 전차를 1마일이나 걸어서 따라가며 치욕을 당해야 했습니다.  
 

  서기 297년, 갈레리우스의 제2차 전투· 갈레리우스의 승리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갈레리아누스가 명예회복의 기회를 달라고 탄원하자,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갈레리아누스는 제1차 원정 때와는 달리 제2차 원정에서는 일리리쿰 변경지역의 노련한 고참병들과 신병들로 편성했으며, 상당수의 고트족 보조 부대까지 편입시켰습니다. 갈레리우스는 2만 5000명의 정예군과 함께 유프라테스 강을 건넜습니다. 이번에는 메소포타미아 평원이 아닌 아르메니아의 산악 지대를 택했습니다. 이곳에서는 주민들도 갈레리우스를 열렬히 환영했으며, 산악지대인 만큼 보병이 유리했습니다. 
 로마군은 패배 후 군기가 확립되어 있었습니다. 반면 페르시아군은 승리로 인해 해이해져 있다가 야간에 기습 공격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치명적이었습니다. 

그들은 군마가 도망치는 것을 막기 위해 묶어 놓을 뿐 아니라 대개 쇠고랑까지 채워 두었다. 비상 사태가 일어나면 페르시아 병사는 침구를 정리하고, 말고삐를 채우고, 갑옷을 입은 후에야 말에 오를 수 있었다.

 

  페르시아 왕실 포로들에 대한 갈레리우스의 태도

 갈레리우스는 맹공을 퍼부었고, 페르시아군 진영에서는 혼란과 공포가 엄습했습니다. 대량학살이 일어났고 나르세스 왕은 부상 당한 채 메디아 사막을 향해 달아났습니다. 로마군은 나르세스 왕과 태수들의 호화스러운 천막에서 엄청난 전리품을 얻었습니다. 나르세스는 군대를 따라왔던 여러 아내와 누이들, 자녀들이 포로로 잡히는 일을 겪어야 했습니다. 갈레리우스는 나르세스의 가족들을 안전한 장소로 옮겨주었고, 정중하고 친절한 태도로 대했습니다. 
 

로마 제국 쇠망사 1권 13장(1) 요약

카리누스가 암살되고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황제가 되었는데, 그는 관용정책으로 자신에게 반기를 들었던 사람들에게도 관용을 베풀었습니다. 그는 막시미아누스를 부황제로 영입함으로써 무력을 써야 할 일이 있을 때 그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는 또 두 명의 젊은 부황제를 받아들여서 통치에 활력을 불어넣었습니다. 부황제들은 모두 디오클레티아누스와 함께 로마 제국 제43대 공동 황제가 되었습니다.
 287년, 폭정에 시달리던 갈리아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켰는데 막시미아누스가 제압했습니다. 그러나 브리타니아는 카라우시우스가 반란을 일으켜 스스로 브리타니아 제국의 황제가 되고 말았습니다. 해군력을 카라우시우스가 가져갔기 때문에 로마는 어쩔 수 없이 카라우시우스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젊은 콘스탄티우스의 치밀한 계획에 의해 브리타니아는 재탈환되었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20년의 치세동안 자신이 직접 출정하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세 명의 공동황제가 주로 출정했기 때문입니다.  로마는 전투에서 잡은 포로들을 인구가 감소한 지역에 배분했는데, 적들이 나중에 제국에 칼을 겨눌 수도 있다는 생각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집트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두 황제가 직접 나섰고,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집트 도시의 시민들에게 잔인하고 가혹한 처벌로 응징했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집트에서 연금술에 관한 책을 모두 불태웠습니다. 시민들이 요행을 바라고 노동을 등한시한다는 이유였습니다. 
 제1차 페르시아 전쟁에서 패배한 갈레리우스는 다시 도전하여 2차 전쟁에서는 승리하여 명예회복을 했습니다. 갈레리우스는 포로로 잡힌 페르시아 왕가의 가족들을 보호하고 정중한 태도로 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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