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쇠망사 1권 12장(2)(에드워드 기번, 윤수인, 김희용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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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저서 읽기/로마제국 쇠망사(에드워드 기번, 윤수인_김희용 옮김)

로마 제국 쇠망사 1권 12장(2)(에드워드 기번, 윤수인, 김희용 옮김)

게르마니아로 전쟁을 확대하는 프로부스

 이전 황제들은 변경 지역 방어에 있어서 게르만족을 방어하는 정도로만 만족했지만, 프로부스 황제는 갈리아를 정복하고자 라인 강을 건넜고, 엘베 강과 네카르 강 유역에서도 로마군의 독수리 깃발을 휘날렸습니다. 프로부스는 로마를 침입하는 부족들의 본거지를 공격하지 않는 한, 어떤 방법도 평화를 바라게 만들 수는 없을 것이라는 판단을 했습니다. 로마 황제가 직접 참전한 것을 안 게르만족들은 당황하여 가장 비중 있는 9명의 왕들이 황제를 찾아가 조약을 받아 들었습니다. 황제는 그들의 약탈한 물품을 다 반환할 것과 약탈품을 숨기는 자들에 대한 처벌도 책임지고 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게르만족들이 바치는 공물은 게르만족을 수비하는 수비대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프로부스 황제는 게르만족의 군사력을 모두 포기하게 해서 온전히 로마 제국의 제도 안에서 활동하게 하고 싶었지만, 그럴 경우 강력한 군사력이 바탕이 되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했으며, 억지로 편입시켜 봐야 더 강력한 스키타이족을 접하고 있어야 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라인 강에서 도나우 강까지 성벽을 건설한 프로부스

 프로부스는 현실적으로 적용시킬 수 있는 강력한 방벽을 건설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오늘날 슈바벤 지구로 알려진 이 지방은 황무지로 방치되어 있었는데 토양이 비옥했기 때문에 갈리아의 여러 속주로부터 새로운 이주민들이 이동해 왔습니다. 그들은 로마 제국에 10분의 1세를 내면서 로마의 존재를 인정했습니다. 따라서 로마도 새로운 속주민을 보호하기 위해 국경 수비대의 방어선을 라인 강에서 도나우 강으로 점차 연장하였습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 이후로 자연환경을 이용하여 이 지역의 방벽을 유지하고 있었는데, 프로부스는 이런 조잡한 방벽 대신에 매우 높은 석벽을 건설했으며, 적당한 위치에 여러 개의 망루를 세워서 방비를 강화했습니다. 이 석벽은 도나우 강 유역에서 시작해서 라인 강 유역에서 끝이 났습니다. 이 방벽으로 알레만니족이 로마로 침투하는 통로를 봉쇄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광대한 국토를 요새화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적들은 언제나 취약한 지점을 찾아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방어하는 쪽에서는 어느 한 지점이 돌파당하면 그 순간 모든 방어선이 무너져 내리는 경우가 일반적이라고 합니다. 프로부스의 방벽도 그의 사후, 알레만니 족에 의해 무너져 내렸다고 합니다. 
 

여러 부족들의 이주와 정착

 프로부스 황제는 게르만족으로부터 1만 6000명의 보충병을 제공받았습니다. 황제는 만약을 대비해서 그들을 모든 속주에 분산 배치했고, 각기 50~60명의 소부대로 나누어 로마군 사이에 편입시켰습니다. 이는 인력은 보충하면서 눈에 띄지 않게 하는 나름의 방법이었습니다. 이 시기 그들의 도움은 필수적이었는데, 계속되는 전쟁으로 이탈리아 본토와 속주들에서는 군사력을 담당할 사람이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결혼을 하지 않으려 하였고, 농업이 황폐화됨으로써 인구 증가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프로부스가 다른 부족들을 이용해 군사력을 메우려고 하는 것은 필연적인 선택이었습니다. 황제는 그들을 위해 다양한 장려책을 실시했습니다. 마침 우리나라의 인구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각종 혜택이 경쟁적으로 발표되는 것과 비슷한 경우 같습니다. 프로부스는 반달족을 브리타니아의 케임브리지셔로 강제 이주시켰습니다. 또한 많은 수의 프랑크족과 게피다이족도 도나우 강과 라인 강 유역으로 강제 이주당했습니다. 바스타르나이족 10만 명은 트라키아에 정착했습니다. 그러나 평소 성급하고 나태한 여러 부족들은 농사일을 견디기 힘들어했으며, 자유에 대한 갈망으로 경솔한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로마 황제들은 이런 인위적인 충원으로는 예전의 활력을 찾을 수 없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다른 민족이 자연스럽게 흡수되려면 체계적인 교육과 시스템이 필요할 것인데 이 시기 로마는 그럴 여력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프랑크족의 대담한 계획

 프로부스 황제가 알라니족을 방어하기 위해 폰투스 해안 지대에 자리 잡게 했던 프랑크족이 있었는데, 이들은 흑해의 한 항구에서 함대를 훔쳐서 지중해를 따라 순항하면서 아시아와 그리스, 아프리카의 무방비한 여러 해안 지역에 빈번히 상륙하여 약탈을 저질렀습니다. 부유한 도시인 시라쿠사는 지난 날의 화려한 승리가 무색하게 적은 수의 프랑크족에게 약탈당했으며, 주민 대부분은 학살당했습니다. 
 

 동방에서 사투르니누스의 반란

 프로부스 황제가 갈리아를 평정하기 위해 떠났을 때, 동방 군대의 지휘권을 사트르니누스 장군에게 위임했는데, 주위 사람들의 집요한 권유로 어쩔 수 없이 반란에 내몰렸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 선택이 너무나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아! 제국은 유능한 신하 한 사람을 잃었네. 일시적인 경솔함이 여러 해 동안 세운 수훈을 무효로 만들어 버렸네.

 그는 군주가 된다는 고통에 두려워했으며, 죽음이라는 운명이 임박했음을 직감한 것 같습니다. 프로부스 황제는 사투르니누스를 신뢰했으며, 반역했다는 사실을 알고도 용서해주려고 했으나 사투르니누스의 지지자들의 극렬한 반대로 항복할 기회를 놓쳐버렸습니다. 사투르니누스만이 프로부스 황제의 제안이 진실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서기 280년, 갈리아에서 보노수스와 프로쿨루스의 반란

 서방에서는 갈리아에서 보노수스와 프로쿨루스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프로부스는 이들을 평정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의 가족의 목숨과 재산은 보존해 주었습니다.
 

서기 281년, 프로부스 황제의 승리

 프로부스는 모든 침략을 진압하고, 참주들을 제압함으로써 국가의 평온을 공고히 했습니다. 그동안 쌓아왔던 프로부스 황제의 업적을 찬양하는 개선식이 성대하게 거행되었습니다. 국민들은 프로부스의 전리품들을 보며 기뻐하였습니다. 그런데 원형경기장에서 개선식을 기념하는 오락을 즐기기 위해 동원된 600명의 검투사 중 80여 명의 검투사들이 다른 사람의 오락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없다며 관리인들을 살해하고 로마의 거리로 뛰쳐나갔다가 정규군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프로부스의 규율

 프로부스 황제는 전임 황제인 아우렐리아누스 보다 조금 덜하기는 했지만, 엄격하다는 점에서는 비슷했습니다. 그러나 방법면에서 차이가 있었는데,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병사들의 위반행위를 엄격하게 처벌했다면, 프로부스 황제는 다른 행동을 할 수 없게 끊임없이 노동을 시켰습니다. 전투를 위해 이집트에 갔을 때도 대규모 공사를 실시했습니다. 병사들은 건축가, 기술자, 그리고 농민이 되어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는 병사들의 노력으로 판노니아의 구릉지대와 갈리아에 풍성한 포도밭을 만들었습니다. 
 

프로부스의 죽음 서기 282년 8월

모든 일이 그렇듯이 정도를 벗어나면 부작용이 따르는데 프로부스 황제도 병사들의 노동강도를 생각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일을 시키다가 분노한 병사들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프로부스 황제는 전 세계에 평화를 확립하여 상비군과 용병 제도를 완전히 폐지하고 싶다는, 이상적이지만 실현불가능한 희망을 표시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발언이 병사들을 자극했던 것입니다.
 노동으로 지친 병사들이 우발적으로 황제를 살해했고, 곧 자신들의 경솔함을 한탄하며 명예로운 기념비를 세워 그를 추모했습니다. 

 

카루스의 등극과 품성

로마 제 41대 황제[282년 9월 ~ 283년 7월 (10개월)]

프로부스가 죽은 후, 군대는 근위대장인 카루스를 만장일치로 황제로 선언했습니다. 그는 군인이었지만, 학문적 교육을 받았으며, 원로원 의원이면서 근위대장직을 부여받았습니다. 문무를 겸비한 황제였습니다. 그는 프로부스의 죽음에 공모했을 수도 있다는 의심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는 황제가 된 후 성격이 잔인하게 변했다고 합니다. 카루스가 황제에 올랐을 당시의 나이는 대략 60세 정도였고, 이미 장년기가 된 두 아들 카리누스와 누메리아누스가 있었습니다.
 

 원로원과 대중의 감정

 이제 원로원의 권위는 프로부스와 함께 사라졌습니다. 군대는 더이상 민간권력에 대한 존중을 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원로원의 승인도 없이 카루스를 황제로 선언했습니다. 카루스 또한 원로원에 자신의 제위를 알리는 통보 식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카루스를 축하하거나 아첨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지금도 카루스 황제의 즉위에 관한 한 편의 전원시가 남아있는데 파우누스 신이 쇠퇴하고 있는 로마를 다시 한번 재건할 영웅(카루스)을  환호하며 맞이한다는 내용이라고 합니다. 
 

 사르마티아족을 격퇴하고 동방으로 진군하는 카루스

 카루스는 페르시아 원정을 준비하면서, 장남 카리누스에게 황제와 거의 동등한 권한을 부여하면서, 갈리아의 몇몇 소요를 진압한 후 로마에 머물면서 서방 속주들에 대한 통치를 맡겼습니다.
 작은 아들 누메리아누스와 함께 페르시아 원정을 떠난 카루스 황제는 사르마티아족을 진압하면서, 1만 6000명의 사망자와 2만 명의 포로를 확보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계속 진군하여 드디어 페르시아 왕국의 국경 지대에 도착했습니다. 카루스는 높은 곳에 진을 치고 병사들에게 페르시아의 부유함과 풍족함을 보여주면서 병사들의 전의가 불타오르게 했습니다. 
 

 서기 283년, 페르시아 사절을 접견한 카루스

 아르타크세르크세스의 후계자인 바흐람은 소아시아에서 세게스탄족(가장 호전적인 종족)을 정복했을 만큼 용맹했지만, 로마군의 접근에는 두려움을 느꼈고, 그들과 평화 협상을 하여 공격을 지체시키려고 했습니다.
 회담에서 카루스는 두건을 벗어 자신의 대머리를 보이면서 로마의 우월성을 인정하지 않으면 페르시아를 자신의 머리처럼 숲이 없는 상태로 만들어버리겠다고 협박했습니다. 카루스의 행동에 페르시아 사절 일행은 온몸으로 두려움을 느끼면서 돌아갔습니다.
 

 카루스의 승리와 이상한 죽음

 카루스는 자신이 협박한 대로 메소포타미아를 유린하고 대도시인 셀레우키아와 크세티폰의 지배자가 되었고, 군대를 티그리스 강 너머로까지 전진시켰습니다. 이때 페르시아는 평의회의 파벌 싸움으로 인해 인도의 국경 지대에서 지체하고 있었습니다. 로마군은 이런 유리한 상황에 기뻐하는 동시에 카루스 황제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카루스 황제의 죽음은 미스테리한데 로마군 진지에 폭풍우가 불었고 번개로 인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갑자기 황제가 죽었다는 외침이 들렸다고 합니다. 군대는 카루스 황제가 병으로 죽었다고 했지만 누가 들어도 뭔가 석연치 않은 부분이 분명히 있는 것 같습니다. 
 

 두 명의 아들 카리누스와 누메리아누스가 카루스를 계승함

로마 제국 제 42대 황제 카리누스(좌)와 누메리아누스 황제(우)

 카루스의 죽음 이후 큰 소란 없이 두 아들이 공동 황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카루스와 함께 페르시아 원정을 갔던 작은 아들 누메리아누스는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으로 병사들이 미신적인 믿음에 동요되는 것을 제지할 수 없었습니다. 당시에는 벼락을 맞았던 장소들이나 사람들을 특별히 신에게 헌납된 것으로 여겼다고 합니다. 또한 초대황제인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유서에서 자연적인 경계를 기준으로 로마의 영토를 확정했었는데, 갑자기 그 유언이 상기되었습니다. 병사들이 누메리아누스 황제에게 퇴각을 요청했기 때문에 힘없는 누메리아누스 황제는 병사들의 뜻에 못 이겨 승리가 보장된 전쟁이었지만 퇴각해야만 했습니다.
 

 서기 284년, 카리누스의 결함

 뒤 늦게 카루스 황제의 사망 소식을 알게 된 원로원은 새롭게 제위에 오른 두 황제를 축하했습니다. 그러나 두 황제는 평민 출신으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제국을 통치하게 되었기 때문에 불안한 면이 있었습니다. 형인 카리누스는 불과 몇 달 만에 9명의 처와 결혼했다가 이혼하는 것으로 황제의 지위를 남용했습니다. 카리누스는 평민 출신이었기 때문에 열등감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자신에게 비난하는 사람이나 존중하지 않는 사람들은 추방하거나 처형했습니다. 
카리누스 황제의 주변에는 자질이 밑바닥 수준인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문지기가 수도의 행정권을 위임받기도 했습니다. 또한 근위대장과 집정관이라는 막중한 직책에 자신의 쾌락을 추종하는 자들을 배치하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위조 기술이 뛰어난 사람에게 자신의 서명을 대신하게 하고 자신은 쾌락에 빠져 지냈습니다. 
카리스 황제는 죽기 전 페르시아에서 큰 아들에 대한 수치스러운 소식을 듣고, 아들의 자리에 달마티아 총독 콘스탄티우스를 앉히려는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로마의 경기들을 찬양하는 카리누스

 카리누스와 동생 누메리아누스의 유일한 공적으로 대경기장, 원형경기장에서의 로마식 유흥들이 그동안의 어떤 행사보다 월등하게 호화로웠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오랜 기간 행사를 보아왔던 나이 든 시민들조차도 이렇게 화려한 구경거리는 처음이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원형 경기장의 한 가운데 조성된 숲에서 이루어진 맹수 사냥이나 전시는 세계를 호령하는 로마 제국에 어울릴 만큼 위대한 건축물에서 장대하게 행해졌습니다. 규모면에서 거대한 티투스의 원형 경기장은 80개의 아치 위에 세워지고 구조상 4층으로, 높이는 140피트, 길이 560피트, 폭 465피트의 타원형 건물이었습니다. 이 건물의 외벽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조각상으로 장식되었습니다. 
 

로마의 콜로세움(원형 경기장)_60 내지 80열의 좌석으로 최대 8만명까지 수용가능했던 것으로 추정됨

햇빛과 비를 막기위해 거대한 덮개가 이용되기도 했습니다. 지하에 묻은 관으로 계속해서 물을  공급했기 때문에, 조금 전까지 평지로 보이던 곳이 갑자기 많은 군함으로 뒤덮이거나 심해의 괴물들로 가득 찬 넓은 호수로 바뀌기도 했습니다. 원형경기장의 집기는 금, 은 또는 보석으로 장식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서기 284년 9월

카리누스 황제가 로마에서 화려한 생활에 젖어있는 동안 동생인 누메리아누스 황제는 페르시아 원정에서 퇴각하는 길에 안질에 걸려 사망했습니다. 
누메리아누스 황제의 병세가 짙어지자, 그의 장인인 아페르가 군정을 비롯한 모든 정무를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야심 많은 아페르는 사위인 누메리아누스가 죽었다는 사실을 숨기고 황제의 명령을 전달하였습니다. 의심이 생긴 병사들이 결국 황제의 막사에 난입하여 죽어있는 누메리아누스 황제를 발견하였습니다. 급히 대군사회의가 소집되었고, 사슬에 묶인 아페르는 끌려 나왔습니다. 
군대는 차기 황제로 디오클레티아누스를 지목했고, 단상에 올라온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아페르가 변명할 기회도 주지 않고 근위대장 아페르의 가슴을 찔렀습니다. 군대는 다시 한 번의 환호로써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정당성과 권위를 인정했습니다. 
 

카리누스의 패배와 죽음 서기 285년 5월

 카리누스는 황제로써의 소양이 상당히 부족한 인물로써 그의 아버지 카루스 황제에게 충성했던 신하들도 아들 카리누스를 경멸했으며 국민과 원로원은 카리누스보다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 마음이 기울어졌습니다. 이제 카리누스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내전이 불가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페르시아 원정을 다녀오는 길이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조건에서 현재 황제인 카리누스에 비해 불리한 조건에 놓여 있었습니다. 만약에 내전을 치른다면 카리누스 황제가 훨씬 우세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전은 일어나지 않았는데, 카리누스의 악덕으로 인해 그가 목숨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카리누스는 한 장교의 아내를 농락했고, 그 장교에 의해 목숨을 잃었던 것입니다. 카리누스에게는 불행이었지만, 디오클레티아누스에게는 행운이 된 것입니다. 
 

로마제국 쇠망사 12권(2)

 프로부스 황제가 게르만족과의 전쟁에 직접 나서자 게르만족은 당황하여 로마 황제가 요구하는 조약을 순순히 받아들였습니다. 프로부스 황제는 게르만족을 로마에 편입시키면 스키타이족과 국경을 마주해야 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편입시키지 않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프로부스 황제는 대신 성벽을 건설하여 다른 민족의 침입을 막고자 했습니다. 그는 매우 높은 석벽을 건설했습니다. 또한 게르만족 젊은이들 1만 6000명을 로마 군대에 분산시켜 편입시켰습니다. 
프로부스 황제는 갈리아에 원정을 가면서, 동방군대의 지휘권을 사투르니누스 장군에게 위임했는데, 사투르니누스는 주변 인물들의 집요한 권유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황제는 그를 용서해주고 싶었으나 그의 주변인물들의 만류로 결국 죽음을 맞이해야 했습니다. 갈리아에서도 보노수스와 프로쿨루스의 반란이 있었습니다. 프로부스는 국내외의 적들을 평정하고 개선식을 개최했는데 오락을 위해 준비되었던 검투사들이 반란을 일으켜 목숨을 잃었습니다. 
프로부스 황제는 병사들에게 가혹할 만큼 노동을 시키다가 화가 난 병사들에 의해 우발적으로 살해되었습니다. 카루스가 새 황제가 되었으나, 원로원을 존중했던 프로부스 황제와는 다르게 그는 원로원을 무시하였습니다. 카루스가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그의 두 아들이 공동 황제가 되었으나, 큰 아들 카리누스는 로마에서의 방탕한 생활로 혐오를 일으키고 있었으며, 작은 아들 누메리아누스는 페르시아에서 퇴각하는 도중에 병을 얻어 죽었습니다. 누메리아누스의 죽음으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군대에 의해 황제로 승인이 되었기 때문에 카리누스 황제와의 내전이 불가피하게 되었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이미 소진해 있는 군대로 로마에 있는 카리누스 황제를 물리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카리누스 황제가 방탕한 생활로 어느 장교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면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황제가 될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