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쇠망사 1권 11장(2)(에드워드 기번, 김희용, 윤수인 옮김)
본문 바로가기

위대한 저서 읽기/로마제국 쇠망사(에드워드 기번, 윤수인_김희용 옮김)

로마 제국 쇠망사 1권 11장(2)(에드워드 기번, 김희용, 윤수인 옮김)

2024.01.11 - [위대한 저서 읽기/로마제국 쇠망사(에드워드 기번, 윤수인_김희용 옮김)] - 로마 제국 쇠망사 1권_10장(2)(에드워드 기번, 윤수인_김희용 옮김)

2024.01.13 - [위대한 저서 읽기/로마제국 쇠망사(에드워드 기번, 윤수인_김희용 옮김)] - 로마 제국 쇠망사 1권 11장(1)(에드워드 기번, 윤수인_김희용 옮김)

알레만니족과의 전쟁

 알레만니족은 로마와 평화 조약을 맺고 있었는데 이 조약에 불만을 품은 젊은이들이 분노하여 무기를 들었습니다. 무려 4만 명의 기병대와 8만 명 정도의 보병대가 출정하였습니다. 처음 목표는 라에티아의 변경에 위치한 몇 개의 도시였으나, 성공에 고무된 이들은 도나우 강에서 포 강으로 빠르게 이동하여 그 일대를 유린하였습니다.

라에티아(위키피디아)

   서기 270년 9월

 로마군은 알레만니족이 돌아가는 길에 매복하고 있었습니다. 강 건너편에 있었던 로마군은 알레만니족의 반이상이 넘어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급습을 했습니다. 당황한 알레만니족은 로마와 화평을 청하였습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최대한 격식을 갖추어 그들을 맞이했습니다. 그들은 로마 황제의 위엄에 경외심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변명을 하며 공적을 과장했으며, 보상을 요구했습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단호하게 거절했으며 그들을 꾸짖었습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고트족에게 보인 관용과는 다르게 알레만니족은 위험한 적으로 판단했습니다.

 

   알레만니족의 이탈리아 침입

 알레만니족은 도나우 강과 로마군의 정면돌파가 어렵다는 판단을 하였고, 방비가 허술한 로마군의 후위를 공격한 후 빠르게 이탈리아의 산악지대로 되돌아갔습니다. 전쟁이 끝났다고 생각한 아우렐리아누스는 알레만니족이 무사히 탈출하여 밀라노 지역을 파괴했다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분노한 황제는 신속하게 기병대와 보병대가 적을 추격할 것을 명령하였고, 자신도 도나우 강 유역 전투에 참가하기 위해 보조군과 근위대 전 병력을 지휘하며 진격했습니다.

 

    마침내 아우렐리아누스에게 정복당한 알레만니족

 이미 알레만니족은 알프스 산맥에서 아펜니노 산맥까지 퍼져 있어서 로마군은 끊임없는 경계 활동을 해야만 했습니다. 여러 전투에서 대규모 전투는 세 차례가 있었다고 합니다. 제1차 전투에서는 날이 어두워졌을 때 갑자기 나타난 알레만니족으로 인해 로마군은 엄청난 타격을 입었습니다. 겨우 황제가 군대를 재정비하여 사태를 수습하였습니다. 제2차 전투에서 알레만니족은 로마를 약탈하기 위해 아이밀리아 가도와 플라미니아 가도를 따라 진격해 왔습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그들의 후위를 추격하여 그들에게 철저한 패배를 안겼습니다. 제3차 전투는 파비아 부근에서 치뤄졌는데, 이때 알레만니족은 완전히 궤멸되어 로마는 그들의 침입에서 해방되었습니다.

 

    미신적인 의식들 · 서기 271년 1월

 여러 민족의 계속되는 침입으로 로마인들은 불안에 떨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황제를 믿기도 했지만, 계속되는 전쟁으로 인해 미신에 의지하게 되었고, 마침내 황제도 원로원을 통해 시빌신탁서에서 조언을 받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시빌 신탁서는 청년 및 처녀들로 구성된 합창대와  흰 옷을 입은 사제들이 함께 행진할 것과 로마와 인근지역에 정화 의식을 거행하고 희생 제물을 바칠 것을 명령했습니다. 미신은 승리를 하는 데 어느 정도 기여했다고 합니다. 전쟁에서 알레만니족들은 로마군의 편에서 싸우는 가상의 군대를 보았다고 합니다. 

 

    로마의 요새화

 여러 민족의 계속되는 침입으로 아우렐리아누스는 성벽을 세우기로 하였습니다. 성벽의 길이는 21마일 정도였도였는데, 사실 성벽을 쌓는다는 것은 로마가 그만큼 외부 침입에 대해 자신이 없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었습니다. 성벽을 쌓기 전의  로마의 방위는 변경의 주둔지를 둔 군단이 책임을 져서 잘 해냈기 때문에 굳이 로마의 중심지를 요새화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아우렐리아누스의 성벽(위키피디아)

    두 명의 제위 찬탈자를 진압한 아우렐리아누스

 아우렐리아누스의 통치 범위는 이탈리아, 아프리카, 일리쿰 및 트라키아의 변경까지로 제한되어 있었습니다. 옛 로마의 영토였던 갈리아, 에스파냐, 브리타니아 그리고 이집트, 시리아, 소아시아는 여전히 두 명의 참주에게 점령당한 상태였고, 모두 여성황제였습니다.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의 예술적 묘사(이미지:DevianArt/@Amelianus)

   갈리아에서의 제위 찬탈자들의 출몰

 갈리아에서도 군주가 자주 바뀌었는데, 그중 포스투무스는 모군티아쿰(현재 독일의 마인츠)에서 황제를 사칭한 자를 제압한 후에도, 휘하 군대가 도시를 약탈하지 못하게 했다는 이유로 분노한 군대에 의해 살해되었습니다. 포스투무스가 7년 동안 갈리아 황제로 지낼 수 있었던 것은 그 당시 로마 황제였던 갈리에누스가 여러 민족의 침입으로 갈리아에 신경을 쓸 여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갈리에누스는 포스투무스를 갈리아 황제로 인정하는 대신 이탈리아를 침범하지 않을 것을 약속받았고, 실제로 아우레올루스가 갈리에누스에 대해 반역을 일으켰을 때, 포스투무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포스투무스는 갈리에누스와의 협정을 지키기 위해 응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포스투무스가 죽은 후 공동황제였던 빅토리누스는 부하 장교의 아내를 유혹한 일로 암살을 당했습니다. 빅토리누스의 어머니는 군대에 막대한 돈을 지불하여, 마리우스와 테트리쿠스를 연이어 왕으로 앉히고 실질적인 통치를 하였습니다. 그녀는 아우구스타 및 군대의 어머니라는 칭호를 썼다고 합니다. 

 

   테트리쿠스의 통치와 패배 · 서기 271년 여름

 테트리쿠스는 더 이상 갈리아 황제로서 버티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고, 로마 황제 아우렐리아누스에게 비밀리에 구원의 손길을 부탁합니다. 테트리쿠스는 내전 상황으로 가장해서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와 대치했고, 전투가 시작되자 심복부하 몇 명만 데리고 탈영했습니다. 상파뉴 지방의 샬로우부근에서 벌어진 이 전투로 거의 모든 병사가 사망했으며, 보조군은 퇴각함으로써 로마황제의 통치권은 안토니누스의 성벽으로부터 헤라클레스의 기둥까지로 확정되었습니다.

    서기 272년, 제노비아의 성격 · 제노비아의 아름다움과 학식

 이제 갈리아를 평정한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팔미라 제국의 여왕 제노비아를 공격하러 떠났습니다. 저자는 여러 가지 덕목에서 제노비아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가장 용기 있고 사랑스러운 여인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학식에 있어서도 뛰어났다고 합니다. 
 그녀는 오다이나투스와 결혼했는데, 오다이투스도 용맹했지만 제노비아 또한 남편 못지않은 용맹함으로 덮개가 있는 마차를 거부하고 군대의 선두에 서서 몇 마일씩이나 도보로 행군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발레리아누스 황제를 포로로 잡아 욕보인 페르시아 왕 샤푸르와의 싸움에서 두 번씩이나 승리했기 때문에 갈리에누스 황제는 오다이나투스를 합법적인 공동 황제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팔미라의 여왕 제노비아( Created as a midjourney)

   남편의 죽음에 복수하는 제노비아 · 서기 250년

오다이나투스는 사냥에서 조카 마오니우스가 예의를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말을 뺏었고, 금고형을 내린 일로 마오니우스에 의해 암살당했습니다. 이때 오다이나투스의 전처소생인 헤로데스마저 살해되었습니다. 마오니우스는 제노비아에 의해 그녀의 남편 영전에 희생물로 바쳐졌습니다. 

 

    제노비아의 동방과 이집트 통치

 제노비아는 옥좌를 차지했고, 팔미라와 시리아 및 동방 지역을 5년 이상이나 통치했습니다. 제노비아는 견실한 통치를 했으며, 실천 가능한 정책을 폈으며 철저한 근검절약을 했으나 필요한 경우에는 배포가 크고 너그러웠다고 합니다. 인접한 아라비아와 아르메니아, 페르시아는 그녀와 대적하는 것이 두려워 동맹국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에게는 로마식 교육을 시키면서, 자신을 동방의 여왕이라는 화려하지만 애매한 칭호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서기 272년, 아우렐리아누스의 원정

 비티니아 속주는 로마 황제를 대면하고는 다시 복종하였고, 안키라는 항복 하였습니다. 끈질기게 저항하던 티아라는 한 시민의 배신행위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안티오크 시민들은 로마 황제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도망쳤으나, 황제는 칙령을 내려 이들을 돌아오게 했으며, 대사령을 내려주었습니다. 

 

    안티오크와 에메사 전투에서 팔미라인들을 쳐부순 아우렐리아누스

아우렐리아누스가 접근해 오는 것을 안 제노비아는 침착하게 전투를 준비하였습니다. 이들은 두 번의 큰 전투를 치렀는데, 첫 번째 전투는 안티오크에서, 두 번째 전투는 에메사 부근에서 벌어졌습니다. 제노비아 여왕은 두 차례 다 직접 나서서 전투를 지휘했으며, 실행하는 일은 군사적인 재능이 뛰어난 자브다스에게 맡겼습니다. 제노비아의 대부대의 구성은 가벼운 차림의 궁사 보병과 완전히 철갑으로 둘러싸인 중기병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궁사 보병의 약점은 갑옷을 입지 않아 상대의 공격에 취한 점이고, 중기병은 철갑 갑옷으로 인해 움직임이 자유롭지 않다는 점입니다. 로마는 이 둘의 약점을 잘 이용해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습니다. 로마군은 중기병에 대해서는 산발적인 공격으로 민첩하지 못한 약점을 이용하여 무찔렀고, 화살을 다 써버린 궁수 보병에게는 노련한 부대를 이용해 근접거리에서 공격해서 갑옷을 입지 않은 그들을 공격했습니다. 
 에메사 부근의 두 번째 전투에서 패배했을 때, 제노비아의 통치를 받던 나라들이 로마에 항복했기 때문에 제노비아는 이제 자신의 국가인 팔미라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팔미라 수도의 성벽 안에서 저항을 위한 준비를 마쳤고, 목숨을 건 싸움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팔미라 왕국

 팔미라는 페르시아 만과 지중해 사이에 있었기 때문에 편리한 근접성으로 인도 상품을 유럽으로 나르는 대상들이 빈번하게 왕래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자연환경이 좋아서 곡식과 과일을 생산할 수 있었고 공기가 맑았으며 많은 샘물이 있었습니다. 팔미라는 트라야누스 황제의 승리 이후 150년 동안 로마의 식민지로 번영해 왔습니다. 그 이후 로마가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오다이나투스와 그의 부인 제노비아가 팔미라 제국을 다스렸습니다. 

 

    아우렐리아누스에게 포위 공격당하는 팔미라

 아우렐리아누스에게도 에메사에서 팔미라 사이의 사막을 가로질러 진격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아랍인들의 쉴 새 없는 공격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로마 황제에게는 팔미라를 정복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었기에 심지어 창에 맞 부상을 당하면서 까지 전투에 임했습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전투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 하에, 제노비아에게는 명예로운 퇴위를, 시민들에게는 예전의 특권을 다시 주는 조건으로 협상을 하려고 했으나, 모욕적이고 완강한 거부를 당했습니다. 

 

    제노비아와 팔미라의 정복자가 된 아우렐리아누스· 서기 273년

 제노비아가 당당할 수 있었던 이유는 로마군이 식량 부족으로 퇴각할 수밖에 없을 거라는 것과 페르시아 왕이 제노비아와의 동맹을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들고 나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이러한 확신으로 불굴의 인내력을 발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페르시아는 샤푸르 왕의 죽음으로 혼란에 빠졌으려, 소수의 원군마저 로마 황제가 보낸 뇌물공세로 저지당했습니다. 제노비아의 예상과는 달리 로마군에 시리아로부터 보급품이 제때에 도착한 데다 이집트에서 승리를 한 프로부스 장군이 돌아왔기 때문에 전세는 제노비아에게 불리하게 돌아갔습니다. 상황을 인식한 그녀는 낙타를 타고 도망가다 잡혀 황제 앞에 끌려왔습니다. 

이 전쟁의 승리로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포로가 잡힌 이후 로마를 저버렸던 여러 지역들을 다시 한번 복종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제노비아의 태도

 제노비아는 황제 앞에서 황제에게 맞서 무기를 든 것에 대해 추궁당하자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저로서는 아우레올루스나 갈리에누스 같은 자들은 로마 황제로 존중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직 폐하만이 정복자요 군주로 인정할 수 있는 분입니다. 

제노비아는 평소의 용맹함과 다르게 자신의 명성과 지지자들을 희생시켜 목숨을 부지했다고 합니다. 이때 롱기누스도 희생되었는데, 그는 한 마디 불평도 하지 않은 채 여왕을 불쌍히 여기고, 고통받는 동료들에게 위안의 말을 건네며 조용히 사형 집행자의 뒤를 따랐다고 합니다. 

 

    팔미라의 반란과 몰락

 아우렐리아누스가 로마로 돌아가기 위해 유럽과 아시아 사이의 해협을 건넌 상황에서 팔미라인들이 황제가 남겨 두었던 총독과 수비대를 학살하고 다시 한번 반란을 일으켰다는 보고를 받고 황제는 크게 분노했습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다시 시리아로 출격했고, 팔미라는 분노한 황제의 처분을 받아야 했습니다. 당시 황제의 편지로 미루어보면 노인과 여성, 아이들과 농민에 이르기까지 많은 수의 팔미라인들이 처형당했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황제는 살아남은 팔미라인들에게는 도시를 재건하며 머물도록 허락하였는데, 저자가 살던 18세기에는 제노비아가 통치할 당시 그 아름다웠던 팔미라가 보잘것없는 촌락으로 몰락했다고 합니다. 

 

    이집트의 피르무스의 반란을 진압한 아우렐리아누스

 이집트의 부유한 상인이었던 피르무스는 오다이나투스와 제노비아의 맹우라며 반역을 일으켜 알렉산드리아에 난입했는데, 이곳에서 황제를 사칭하며 동전을 주조하고 칙령을 공포했으며 군대를 일으켰습니다. 피르무스는 아우레리아누스에게는 너무 약한 상대였습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3년도 채 걸리지 않아서 로마의 평화와 질서를 회복시켰다는 점에서 모든 사람들로부터 축하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서기 274년, 아우렐리아누스의 승리

 누구보다 당당하게 축하를 받을 수 있는 아우렐리아누스의 개선식은 성대하게 거행되었습니다. 코끼리 20마리, 용맹한 호랑이 4마리, 각 지역에서 모아 온 200마리 이상의 진귀한 동물들이 행렬의 선두에 섰습니다. 목숨을 건 싸움을 해야 하는 검투사 600명이 그 뒤를 따랐습니다. 
로마 황제의 개선식을 축하하기 위해 먼 나라들의 사절들이 와서 황제의 명성과 권력을 과시해 주었습니다. 그 행렬에는 투항한 갈리아의 테트리쿠스와 팔미라 여왕 제노비아도 있었는데 사람들의 관심은 그 두 사람에게 집중되었습니다. 행렬의 끝은 원로원과 국민, 군대 가운데 가장 저명한 사람들이 장식했습니다. 

 

    테트리쿠스와 제노비아에 대한 아우렐리아누스의 처우

 테트리쿠스와 제노비아는 다른 찬탈자들이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것과는 달리 부유하고 명예롭게 여생을 보낸 것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제노비아는 로마에서 20마일 떨어진 티부르에 있는 멋진 별장을 한 채 받았습니다. 그녀는 로마의 귀부인이 되었고 딸들 또한 귀족 가문과 결혼했다고 합니다. 테트리쿠스 또한 알프스 이북지역을 통치하였는데,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이탈리아의 한 지방을 관리할 것을 제안할 정도로 그와는 우정을 나누는 사이였다고 합니다. 매우 엄격하고 가차 없는 성격인 황제의 마음을 테트리쿠스의 어떤 면이 사로잡았는지 궁금해집니다.

 

    아우렐리아누스의 영광과 신앙심

 새벽부터 시작된 개선식은 저녁 9시가 되어서야 카피톨리누스 언덕에 오르게 되었고, 황제는 늦은 밤이 되어서야 궁전으로 돌아갔습니다. 축제에는 각종 행사가 진행되었고, 국민들에게는 두둑한 상여금이 주어졌습니다. 모든 신전들은 황제가 바친 봉헌물로 찬란하게 빛이 났습니다. 특히 태양전 신전에는 1만 5000파운드가 넘는 황금이 헌납되었는데, 그의 어머니가 태양신을 모신 작은 사원의 하급 여사제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런 이유로 태양신에 대한 각별한 정서가 있었는데, 재위 기간 중 승리를 거둘 때마다 감사함을 느끼며 미신적 신앙은 더욱 깊어졌습니다. 

 

    로마에서 폭동을 진압한 아우렐리아누스 

외부의 전쟁에 몰두하느라 내부의 부패에 신경을 쓰지 못한 아우렐리아누스의 고뇌가 이 한통의 사적인 편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틀림없이 신들이 짐의 일생은 싸움의 연속이어야만 한다고 명한 것 같네. 성 내에서 발생한 소란이 이제는 매우 심각한 내전으로 발전했다네. 성 내에서 발생한 소란이 이제는 매우 심각한 내전으로 발전했다네. 짐이 믿고 재정 업무를 맡겼던 노예인 펠리키시무스의 선동으로 조폐창의 직공들이 폭동을 일으켰다네. 결국 그들은 진압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본래 다키아에 주둔하고 있거나 도나우 강가의 진지에 머무르고 있어야 할 7000명의 병사들이 살해되었네. 

이 일은 개선식 직후에 일어났으며, 불순물이 섞인 악화를, 황제가 양화로 교환해 줌으로써 국가의 신용을 회복했다고 합니다. 
 

    폭동에 대한 고찰

 저자는 폭동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있는데, 그 이유는 정당한 화폐가치를 회복시키려는 정상적인 노력 때문에 폭동이 있었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저자가 판단하기에 이미 아우렐리아누스는 원로원, 기사 계급, 근위대와는 끊임없이 알력을 빚어 왔다는 것입니다. 평민 출신의 아우렐리아누스는 국민들에게는 언제나 애정을 표시했지만, 국가를 운영하는 핵심 세력과는 알력이 있었는데, 화폐 개혁에 대한 폭동은 원래 가지고 있던 불만을 표출하는 도구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원로원과 기사 계급, 근위대의 공모가 없었다면 용맹한 군인 황제에게 대항하지는 못했을 것이라는 합리적인 추측을 하고 있습니다. 

 

    아우렐리아누스의 잔인성

 아우렐리아누스는 엄격한 성격으로 쉽사리 동정심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한 정의에 대해서는 강박적일 만큼 집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악화(불량주화)를 양화로 바꾸어 주어서 신뢰를 회복한 것을 보면 그의 성향을 알 수 있습니다. 다만, 아쉬웠던 것은 융통성이 부족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더구나 개선식이 있고 나서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폭동이 일어났다는 것이 그의 분노를 더욱 자극했습니다. 
 당시의 끔찍한 처벌 현장은 사형 집행인들이 피로에 지칠 정도였고, 감옥은 대만원이었을 정도로 군인 황제답게 무력으로 제압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행동이 원로원들을 불쾌하게 만들었습니다. 승리에 대한 자부심으로 충만해 있는 아우렐리아누스의 군대스타일의 가차 없는 처벌은 오히려 자신에게 독이 되었습니다. 

 

   아우렐리아누스의 동방 진군과 암살 서기· 274년 10월 · 서기 275년 1월

 황제는 발레리아누스 황제를 포로로 잡아서 모욕한 페르시아를 응징하러 다시 한번 전쟁에 나섰습니다. 군대는 유럽과 아시아를 가르는 해협들까지 진격해 갔습니다. 그는 자신의 서기관들 중 한 사람이 직무상 부당 이득을 취했다는 죄목으로 책망했었습니다. 문제는 황제의 성향 상 책망 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서기관은 황제의 필체를 위조해 중요한 장교들의 이름이 들어간 처형명단을 만들었습니다. 처형 명단을 본 장교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황제를 암살하기로 결의했습니다. 결국 황제는 자신을 모시는 최측근들의 손에 의해 암살되었습니다. 융통성 없는 잔인성으로 인해 불운한 운명을 맞이했지만 아우렐리아누스는 개혁 군주로써 대체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로마 제국 쇠망사 1권 11장(2) 요약
서기 270년, 알레만니족과 로마와의 사이에 지켜져 오던 평화 조약에 불만을 품은 알레만니족의 젊은이들이 폭동을 일으켰으나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손쉽게 진압했습니다. 돌아간 줄 알았던 알레만니족이 몰래 이탈리아로 침입하여 밀라노를 파괴했습니다. 3차에 걸친 전투 끝에 아우렐리아누스는 승리를 거두었고 알레만니족의 침입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계속되는 여러 부족의 침입에 대비하게 위해 로마를 요새화 하기 위해 성벽을 건설하게 됩니다. 그는 갈리아와 팔미라 제국을 진압하여 다시 로마에 복속시켰습니다. 다시 반란을 시도한 팔미라에 분노한 아우렐리아누스는 팔미라를 거의 파괴했습니다. 전쟁에서 큰 성과를 이룬 아우렐리아누스는 화려한 개선식을 했습니다. 그러나 개선식 이후 얼마되지 않아 조폐창의 직공들이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이 폭동은 이미 예견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평민 출신의 황제는 원로원, 기사 계급, 근위대와는 끊임없이 알력을 빚고 있었는데 조폐창의 폭동은 도화선이 되었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엄격한 성격으로 처벌을 할 때는 군인 출신 답게 잔인한 면이 있었습니다. 결국 황제는 황제의 처벌을 두려워한 측근의 공모로 암살당하게 됩니다. 그는 개혁군주로써 비교적 유능했던 군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