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쇠망사 1권 11장(1)(에드워드 기번, 윤수인_김희용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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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저서 읽기/로마제국 쇠망사(에드워드 기번, 윤수인_김희용 옮김)

로마 제국 쇠망사 1권 11장(1)(에드워드 기번, 윤수인_김희용 옮김)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치세 · 고트족의 패배 · 아우렐리아누스의 승리 · 개선, 사망 · 제노비아의 성격

로마제국은 발레리아누스의 황제의 사망 후, 갈리에누스 황제 치하에서 황제 참칭자들이 19명이나 나오고 계속되는 야만족들의 침입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는데, 설상가상으로 대기근과 전염병까지 덮쳐 나라가 거의 붕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다행히 로마는 일리리쿰 지역의 몇몇 군주들이 있어서 변경 지대의 방어를 할 수 있었습니다. 

 

이탈리아를 침입한 아우레올루스가 패하고 밀라노에서 포위 공격을 받음 서기· 268년

 분노한 국민들은 모든 재난을 갈리에누스의 탓으로 돌렸는데, 나라의 우환에도 쾌락에 빠져 있는 그의 생활에 분노했기 때문입니다. 결국에는 상(上)도나우 강 지역의 부대에서 아우레올루스를 황제로 칭하였습니다. 그는 알프스를 넘어 밀라노를 점령하고 로마를 위협하여 갈리에누스 황제에게 도전하였습니다. 쾌락에 빠져있던 갈리에누스가 어쩔 수 없이 몸을 이끌고 그와 맞섰습니다. 두 부대는 아다 강의 폰티롤로 다리에서 대치했는데 아우레올루스가 참패하여 밀라노로 후퇴하였습니다. 밀라노는 갈리에누스가 이끈 군대에 의해 난타당했습니다. 
 

 서기 268년 3월, 갈리에누스의 죽음

 아우레올루스는 마지막으로 갈리에누스를 비방하는 글들을 뿌려, 병사들에게 호소했습니다. 아우레올루스의 책략은 어느 정도 효과를 발휘하여 병사들의 동요를 우려한 근위대장 헤라클리아누스와 장교 마르키아누스, 달마티아 수비대 지휘관 케크로프스가 갈리에누스를 죽이기로 결의했습니다. 아우레올루스가 필사적인 출격을 감행했다는 소식을 듣고 갈리에누스도 침상에서 급하게 일어나 공격예상 지점으로 말을 타고 달려갔습니다. 그러나 그는 반역자들에게 둘러싸여 창에 찔렸습니다. 그는 죽으면서 클라우디우스를 후계자로 명하였습니다.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품성과 즉위

로마 제 35대 황제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 [268년 ~ 270년(2년)]

 클라우디우스는 황제가 되었기 때문에 미화된 부분이 있지만 미천한 가문 태생이라고 합니다. 도나우 강 부근의 속주들 중에 한 곳에서 태어났으며, 그는 선대 황제들과 원로원의 신임을 받아 일리리쿰 변경 지대의 총군단장으로 그 지역의 전군에 대한 통수권을 행사했으며, 이집트 군단장, 아프리카 식민지 총독직을 역임했으며, 집정관직을 받기로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그가 여러 번 고트 족을 물리치자 갈리에누스는 불안함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클라디우스는 신중한 성격으로 추측되는데 무심코 갈리에누스에 대한 부정적인 말을 내뱉게 되었고 그 말은 갈리에누스 황제의 귀에 들어갔습니다. 갈리에누스는 화를 내기는 커녕 오히려 클라디우스가 반역을 할까봐 두려워서 클라우디우스가 한 황제에 대한 부정적인 말을 자신이 알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게 차단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클라우디우스에게 비굴한 편지와 함께 상당한 선물을 보냈습니다. 클라우디우스는 황제를 마음에 들어하지는 않았지만, 반역의 마음은 없었고, 실제로 반역의 무리에 가담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아우레올루스의 죽음

 밀라노에 대한 포위 공격이 계속되는 동안, 아우레올루스는 자신의 술책(갈리에누스에 대한 비방글을 뿌림)을 이용해 갈리에누스 황제는 물리칠 수 있었지만, 오히려 더욱 강한 클라우디우스가 적수가 되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클라우디우스에게 동맹과 분권을 하자는 제의를 했는데 클라우디우스는 이렇게 화답했습니다.

그에게 전하라. 그따위 제안은 갈리에누스에게나 했어야 했다고. 아마도 그라면 그따위 제안도 끈기 있게 들어 주고 자기 자신 만큼이나 비열한 자를 동료로 맞아들였겠지.

결국 아우레올루스는 군사법정에서 사형을 언도받았습니다. 원로원은 갈리에누스의 친구와 가족들에게도 가차없는 복수를 가했습니다. 반면에, 클라우디우스는 대사면령을 중재하는 데서 오는 즐거움과 공을 차지했습니다. 
 

클라우디우스의 관대함과 정의

 전임 황제 갈리에누스는 반역에 연루된 사람의 재산을 부하 장교들에게 나누어주곤 했는데, 어느 날 한 노파가 자신 가문의 세습 재산이 갈리에누스의 한 부하 장교에게 넘어간 일이 있다고 하소연 하였는데, 그 부하 장교가 바로 클라우디우스 자신이었습니다. 클라우디우스는 자신의 과오를 고백하고 충분한 손해 배상을 해주었다고 합니다. 
 

군대 개혁을 시도한 클라우디우스

 이전의 사례에서 보면 군대 개혁을 시도하려다가 군대에 의해 살해된 황제가 여럿 있었습니다. 클라우디우스는 이런 위험을 동반하는 군대 개혁을 잘 할 수 있을까요? 자 그럼 클라우디우스는 어떻게 군대 개혁을 했을지 따라가 보겠습니다. 

 이 시기에는 로마의 상황이 안보와 경제적인 면에서 너무 악화가 된 상태였기 때문에 군인들도 자신들의 이득만을 고집할 수 없다는 것을 직면할 수 있도록 클라우디우스가 상세하게 설명하였고, 야만족의 침입에 대해서도 생생하게 묘사해 주었습니다. 제국의 붕괴가 눈 앞에 와있어서 시간을 놓친다면 군대와 국민 모두가 파국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그들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서기 269년, 고트족의 로마 제국 침입

 고트족은 드니에스테르 강 유역에 2000(6000척이라고도 함)척의 함대를 조직해 놓았습니다. 고트족은 외형상 32만 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보스포루스 해협의 맹렬한 해류를 이겨 내지 못하였고, 심지어 배들 끼리 충돌하여 좌초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들이 목표한 곳도 이미 약탈당한 곳이거나, 전투를 해서 ㄹ격퇴당하기도 했습니다. 주력부대는 아토스 산기슭에 정박하여 마케도니아에서 부유한 속주인 테살로니카를 급습했습니다. 그러나 이 공격은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신속하게 접근해오면서 중단되었습니다. 싸움을 좋아하는 고트족은 테살로니카를 포기하고 이탈리아의 최종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 들이닥쳤습니다. 

클라우디우스는 원로원과 국민들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의 비장한 마음을 전달했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상황이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음을 솔직하게 썼지만, 희망은 놓지 않았습니다. 

고트족에 맞서 승리한 클라우디우스 서기 270년

클라우디우스는 불가능할 것 같았던 승리를 이끌어냈습니다. 역사가들의 기록이 불완전하지만 저자가 정리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결전은 다르다니아에 위치한 도시인 나이수스에서 벌어졌습니다. 처음에는 전세가 로마에게 불리하게 돌아갔지만, 클라우디우스의 전술로 고트족 5만 명이 전사했으며, 전선에서 퇴각했습니다. 2. 클라우디우스는 여러 가지 상황으로 하루 만에 고트족을 궤멸시키지 못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전쟁은 여러 속주로 확대되었고, 해상과 육상에서 전투를 치러야 했습니다. 클라우디우스의 탁월한 전략이 없었으면 아마 로마는 패했을 것입니다. 로마가 얻은 전리품은 가축과 노예였습니다. 여자 포로의 수가 엄청났던 것으로 보아 고트족은 정착을 목표로 가족을 동반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3. 로마군은 하나의 원이 되게 초소를 설치하고 고트족을 점점 압박해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결국 하이무스 산에서도 가장 접근하기 어렵다는 지점까지 야만족들을 몰아넣었습니다. 남아 있던 고트족은 그곳에서 혹독한 추위와 배고픔, 전염병으로 죽어갔습니다. 처음의 전투 무리는 거의 전멸했고, 이제 소수의 고트족만이 남아 목숨을 겨우 부지하고 있었습니다.

나이수스(현재 세르비아의 니슈)

 

고트족과 싸우는 클라우디우스 황제(by midjourney)

 서기 270년 3월, 아우렐리아누스를 계승자로 천거하고 사망한 클라우디우스

 2년 간의 치세 후에 클라우디우스는 시르미움에서 전염병으로 사망했습니다. 그는 다음 제위에 오를 적격자로 아우렐리아누스를 지목했습니다. 저자는 클라우디우스에 대해 과장되게 미화가 된 이유는 그의 형 크리스푸스의 증손자인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영향이었다고 합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자신의 가문이 통치권을 행사하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클아우디우스에 대한 지나친 미화를 했다는 것입니다. 
클라우디우스의 사망 이후 그의 동생 퀸틸리우스는 아퀼레이아에서 황제를 사칭하고 원로원의 승인도 받았지만, 아우렐리아누스가 황제의 권력을 부여받았다는 것을 알고 열등감으로 인해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그의 재위 기간은 17일에 불과했습니다.

로마 제 36대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퀸틸루스(270년 17일)
시르미움(현재 세르비아의 스렘스카미트로비치)

아우렐리아누스의 태생과 군 경력

로마 제 37대 황제 아우렐리아누스[270년 5월  ~  275년 10월(5년)]

아우렐리아누스는 시르미움 지역의 소농민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군에서 승진을 거듭하였고, 고트 전쟁 기간 동안에는 기병대 대장이라는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그는 어떤 직책을 맡든지, 뛰어나게 잘해냈다고 합니다. 그는 집정관직까지 했으며, 원로원 위원 울피우스 크리니투스는 그를 양자로 삼아 자신의 딸을 아내로 주었으며, 재산까지 주어 빈곤한 삶에서 벗어나게 해주었습니다.

 

 아우렐리아누스의 성공적 통치

아우렐리아누스의 통치 기간은 4년 9개월에 불과했지만 의미 있는 업적을 많이 이룬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는 고트 전쟁을 끝냈으며, 이탈리아를 침범한 게르만족을 무찔렀고, 황제를 참칭한 테트리쿠스로부터 갈리아, 에스파냐, 브리타니아를 탈환했습니다. 테트리쿠스는 아우렐리아누스와 샬롱에서 대치하게 되었는데, 아우렐리아누스의 위용에 제압당해서 자신과 아들의 신변을 보장하는 조건으로 항복했고, 아우렐리아누스가 약속을 지켜서 테트리쿠스는 이탈리아에서 편하게 여생을 보냈다고 합니다. 황제를 참칭한 경우 대부분은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는데, 약속을 끝까지 지킨 아우렐리아누스도 대단한 것 같습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남편의 뒤를 이어 제노비아가 통치하던 팔미라 제국까지 멸망시켰습니다.

테트리쿠스(참주)_반역대상(아우렐리아누스 황제)

 

아우렐리아누스의 엄격한 규율

그는 전쟁에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병사들에게 도박과 음주, 점술을 금지할 것을 명했습니다. 또한 절도 있고, 검소하며 근면한 생활을 강조했으며, 갑옷, 무기, 군마의 관리도 철저하게 시켰습니다. 그리고  금욕과 금주는 물론 국민들에 대한 약탈이나 요구도 하지 못하게 잘 관리했습니다.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의 계속되는 승전보가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말에서 그의 가치관을 읽을 수 있습니다.

국가의 급여만으로도 그대들이 생활하기엔 충분하다. 재물은 적에게서 빼앗은 전리품으로 모으는 것이지 지역 주민들의 눈물로 부터 모으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처벌에 있어서는 잔인할 정도였는데, 한 병사가 묵고 있는 집주인의 아내를 유혹한 일로 사지가 찢기는 벌을 받았습니다. 
 

고트족과 협상을 체결한 아우렐리아누스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병으로 사망하고, 내전에 대한 우려로 하이무스 산의 여러 관문과 도나우 강 유역을 지키던 군대마저 철수하고 나자, 잔류해 있던 고트족과 반달족 무리들은 이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우크라이나의 정착지를 포기하고 강을 건너온 무리와 기존의 군대가 합류하자 고트족의 병력은 더욱 커졌습니다. 드디어 이들은 아우렐리아누스와 승패도 알 수 없고 유혈이 낭자한 전쟁을 치렀습니다. 이제 두 부대는 그동안의 오랜 싸움으로 서로 지칠대로 지쳤기 때문에 조약을 맺기로 합의했습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중요한 사안인 만큼 군대의 표결에 맡겼습니다. 
 고트족은 로마군에 2000명 규모의 보조군을 제공하기로 약속하는 대신 안전한 후퇴를 보장하고, 자신들이 비용을 대는 조건으로 시장을 열게 해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이 조약은 충실하게 이행되어 고트족이 침범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안전 장치를 하였는데, 고트족 족장들의 아들, 딸들을 볼모로 잡아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고트족의 아들들에게는 무예를 연마하도록 하였고, 딸들은 로마식 교육을 받게 한 후 고위직 관리들과 결혼 시키는 방식으로 두 민족 간의 친밀성을 도모하고자 하였습니다. 

고트족에게 다키아를 양도한 아우렐리아누스

 아우렐리아누스는 다키아로부터 로마군대를 철수시키고, 암암리에 이 지역을 고트족과 반달족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이 결단으로 다키아의 로마인들은 떠나게 되었지만, 결과적으로 도나우 강 남쪽 지대에는 세력과 인구를 충원하게 되어 황폐화 되었던 비옥한 영토를 그들의 노력으로 풍부한 수확물을 내놓게 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고향을 떠나는 것을 고트족과 사는 것보다 더 두려워했던 사람들은 그대로 남아서 고트족에게 여러 가지를 가르쳐주고 알려줌으로써 로마에 이바지 했습니다. 또한 다키아는 독립국가가 되어 북방 야만족의 침입을 막아주는 역할도 했습니다. 이들은 정착하여 로마의 동맹군이 되었습니다. 

 

로마 제국 쇠망사 1권 11장(1) 요약

 갈리에누스에게 반역한 아우레올루스는 전투에서 패하여 밀라노에서 갈리에누스를 비방하는 글들을 뿌렸는데, 그 여파로 갈리에누스가 암살당하기는 했지만, 아우레올루스의 희망과는 달리 클라우디우스가 황제가 되었습니다. 아우레올루스는 클라우디우스와 협상을 하려고 했으나 클라우디우스는 단호하게 거절하였고, 아우레올루스는 결국 사형을 언도 받았습니다. 클라우디우스는 황제로서도 군통수권자로서도 역할을 잘 해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전염병에 걸려 사망하게 되면서 아우렐리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했습니다. 클라우디우스의 동생 퀸틸리우스가 형에 이어 황제가 되려고 했으나, 아우렐리아누스가 후계자로 지명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좌절하여 죽음을 택했습니다. 퀸틸리우스는 원로원의 승인을 받았기 때문에 단 17일었지만 황제로 인정되었습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고트족과의 전투에서 협상을 통해 전쟁을 마무리 하였습니다. 그는 고트족 족장들의 아들, 딸들을 로마에 볼모로 데리고 있었기 때문에 고트족과의 평화는 잘 지켜지고 있었습니다. 아우렐리아누스는 정착지가 필요한 고트족에게 다키아 속주를 넘겨주면서 동맹국의 관계를 유지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