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쇠망사 1권_10장(1)(에드워드 기번, 윤수인_김희용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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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저서 읽기/로마제국 쇠망사(에드워드 기번, 윤수인_김희용 옮김)

로마 제국 쇠망사 1권_10장(1)(에드워드 기번, 윤수인_김희용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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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키우스 황제, 갈루스 황제, 아이밀리아누스 황제, 발레리아누스 황제 및 갈리에누스 황제·야만족의 대규모 침입·30인의 참주들·19인의 실존 참주들

 

서기 248~268년

 필리푸스 황제가 거행한 100년제로부터 갈리에누스 황제의 사망에 이르기까지의 20년 동안은 치욕과 불운의 시대였습니다. 이 시기에 로마 제국의 모든 속주는 야만족의 침입뿐만이 아니라 군인 출신의 참주들에게 까지 시달려야 했으며, 마치 로마 제국의 끝을 볼 것 같은 불안에 휩싸였습니다. 작가는 이 시기에 대한 자료가 많지 않은데다 정확하지 않기 때문에 때로는 자신의 합리적인 추측으로 부족한 부분을 메웠다고 말합니다.
 

 필리푸스 황제

서기 249년, 반란, 승리 그리고 데키우스 황제의 통치

 계속되는 반란으로 황제가 교체되면서 필리푸스 황제 또한 안전하지 않았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서기 249년 여름, 모에시아 주둔 군단들 사이에서 필리푸스 황제에 대한 반란이 일어나서 마리누스라는 하급 장교가 황제가 되는 일이 발생했습니다. 필리푸스 황제도 고르디아누스 3세를 살해하고 황제에 올랐기 때문에 떳떳하지 못한 데서 오는 불안감은 높아졌습니다. 그는 원로원에 이 사실을 알렸고, 원로원 의원 중 데키우스라는 사람이 그 소요사태는 오래가지 못할 것이라고 예측하였고, 그 예언이 현실이 되자 필리푸스는 데키우스를 존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데키우스는 군대에 의해 황제가 되든지 죽음을 택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는 강요를 받았고, 그는 어쩔 수 없이 필리푸스와 황제로서 맞서게 되었습니다. 필리푸스 황제는 데키우스와의 전투에서 전사했거나 처형당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으며, 그의 아들은 로마에 있는 근위대에 의해 처형되었습니다. 데키우스는 원로원과 속주들의 만장일치로 황제가 되었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황제가 되려고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필리푸스에게 친서를 보내 이탈리아에 도착하는 즉시 황제자리를 내놓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합니다. 
 

 서기 250년, 고트족을 향해 진군하는 데키우스

 

로마제국 제30대 황제 데키우스 [249년 9월 ~ 251년 6월 (2년)]

데키우스는 제국을 안정시키는 일에 몇 달을 보내고 있었는데, 고트족이 침입하여 도나우 강 유역으로 진군하게 되었습니다. 고트족은 서로마 제국을 멸망시키는 데 주된 역할을 하였다고 합니다.
 

고트족의 기원

6세기 초 이탈리아 정복 이후, 이탈리아에서 태어나서 동고트 왕들을 모셨던 라벤나 궁전의 수석 장관이던 학자 카시오도루스는 「고트 민족사」에서 불리한 내용은 축소시키고, 성공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부풀렸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동고트에서 정치를 했었기 때문에 왕의 비위를 맞추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책에서 스키타이인들의 아시아 지역에서의 승리까지도 자신들의 업적인 양 꾸며댔다고 합니다.
 고트족의 최초의 발상지는 광활한 스칸디나비아 섬 또는 반도라고 추정되고 있습니다. 고트족의 솜씨로 보이는 여러 유적들을 보면 발트 해 너머 여러 지역에 거주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스웨덴 남부 지역은 고트족 중 호전적이지 않은 고트족들이 일부 남아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18세기에도 동, 서 고틀란드로 나뉘어 있었다고 합니다. 중세에 그리스도교가 전파될 당시에는 고트인과 스웨덴인들은 서로 적대적인 두 집단을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세력이 더 컸던 스웨덴인들은 고트족의 군사적 영광까지도 자신들의 것인양 주장했다고 합니다. 어느 나라나 자신들의 역사를 미화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자유롭지 않은 것 같습니다.

 고트족의 종교

스웨덴의 웁살라에는 스칸디나비아인이 해적질로 포획한 황금으로 장식한 신전이 11세기 말까지 남아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전쟁의 신, 풍요의 여신, 그리고 뇌신이라는 세 주신의 투박한 조각상을 모신 곳이었습니다. 대축제에서는 모든 종류의 동물(인간 포함)이 9마리씩 산 제물로 바쳐졌고, 피가 흐르는 제물들은 신전 부근의 숲에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이런 야만적인 내용은 13세기 무렵 아이슬란드에서 편찬된 일종의 신화 체계인 「에다」라는 책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법령과 전쟁의 신 오딘의 죽음

「에다」에 나오는 인물 중 '오딘'이라는 인물은 전쟁의 신과 스칸디나비아의 위대한 입법가라는 두 개의 존재가 혼동되어 있다고 합니다. 스칸디나비아의 입법가로서의 오딘은 그 곳 사람들에게 적합한 종교를 창시했습니다. 그는 수많은 부족들을 정복했습니다. 그는 몸이 노쇠해지려고 하자 스웨덴과 고트인들로 이루어진 엄숙한 집회에서 아홉 곳의 급소를 찔러 죽어가면서, 자신은 전쟁의 신의 궁전에서 영웅들과의 향연을 준비하기 위해 떠난다고 말하고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오딘에 관한 듣기 좋지만 불확실한 가설

 오딘은 마이오티스 호 연안에 거주했던 야만족의 족장이었습니다. 폼페이우스의 군대가 위협해오자, 그는 분노했지만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것을 알고 자신의 부족을 아시아 사르마티아의 변경 지역에서 스웨덴으로 이끌고 갔습니다. 오딘은 자신의 복수심을 실현시킬 수 있도록 하나의 종교와 민족을 형성해 내겠다는 구상을 펼쳤고, 언젠가는 호전적인 고트족들이 로마를 응징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오딘이 스웨덴으로 이주할 때 고트족이 이미 스웨덴의 남부지역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이 내용은 역사적으로 검증되지 않은 내용이라고 합니다.
 

 

스칸디나비아로부터 프로이센으로의 고트족의 이동

 고트족에게는 문자가 없었기 때문에 이주 시기와 상황에 대한 정확한 설명을 기대할 수는 없다고 합니다. 고트족은 기원전 300년 전에 발트해를 건넜으며, 적어도 서력 기원이 시작될 무렵, 비스툴라 강어귀 쪽에, 훨씬 나중에 토른, 엘빙, 쾨니히스베르크, 단치히 같은 상업도시들이 건설된 비옥한 지방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고트족들의 서쪽 지역에는 수많은 반달족 부족들이 오데르 강 유역 및 포메라니아와 메클렌부르크 연안을 따라 퍼져 있었습니다. 그들의 외모가 비슷해서 본래 하나의 민족이었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세분화된 반달족은 후에 강력한 왕국으로 발전했습니다.

 

프로이센에서 우크라이나로의 이동

 고트족은 안토니누스 황제 시대에 여전히 프로이센 지방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황제치세 무렵에 고트족은 로마의 속주 다키아를 침입했기 때문에 그들이 근접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프로이센(위키피디아)

대략 70년 사이에 발트 해로부터 흑해까지 고트 족의 제2차 이주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동 이유로는 전염병이나 기근, 전쟁, 신들의 신탁 등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당대의 영웅이자 이탈리아의 테오도릭의 10대조인 아말라는 개인적 능력도 탁월했지만, 고트족이 반신반인(半神半人)으로 숭배했던 안세스족의 후손이라는 특전을 최대한 이용했다고 합니다.

고대 후기 민족 대이동(나무위키)

 

다키아, 모에시아(나무위키)

 

행군 중에 늘어나는 고트족

게르마니아인과 사르마티아인의 차이

 고트족의 모험에 고무된 게르마니아의 반달족 국가의 전사들까지 고트족이라는 공동의 가치하에서 싸우게 되었습니다. 이주민들이 프리펙 강 유역에 도달하여 처음으로 만난 사람들은  바스타르나이족과 베네디족이었는데, 이들 부족 중 젊은이들이 강요 또는 선택에 의해 고트족 군대에 편입되었습니다. 전쟁에서 명성을 떨쳤던 바스타르나이족은 게르만족에서 파생되었습니다. 반면에 베네디족은 사르마티아인의 혈통을 지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변경지역에서는 혈통과 풍속이 많이 뒤섞였지만, 흑해 부근에서 보다 순수한 사르마티아 종족들과 마추치게 됩니다. 

 게르마니아인과 사르마티아인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비교게르마니아인사르마티아인
주거정착식 가옥이동식 천막
꼭 끼는 옷헐렁한 옷
결혼일부일처제일부다처제
군사력의 주축보병기병
언어튜턴계 언어슬라브계 언어

 

우크라이나

이제 고트족은 우크라이나 지방을 영유하게 되었습니다. 우크라이나의 자연환경은 부족함이 거의 없이 풍부한 자원을 가지고 있었지만, 게으른 고트족은 관리하여 수확하기 보다 약탈을 되풀이하는 일상을 고수했습니다.

 

로마 속주들에 침입하는 고트족

 고트족이 보기에 동쪽의 스키타이계 유목민들을 정복해서 얻을 이익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이목은 서쪽의 로마에 집중되었습니다. 그때 당시 도나우 강 하류의 요새들은 방만하게 방어되고 있었으며, 모에시아 지방의 주민들은 자신들의 위치가 야만족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생각으로 방비를 게을리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필리푸스 황제 치세 중에 고트족의 잦은 침입을 받으면서 그들의 착각은 깨졌습니다. 
 고트족은 논스톱으로 트니에스테르 강과 도나우 강을 넘었으며, 로마군은 패전의 처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고트족에게 투항했습니다. 하(下)모에시아의 수도였던 마르키아노폴리스의 주민들은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하고 생명과 재산을 구했습니다. 그러나 사막으로 철수한 줄 알았던 고트족의 왕 카니바는 얼마 되지 않아 또 도나우강을 건넜습니다. 그들은 모에시아 속주 전역을 유린하고 있었으며, 7만명의 주력부대와 맞서기 위해서는 로마 황제의 진두 지휘와 병권 행사가 요청된다는 정보가 전달되었습니다.

 

 서기 250년, 고트족 전쟁의 여러 사건들

니코폴리스, 필리포폴리스

 

  데키우스 황제가 니코폴리스에 나타나자 고트족은 포위 공격을 중지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후퇴한 것이 아니고 필리포폴리스를 포위 공격하기 위한 속임수였습니다. 데키우스는 그들을 추격하다 고트족의 왕 카니바의 매복에 공격당해서 허둥지둥 도망쳐야 했습니다. 필리포폴리스는 함락당했고, 10만명의 사람들이 학살당했다고 합니다. 데키우스는 다시 병력을 보충하고, 고트족과 연합하려는 카르피족과 게르만족의 몇몇 무리를 격파한 후, 경계활동에 주력하면서 고트족에게 결정적인 일격을 가해 로마의 영광을 회복하기를 기다렸습니다.
 

 발레리아누스를 대신해 감찰관직을 부활시킨 데키우스

 데키우스는 쇠퇴해가는 로마의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감찰관직을 부활시키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감찰관직 인선을 원로원의 공정한 투표에 맡겼습니다. 만장일치의 호흥으로 발레리아누스가 최적임자로 선포되었습니다. 데키우스는 발레리아누스에게 임명하기 전에 감찰관직의 어려움과 중요성에 관해 알려 주었습니다.
 

실행 불가능하고 효과가 없는 계획

 발레리아누스는 감찰관직의 책무가 너무 광범위고 막중한 데다 이미 쇠퇴해가는 로마에서 그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발레리아누스는 그의 바람대로 전쟁으로 인해 감찰관직을 수행하는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습니다. 국가의 기강보다 당장 고트족을 막아내는 것이 우선이었기 때문입니다. 데키우스는 이 과정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데키우스와 그의 아들의 패배와 죽음

 로마군에 의해 사면에서 포위된 채 추격당하던 고트족은 이제 안전한 퇴각을 바라고 있었으나, 데키우스는 북방 민족들에게 교훈을 심어주기 위해 어떠한 화해 조건에도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호전적인 고트족은 노예가 되느니 필사적으로 싸우기로 결심했습니다. 전투 중 데키우스 황제의 아들이 화살에 맞아 죽었습니다. 데키우스는 군인 한 사람의 죽음이 공화국에 그리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고 훈계하고 전의를 가다듬었습니다. 고트군의 제 1선과 제 2선이 무너졌으나, 제3선은 늪지대로 로마군에게는 불리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결국 로마군은 참패를 당했으며, 데키우스는 전투에서 최후를 맞았으며 그의 시신은 찾을 수 조차 없었습니다. 그의 나이 50세였습니다. 그는 전시에서든 평화시에서든 훌륭한 본보기에 견줄만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데키우스 황제의 죽음( Peter Paul Rubens)

 

서기 251년 12월, 황제로 선출된 갈루스

서기 252년

 데키우스 황제의 작렬한 죽음으로 로마 군단은 다른 때와는 다르게 제위 계승권에서 원로원의 결정을 따르기로 했습니다. 데키우스 황제를 배려하는 차원에서 그의 유일한 아들 호스틸리아누스에게 황제의 칭호가 주어졌으나, 갈루스에게도 실질적인 권한과 함께 동일한 지위가 주어졌습니다. 
 황제가 해야 할 시급한 책무는 일리리쿰 속주들을 고트족의 압박으로부터 구해 내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갈루스는 쉬운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고트족의 귀향을 위해 편의를 제공했음은 물론 전리품과 수많은 포로들까지 포기했습니다. 또한 고트족이 로마 영토를 침범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해마다 거액의 금품을 지불하겠다는 약속까지 해버린 것입니다.
 

매년 공물을 납부함으로써 평화를 손에 넣었던 갈루스

대중의 불만

 로마가 속국들에게 궁핍함과 공적을 포상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하사품을 내려주는 경우는 있었으나, 적국에게 공납금을 바치기는 것은 국민들에게 수치스럽고 불평등한 조공 조항으로 여겨졌습니다. 이런 이유로 갈루스는 국민들로부터 경멸과 혐오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공동 황제로 있었던 호스틸리아누스의 죽음도 전염병이 원인이 아니라 갈루스의 범행일 수도 있다는 의심을 받았습니다. 
 

서기 253년, 아이밀리아누스의 승리와 반란

서기 253년 5월, 버림받고 살해당한 갈루스

 

로마 제국 제 31대 황제 트레보니아누스 갈루스 [ 251년 6월 ~ 253년 8월 (2년)]

 로마인들은 자신들의 명예를 희생시켰음에도 속주 일리리쿰의 평화가 보장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더욱 분노했습니다. 야만족들은 고트족의 승리에 고무되어 속주들을 약탈하고 있었고, 로마는 무기력하게 당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이때 판노니아와 모에시아의 총독인 아이밀리아누스가 군대를 재정비하여 야만족들을 쫓아내고, 고트족에게 주려고 모아 두었던 공납금을 병사들에게 상여금으로 나누어줌으로써 병사들의 지지를 얻어 황제로 추대되었습니다. 
 환락에 빠져 살던 갈루스는 반란이 일어난 것을 알고 출격하여 스폴레티움 평원에서 아이밀리아누스와 대치했습니다. 그러나 갈루스 황제 휘하 병사들은 아이밀리아누스의 용맹함에 매료됨과 동시에 모든 탈영병들에게 봉급을 대폭 인상해주겠다는 조건에 넘어갔고, 갈루스와 그의 아들 볼루시아는 살해당했습니다. 원로원은 아일리아누스의 권리를 법적으로 승인했습니다. 아이밀리아누스는 원로원에 보낸 편지에 자신은 장군이라는 신분에 만족하면서 야만족으로부터 로마를 구해 낼 것이라고 썼고, 원로원은 그의 겸손을 추켜세웠습니다.

로마 제국 제 32대 황제_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아이밀리아누스[ 253년 6월 ~ 253년 9월 (4개월)]

 

발레리아누스가 갈루스의 죽음에 복수하고 황제로 승인됨

서기 258년 8월

 

로마 제국 제 33대 황제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발레리아누스[ 253년 9월 ~ 260년 6월 (7년)]

그러나 새 황제 아이밀리아누스의 재위기간은 4개월로 끝이 났습니다. 갈루스의 명령으로 게르마니아 주둔 군단들을 구원군으로 불러오기 위해 파견되었던 감찰관 발레리아누스가 돌와왔기 때문입니다. 열과 성을 다해 임무를 수행했지만 자신의 주군을 지킬 수 없었던 발레리아누스는 복수를 결심했습니다. 아이밀리아누스는 갈루스 황제와 대치했던 스폴레티움 평원에서 이제는 발레리아누스와 대치했습니다. 발레리아누스의 인격과 군대의 크기에 위압감을 느낀 아이밀리아누스의 군대는 얼마 전에 자신들이 선택한 황제를 자신들의 손으로 살해했고, 발레리아누스는 주군의 복수를 한 인물로 인정받아 떳떳하게 황제가 될 수 있었습니다.

스폴레티움(이탈리아의 중부도시)by 위키백과

발레리아누스의 품성

서기 253~268년, 발레리아누스와 갈리에누스 치세의 전반적인 불행

 

야만족들의 침입

 

로마 제국 제 34대 황제 갈리에누스[253년 9월 ~ 268년 9월 (15년)]

 발레리아누스가 전폭적인 지지로 황제가 되었을 때의 나이가 60세였습니다. 그는 국가의 고위직들을 역임하였으며, 귀족 출신이면서도 온후하고 흠잡을 데 없는 인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만약 지금으로 치면 국민투표를 했어도 발레리아누스가 황제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노년기에 접어들었고, 예전의 총명함이나 활력은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당시에는 로마가 야만족들의 침입을 받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군주보다 장군을 필요로 하는 시기였습니다. 그는 젊고 활동적인 공동 황제와 황제의 권한을 분담하기로 약속했는데, 아쉽게도 현명한 선택을 하는 대신 자신의 아들인 갈리에누스를 선택했습니다. 이때는 로마가 외부 침입에 시달리고 있던 때여서 어느 때보다 현명한 지도자가 필요했던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에 로마에게 위협적이었던 적은 프랑크족, 알레만니족, 고트족 그리고 페르시아인이었습니다.
 

프랑크족의 기원과 연맹

 1. 프랑크족의 조상들에 대한 기록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합리적인 진실에 가까운 견해는 다음과 같습니다. 프랑크족은 240년경 라인 강 하류 및 베제르 강 유역의 옛 주민들이 프랑크족이라는 이름 아래 하나의 새로운 연합체를 형성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프랑크(Franks), 즉 자유민(Freemen)이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지켜 나갔습니다. 프랑크족의 연맹체는 모든 주가 각기 독립적인 주권을 유지한 채, 최고 수뇌나 대표자 회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공통의 목적을 위해서는 연맹 주들과 협의하는 헬베티(스위스)연맹과 비슷한 것 같으나, 헬베티 연맹은 안정적으로 200년간 평화라는 보상을 주었으나, 프랑크족은 변덕스러운 기질, 약탈 욕구, 엄숙한 조약까지도 무시하는 태도로 인해 헬베티 연맹과는 다른 결과를 낳았습니다. 
 

프랑크족의 갈리아 침입

 로마의 속주인 갈리아가 대담한 용맹을 지닌 하(下)게르마니아의 가공할만한 위협을 받게 되자, 발레리아누스의 아들이면서 공동황제인 갈리에누스의 출정이 요구되었습니다. 황제와 그의 어린 아들 살로니누스가 트레브 궁정에 머무르는 동안, 포스투무스 장군이 황제의 군대를 훌륭하게 지휘하였습니다. 포스투무스는 게르만족의 정복자나 갈리아의 구원자로 평가받을 정도로 전쟁에서 명성을 높였던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프랑크족의 에스파냐 약탈

자연에 의한 방벽이 되었던 라인 강이나 피레네 산맥조차도 프랑크족의 침입에는 당해낼 수 없었습니다. 에스파냐는 프랑크족에 의해 갈리에누스 황제 치세의 12년동안의 전투로 인해 수도 타라고나가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더 이상 약탈할 것이 없게 되자, 프랑크족은 예스파냐의 몇몇 항구에서 선박들을 빼앗아 마우리타니아로 갔습니다. 아프리카 대륙의 마우리타니아에서는 처음 본 야만족인 프랑크족들의 광포함에 경악했습니다.

 

로마 제국 쇠망사 1권 10장(1) 요약

고르디아누스 3세를 살해하고 황제가 된 필리푸스는 군대가 선택한 황제 데키우스와의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새롭게 황제가 된 데키우스는 고트족과의 전투로 사망했습니다. 이 죽음은 로마 제국 최초로 황제가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사건이었습니다. 데키우스의 죽음으로 그의 아들 호스틸리아누스와 갈루스가 공동 황제가 되었으나, 호스틸리아누스는 전염병으로 사망했습니다. 고트족으로부터 계속된 공격을 받았던 갈루스는 고트족과의 협상에서 로마에 침입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조공까지 바치기로 했습니다. 이러한 협상은 로마 국민을 분노하게 했습니다. 이때 판노니아와 모에시아의 총독 아이밀리아누스는 무기력한 로마를 대신해 고트족을 물리쳤고, 고트족에게 주려고 모아둔 공납금을 병사들에게 나누어줌으로써 인기를 얻어 갈루스를 무찌르고 황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갈루스의 명령으로 게르마니아 속주에서 지원군을 불러온 감찰관 발레리아누스가 나타나자 병사들은 발레리아누스에게 매료되어 아이밀리아누스를 살해하고 발레리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했습니다. 황제가 되었을 때 이미 60세가 된 발레리아누스는 젊은 황제와 공동으로 로마를 통치한다는 약속을 했는데, 세습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로마가 어려운 시국에 자신의 아들을 공동황제로 승인하는 어리석은 선택을 했습니다. 그 당시 쇠퇴해가고 있던 로마는 여러 야만족으로부터 계속적으로 위협을 받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