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 수에 따른 병력의 비율에서 유능한 정치가들이 말한 바로는 한 국가의 군사력은 인구의 100분의 1을 넘지 않아야 한다고 합니다. 같은 규모의 군대라고 하더라도 군대의 영향력은 군대가 얼마나 능동적인 힘을 소유하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보고 있습니다. 당시 기준으로 1만이나 1만 5천 명의 근위대만 있으면 로마의 군중이 몰려나와도 통제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근위대_로마 제국의 근위대도 1만 5천을 넘지 않았다고 합니다. 처음 근위대가 창설된 것은 초대 황제였던 아우구스투스 때였습니다. 그는 군사력이야말로 자신의 통치권을 지켜주는 수단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근위대에 급여를 2배로 주고 특전을 부여하고 특별한 애정을 쏟으면서 원로원을 위협하고 반란을 초기에 진압하려는 목적을 달성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막강한 근위대에 로마 시민들이 경각심과 반감을 갖게 되자 3개 대대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이탈리아의 인근 도시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이런 시스템은 50년 동안 지속되었습니다.
그런데 티베리우스 황제는 이탈리아 주변 도시들의 군사적인 부담을 덜어 주고 근위대의 기강을 바로잡는다는 명분 하에 모든 근위대를 로마로 불러들이고 도시 전체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곳에 병영을 설치하여 요새화했습니다.
근위대의 힘과 자신감 _ 근위대는 종종 자신들의 존재의 이유를 망각하고 왕좌를 위협하는 세력이 되기도 했습니다. 근위대는 황제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었기 때문에 누구보다 실체를 잘 알 수 있었고 그만큼 황제에 대한 경멸과 실망도 컸습니다. 근위대는 수도 로마에서 호화롭고 나태한 생활을 하였고, 자신들의 힘에 대한 자만심이 커졌습니다. 황제들은 근위대의 비위를 맞춰야 했으며, 급기야 새로운 황제가 즉위할 때마다 근위대에 하사금을 내리는 것이 합법적인 형태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근위대의 그럴듯한 주장들_근위대는 공화정의 순수한 원칙에 따르려면 새 황제를 임명할 때 자신들의 동의를 반드시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집정관, 군대의 지휘관, 행정관을 선출할 권리를 원로원에 뺏기긴 했지만, 고대에는 시민의 권리였고, 자신들은 시민의 진정한 대표자라는 주장을 했지만, 그 논리에는 결함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근위대의 무력에 기반한 주장을 반박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제위를 팔려고 내놓은 근위대_ 황제 페르티낙스의 살해를 주도했던 근위대장 라에투스는 국민들의 분노가 두려워서 사라졌고, 근위대에 지도자는 없었습니다. 믿기 어려운 일이지만 황제의 장인이자 로마 총독이었던 술피키아누스는 앞에서는 국민들의 분노를 가라앉히려는 노력을 하는 액션을 취했지만, 뒤에서는 황제 자리를 근위대와 흥정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더 놀라운 일은 더 많은 보상에 눈이 먼 근위대가 방벽 위에서 황제 자리를 공매에 부치는 엽기적인 행동을 했다는 점입니다. 최고액을 제시하는 사람에게 황제 자리를 낙찰시키겠다는 것입니다. 이제 로마의 어두운 그림자는 근위대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서기 193년 3월, 근위대로부터 제위를 사들인 율리아누스
근위대의 행동에 로마 전체가 슬픔과 부끄러움과 분노에 휩싸였습니다. 그때 나랏일에는 별 관심도 없는 율리아누스라는 노인이 가족들의 허영심에 힘입어 술피키아누스가 흥정을 벌이고 있던 근위대 병영으로 찾아가 가격을 흥정했습니다. 술피키아누스는 근위병 한 명당 5000드라크마 (160파운드 이상)를, 율리아누스는 6350드라크마(200파운드 이상) 를 제시했습니다. 결국 율리아누스가 낙찰자가 되어 황제로 선언되었습니다. 허영심과 재물에 눈이 먼 근위대에게 체면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원로원의 승인을 받은 율리아누스_아무 힘도 없었던 원로원은 어쩔 수 없이 가식적인 표정으로 율리아누스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제국의 모든 권력을 그에게 위임했습니다. 율리아누스는 궁전에서 페르티낙스의 시신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그의 초라한 저녁상에는 코웃음을 치며 성대한 만찬을 준비시켰고, 늦은 밤까지 도박과 춤을 즐기며 향락에 빠져들었습니다. 아마도 페르티낙스 황제는 국고를 채우기 위해 본인의 생활도 소박하게 꾸려갔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모두 물러가고 혼자가 된 율리아누스는 갑자기 일어난 일들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대중의 불만_ 율리아누스는 황제가 되었지만, 그를 추대한 근위대조차 수치스러워 하는 황제였습니다. 귀족들은 자신들의 안전때문에 황제에 대한 불만을 함부로 나타낼 수 없었지만, 숫적으로 우세한 국민들은 대놓고 불만을 토로하였습니다. 심지어 변경을 지키는 군단들에게 로마의 존엄성을 찾아줄 것을 소리 높여 요구하기까지 했습니다.
브리타니아, 시리아, 판노니아의 군대가 율리아누스에게 선전 포고함
페르티낙스 황제는 생전에 여러 속주들을 통치했었는데, 그중에서 브리타니아, 시리아, 일리리쿰 주둔군은 그의 죽음을 특히 슬퍼했다고 합니다. 이런 반응을 보면 지도자로서의 페르티낙스의 품성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로마에서 벌어진 일들을 듣고 경악했으며, 만장일치로 반란을 일으키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군인들의 분노와는 달리 각 군단의 군단장이었던 클로디우스 알비누스, 페스켄니우스 니게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페르티낙스 황제의 복수보다는 그의 제위를 계승하는 일에 더 큰 관심을 두고 있었습니다. 이 경험 많고 유능한 군단장들의 야망은 새로운 갈등을 예고했습니다.
브리타니아의 클로디우스 알비누스
클로디우스 알비누스는 명문가 출신이라는 점에서 경쟁자들에 비해 우위에 있었습니다. 그의 인간성을 비하하는 평가도 있지만, 이는 경쟁에서 이긴 세베루스 황제 치하의 어용작가들이 내린 평가이기 때문에 그 진의를 알 수는 없다고 합니다. 어쨋든 그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의 신임을 받았다는 것으로 보아 그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조작되었을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알비누스는 폭군이었던 콤모두스로부터 부황제가 되어 반역 음모자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해달라는 비밀편지를 받은 적이 있었는데, 두 가지 이유로 정중하게 거절했다고 합니다. 첫째는 제의를 받아들인다면 황제의 질시의 대상이 될 수 있고, 두 번째로는 만약에 황제에게 문제가 생길 경우 자신이 연루될 수 있는 위험 때문이라고 합니다.
황제의 암살 소식에 군대를 소집한 그는 열렬한 연설을 통해 지지를 얻었고, 로마에서도 은밀한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는 아우구스투스나 황제라는 거창한 이름은 거부하고, 갈바의 예를 모방해서 스스로를 원로원과 국민의 대리인으로 칭하는 겸손을 보였습니다.
시리아의 페스켄니우스 니게르
페스켄니우스 니게르는 자수성가하여 시리아 총독까지 오른 인물이었습니다. 시리아 총독은 많은 재산을 모을 수 있었고, 위기시에는 황제의 자리까지 넘볼 수 있는 요직이었습니다. 그는 속주민들의 사랑도 받았고, 병사들의 존경도 받은 인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경쟁 없이 황제 자리에 오를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희망으로 안티오크의 사치스러운 분위에 적어 안일하게 보내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세베루스는 열심히 단계를 밟아가고 있었습니다.
판노니아와 달마티아_도나우 강과 아드리아 해 사이를 차지하고 있었던 판노니아와 달마티아는 로마에 최후까지 저항했을 만큼 용맹스러운 나라였습니다. 그 지역의 젊은이들은 도나우 강 유역에 주둔한 군단들에 끊임없이 병력을 공급하는 역할을 담당했으며, 이들이 소속된 군단은 게르마니아, 사마르티아와의 계속되는 전투에서 가장 뛰어난 군단으로 존경받았습니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서기 193년 4월, 판노니아 군단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를 황제로 선포함
이 막강한 판노니아 군대를 지휘하고 있었던 군단장은 야심 많은 아프리카 태생인 세베루스였습니다. 페르티낙스 황제의 복수를 선언했으며, 율리아누스의 낙찰가인 200파운드 보다 2배 많은 400파운드의 하사금을 병사들에게 약속했습니다. 그는 병사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고, 결국 오랫동안 마음 깊이 염원해 온 황제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세베루스가 이탈리아로 진군함_ 어리석은 율리아누스 황제는 황제 자리를 지키기 위해 시리아 총독만을 방어하면 될 거라는 오판을 했습니다. 그 사이 막강한 판노니아 군단이 빠른 속도로 진군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자 자신의 파멸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했습니다. 세베루스는 알프스를 너머 이탈리아 도시들을 통과했으며 아드리아 해의 함대와 라벤나도 자신이 손아귀에 넣었습니다. 이제 그는 로마까지 고작 250마일을 남겨놓고 있었습니다.
율리아누스의 고민_ 어리석은 황제 율리아누스도 나름대로 방비를 했으나 판노니아의 막강한 부대가 진격해온다는 소식은 근위대마저 두려움으로 떨게 했습니다. 평소 해이해졌던 근위대는 전투력이 형편없었으며, 원로원은 율리아누스의 곤경과 허약성을 은근히 즐기고 있었습니다.
율리아누스의 자신 없는 행동_ 율리아누스는 세베루스를 저지시키려고 갖은 노력을 했으나 뾰족한 수가 없었습니다.
근위대에게 버림받은 율리아누스
서기 193년 6월, 율리아누스는 원로원의 명령으로 유죄 선고를 받고 처형당함
세베루스는 600명의 정예 병사들을 선발해서 24시간 자신을 경호하도록 했습니다. 그는 무서운 속도로 로마를 향했으며, 자신을 저지하려는 군대와 사절들까지 자신의 편으로 만들면서 로마에서 70마일 떨어진 인테람이아에 도착해서애 짧은 휴식을 취했습니다. 그는 유혈 사태 없이 황제에 오르고 싶었기 때문에 근위대가 페르티낙스를 죽인 살인자들을 넘겨준다면 죄를 묻지 않겠다고 하였고, 근위대는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원로원은 발빠르게 세베루스를 황제로 인정함과 동시에 페르티낙스 황제를 신으로 추대할 것, 율리아누스 황제의 폐위와 처형을 선언했습니다. 율리아누스 황제는 황제가 된 지 66일 째 되는 날 참수당했습니다.
세베루스의 빠른 행군은 풍부한 군수물자, 도로 발달, 엄격한 군대 규율, 속주들의 굴종적인 성향을 추측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근위대의 치욕_ 세베루스는 근위대의 배신과 비겁을 호되게 꾸짖고 불명예스러운 해체를 명했습니다. 그는 만약의 불상사를 대비해 근위대의 무기를 없앴습니다. 근위대는 수도에서 100마일 이상 떨어진 곳으로 추방당했으며, 불복종할 때는 사형을 시키겠다는 협박을 당했습니다.
페르티낙스의 장례식과 신격화_ 페르티낙스의 추모의식을 훌륭하게 치렀습니다. 그러나 그는 더 중요한 일, 즉 강력한 경쟁자들을 물리쳐야 했기에 30일이 지난 후 로마를 떠났습니다.
니게르와 알비누스에 맞서 세베루스가 승리함_ 한 역사가가 세베루스를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비교한 적이 있다고 하는데, 작가 기번은 동의하지 않고 있습니다. 작가는 세베루스에게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처럼 영혼의 탁월성, 관대하고 온화한 인품, 다양한 방면의 천재성 등을 찾아볼 수 없다고 평가했습니다. 즉,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비교하기에는 세베루스가 거의 모든 면에서 뒤떨어진다고 보고 있습니다.
세베루스가 카이사르와 비슷한 점이 있다면 4년이 채 안되는 기간 동안 동방과 서방을 모두 굴복시켰다는 점을 들 수 있습니다.
두 차례 내전의 지휘, 세베루스의 술책_작가는 아무리 세베루스의 행동에 정치적인 면책특권을 부여한다고 하더라도 정당화되지 않을 거라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는 배신과 뒤통수치기 등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어떠한 신의도 지키지 않는 파렴치에 가까운 인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작가가 왜 이런 평가를 했는지 따라가 보겠습니다.
니게르에 대한 술책_ 세베루스는 니게르의 명성과 군사력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는 니게르를 공격하러 갈 때 선전포고도 없이 원로원과 국민들에게는 동방 속주들을 재정비하러 간다고 속이고 공격에 나섰습니다. 니게르의 아들들은 세베루스의 손에 맡겨져 로마에 억류되어 있었는데 니게르가 파멸하자 추방했다가 처형했습니다.
알비누스에 대한 술책_세베루스는 자신이 동방에서의 전쟁에 몰두하고 있을 때 브리타니아 총독이 비어 있는 왕좌를 차지할까봐 걱정했습니다. 세베루스는 알바누스에게 부황제라는 지위를 주는 것과 니게르를 물리친 사실을 쓴 편지를 써서 전령을 통해 전달하면서, 알바누스에게 개별 면담을 요청해서 단검으로 찔러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이 음모는 발각되었고, 분노한 알비누스는 대서양을 건너 대륙으로 진군했습니다. 그러나 알비누스는 막강한 군대와 맞서 승산없는 싸움을 벌여야 했습니다.
내전의 결과_ 15만의 로마 병사들과 싸운 리옹 전투는 알비누스의 패배로 끝났습니다. 용감한 브리타니아 군단은 일리리쿰 군단과의 대결에서 대등한 실력을 보여주었고, 전세가 세베루스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듯 했으나 세베루스의 노력으로 전세는 극적으로 역전되어 세베루스의 승리로 전쟁은 끝이 났습니다.
한 번 또는 두 번의 전투로 결정된 내전_ 작가는 공화정 시대의 군인들은 대의 명분에 의해서 싸웠는데, 군주제에서는 황제를 선출하기 위해서만 싸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군단들은 대의명분보다 돈에 의해 움직였습니다. 속주민들 또한 누가 황제가 되는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누가 되든지 결과를 받아들였으며 자신들에 대한 관용과 온정을 탄원하는 데만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비잔티움에 대한 포위 공격_ 비잔티움에서는 예외적으로 병사들이 3년 동안 도시를 방어했고, 니게르가 죽은 후에도 그에게 충성을 바쳤습니다. 니게르의 부하들은 사면의 혜택도 포기하고 몸을 던져 싸웠습니다. 부하들의 행동을 보면 니게르가 어떤 인품이었는지 짐작하게 됩니다.
결국 비잔티움은 굶주림으로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역사가 디오는 세베루스의 복수로 비잔티움의 성벽이 파괴되었는데, 야만족들을 방어할 요새를 파괴했다고 비난했습니다. 실제로 고트족 함대가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과해 지중해 한복판까지 진출한 사건이 있었다고 합니다.
니게르와 알비누스의 죽음, 내전의 잔혹한 결과_니게르와 알비누스는 둘 다 전쟁터에서 도망치다가 잡혀서 처형되었습니다. 세베루스는 시리아와 브리타니아의 속주들의 주요 인물들을 처형하고 추방했습니다. 지나치게 많은 사람을 죽였고, 재산을 몰수했습니다. 동방의 도시들은 니게르에게 바치던 세금의 4배를 세베루스 황제에게 바쳐야 했습니다.
원로원에 대한 세베루스의 증오_세베루스는 알비누스를 지지했던 원로원을 존중하는 척 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증오하고 있었습니다. 명문가 출신인 알비누스에 대한 열등감도 작용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는 알비누스를 지지했던 35명의 원로원 의원들을 사면하여 관용을 베푸는 것 같았지만 동시에 41명의 의원들을 처형했습니다. 그는 관대해지려면 먼저 잔인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면서 자신의 잔인성을 합리화했습니다.
세베루스 통치의 지혜와 정의
전반적인 평화와 번영
세베루스는 로마를 자신의 사유 재산으로 생각해서 자신의 재산을 관리하는 일에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부정부패를 시정했으며, 사법권에 있어서도 가난한 자와 약자 편을 들어주는 인정을 제외하고는 공평하게 집행되었다고 합니다. 이는 고귀한 품성에서 비롯 되었다기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들의 자존심을 눌러서 모든 국민들에게 자신을 의지하게 만들려는 계산에서 비롯된 행동으로 보고 있습니다. 또한 곡물을 비롯한 생필품을 후하게 배분했기 때문에 국민들로 부터 애정을 얻었다고 합니다. 세베루스의 국가 운영으로 로마 제국은 평화 상태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군사 규율의 완화_세베루스는 군단의 오만함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군인들은 금반지를 낄 수 있었으며, 병영에서 처와 함께 살 수 있도록 하였고, 급여수준을 높게 인상했으며, 때마다 후한 하사금을 받게 되어 일반국민보다 우월한 지위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세베루스는 군에 대한 지나치게 관대한 처사로 군기가 해이해졌음을 자각하고 있었지만 통제하기엔 역부족이었던 것 같습니다.
근위대의 새로운 편제_ 세베루스는 황제가 되고 나서 근위대를 해산시켰지만 근위대가 반드시 필요했기 때문에 새로운 방식을 도입하여 종래의 4배 규모의 근위대로 재조직했습니다. 세베루스는 근위병에 이탈리아 청년들을 제외시켰으며 변경 지대의 군단에서 차출된 병사로 구성되었습니다.
그는 새롭게 구성된 5만의 근위대가 있으니 이제 로마에서 반란의 희망은 영원히 사라졌다고 생각하며 만족해했습니다.
이제 근위대장은 군사 독재 제국 내에서 가장 중요한 공직이 되었고, 재정부와 사법부의 장관까지 겸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황제와 함께 로마 제국을 자신의 손바닥 안에서 쥐락펴락할 수 있는 막강한 권력을 쥐게 된 것입니다. 심지어 행정 각 부서에서 근위대장이 황제를 대리했고, 황제의 권력을 대신 행신했습니다.
무한 권력을 즐겼던 첫 번째 근위대장은 플라우티아누스였습니다. 그의 권력은 10년 동안 지속되었고, 그의 딸과 황제의 장남은 결혼했습니다. 그러나 너무 막강한 권력이 그에게는 화근이 되었습니다. 주위에서 반란을 부추긴 것입니다. 결국 세베루스 황제는 그의 처형에 동의해야 했고, 후임자에는 파피니아누스라는 저명한 법률가가 근위대장에 임명되었습니다.
군사 독재의 억압을 받은 원로원_황제가 되기까지 군인으로 살았던 세베루스는 황제와 군대의 완충작용을 하는 원로원 존재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세베루스는 원로원의 권위로 위장하는 제스처마저도 취하지 않고 독단으로 행정권과 사법권을 행사했습니다.
황제의 권력에 대한 새로운 금언들_원로원은 군사독재 아래서 자신들을 보호해 줄 장치가 없는 상태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공화정 때의 미덕은 사라지고 절대 군주제라는 새로운 형식에 예속되고 있었습니다. 속주들은 공화정 체제에 대해 알지 못했고 안다고 해도 그 체제를 증오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화정의 원칙들은 차차 철폐되었습니다.
세베루스 황제 치세에서 원로원 의원들은 동방의 속주들에서 온 화술 좋은 노예들로 채워졌으며, 절대군주제에 익숙했던 그들은 황제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의 의무를 국민들에게 주입시켰습니다. 이제 세베루스는 제국을 개인의 세습 재산으로 처분할 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때 절대 군주제와 밀착해온 로마의 법률학은 완성기를 맞이했습니다.
세베루스 황제 통치 하의 동시대인들은 그가 초반에 했던 잔인한 행동을 용서했지만, 후손들은 그를 로마 제국의 쇠망을 초래한 주범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1권 5장 요약]
파르티낙스 황제가 근위대에 의해 살해된 후, 공매에 부쳐진 황제 자리를 차지한 율리아누스는 66일 동안 불안한 황제 자리를 지켰으나 세베루스가 새황제가 된 후 처형되고 맙니다.
브리타니아, 시리아, 판노니아 총독들은 파르티낙스에 대한 복수를 선언하고 군대를 동원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황제가 되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혔습니다.
황제가 되려는 세력다툼에서 판노니아 총독인 세베루스가 승리하였고, 승리한 그는 군사독재를 기반으로 절대군주제를 확립시켰습니다.
기존의 근위대는 해산되어 변두리 지역으로 추방되었고, 원로원 의원도 대부분 처형되었으며, 그 자리를 속주민들로 채워 넣었습니다.이제 말 잘듣는 속주민들이 주요 요직을 차지하자 세베루스 황제는 로마 제국을 자신의 사유재산으로 여겨 세습하려는 야심을 드러냈습니다.
세베루스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지만 군사 독재 하에서 나온 평가는 대체로 미화된 부분이 많지 않을까 생각되었습니다.
후세들이 로마 쇠망의 주범으로 그를 지목한 것은 속주민들을 끌여들여 절대 군주제를 확립하였고, 공화정의 미덕을 말살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독재는 개인의 자유와 창의성을 말살하는 정치체제라는 것을 역사를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