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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누스 가(家) 황제들 시대의 로마 제국의 정치 체계
군주정의 개념
군주정이란, 모든 통솔권이 한 사람에게 위임되어 있는 국가의 정치체계를 의미합니다.
국민들의 감시가 부족하면 통솔권자는 독재자가 될 수 있습니다.
성직자는 권력자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으나, 저자는 귀족과 평민이 자유를 유지하는 방법은 무기를 소지하고 재산을 지키며 입헌 의회를 소집하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아우구스투스의 입장
로마는 악티움 해전에서의 승리 이후 옥타비아누스의 독재가 시작되었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조카이자 양아들이 되었고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받게 됩니다.
황제가 된 그는 20년간의 내전 동안 유혈사태와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대중들은 폭군에 의한 귀족들의 수난을 즐겼으며 일인 독재를 바랐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대중의 관심을 빵과 오락으로 유도했습니다. 이탈리아의 부유층은 평화와 안정을 즐겼으며, 이로 인해 원로원의 권위는 사라졌고 귀족 가문들이 소멸되었습니다.
아우구스투스의 원로원 개혁
아우구스투스는 아그리파와 함께 의원 명단을 검토한 후, 부족한 의원을 제명하고 200명 가까운 의원에게는 사임을 압박했습니다. 또한, 기존의 귀족을 정리하고 1만 파운드 이상의 재산을 소유한 자로 새로운 귀족 가문을 만들었습니다.
강탈했던 권력에서 물러나는 아우구스투스
아우구스투스는 재정비된 원로원 앞에서 자신의 욕망은 숨긴 채 애국심만을 강조한 연설을 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행동은 양아버지였던 카이사르의 복수를 위해서 불가피한 선택(유혈사태와 폭력)이었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이제 자신의 의지대로 국가를 운영하게 되었으니 원로원과 국민에게 과거의 권리를 모두 돌려주겠다고 선언했으며, 자신은 공화국이 누리게 된 축복을 함께 누리는 것만이 바라는 바라고 말했습니다.
황제 또는 총지휘관의 칭호로 권력을 되찾은 아우구스투스
아우구스투스는 사임을 바란다고 했으나, 속으로는 권력에 대한 야심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원로원은 그의 야심에 편승하여 그가 통치해 줄 것을 간청했습니다. 교활한 그는 마지못해 받아들이는 척하면서 프로콘솔(속주총독)과 임페라토르(총지휘관)라는 이름으로 속주의 통치권과 로마 군대의 총 지휘권을 받아들이기로 동의했습니다.
로마 장군들의 권력
로마의 청년들은 군복무를 거부하면 가혹한 처벌을 받았는데, 재산 몰수는 물론 노예로도 팔렸다고 합니다. 군대에서는 군단장이 병사들의 생사여탈권을 행사했습니다. 이때의 군단장의 권력은 막강하여 원거리 전쟁에는 원로원의 승인 없이 재량권이 주어졌습니다. 군단장들은 원로원 감독관의 통제를 벗어나게 된 후에는 한계 없는 독재을 휘둘렀습니다.
군단장들은 속주에서 입법권, 행정권 등을 포함하여 전방위에 걸쳐 소황제라 할 만큼의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부관들
아우구스투스는 변경 지대의 국경을 직접 통치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에 대리인을 선임했는데, 이들의 지휘는 불안했으며 위임받은 일만 처리할 뿐이었습니다. 공화국의 총지휘는 오직 황제의 권한이었습니다.
원로원은 로마 군단들이 자신들의 지휘를 받았는데 황제의 권력을 위임받는다는 것 만으로 어느 정도 만족했습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와 원로원 사이의 속주 분할
이제 황제가 된 아우구스투스는 속주를 황제 속주와 원로원 속주로 나눔으로써 자신의 권력도 강화하고 공화국의 권위도 세워주었습니다. 특히 아시아, 그리스, 아프리카와 같은 원로원 속주들은 황제의 속주에 비해 더 큰 영광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원로원의 속주들도 황제가 방문할 때는 황제의 명령이 속주 총독의 명령보다 우선한다는 법률이 통과되었고, 새로운 정복지는 황제 속주로 편입된다는 관행이 도입됨으로써 결과적으로 제국의 어디서나 황제의 명령이 최우선적으로 적용되게 했습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군 지휘권과 로마의 근위대
아우구스투스는 권력을 나누어주는 듯한 액션만 취하고 결국 일인 통치를 이루어내었습니다. 공화국의 오랜 원칙에 위배되는 행위였지만, 수도 한복판에서 수 많은 근위대를 거느리면서 군대의 지휘권을 유지할 권리를 승인받은 것입니다.
로마인들은 처음에는 아부의 방편 정도로 충성 서약을 했지만, 이 후에는 매년 충성심을 천명하는 행사가 되어 엄숙하게 치러졌습니다.
집정관과 호민관의 권력
아우구스투스는 속마음과는 다르게 군사력에 의한 통치를 혐오스럽다 하여 거부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고대 행정관들의 명예로운 이름들로 흩어져 있는 민간의 권한들을 교묘하게 자신에게 집중시켰습니다. 그는 원로원이 자신에게 평생 동안 집정관(로마체제 3대 권력 중 하나) 및 호민관(카이사르가 무력으로 얻은 직위)의 직위를 부여하게 만들었고, 이 직위는 후계자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로마의 집정관은 안전이 불안한 상황에서 원로원이 모든 책임권한을 위임했을 때는 일시적으로 독재를 행사할 수 있을 만큼 영향력 있는 자리였습니다. 호민관이라는 직위는 권력을 행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반대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들은 시민의 적을 규탄하고, 억압받는 자들을 보호하는 등 필요시에는 정부의 기능을 멈추게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들의 임기는 1년이었고, 집정관은 2명이, 호민관은 10명이 권한을 나누어 맡았습니다. 집정관과 호민관은 서로를 견제하면서 체제의 균형을 강화시키는 데 기여했습니다. 그런데 아우구스투스는 집정관과 호민관의 직위를 다 부여받은 것입니다.
황제의 특권
아우구스투스는 집정관과 호민관에 이어 대제사장과 감찰관이라는 직위까지 추가했습니다. 자신은 많은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된 반면 자신의 의무와 법적인 구속으로부터는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그는 거의 모든 국가의 권한을 제약 없이 행사하게 된 것입니다.
민회는 영원히 폐지되었고, 시민적 자유는 퇴색되었으며 그 결과 황제는 위험한 대중으로부터 해방되었습니다.
원로원
마리우스와 카이사르는 평민의 보호자임을 자처하면서 로마의 공화정 체제를 전복시켰습니다. 그러나 500~600명으로 구성된 원로원이 힘을 잃자 이 의회를 이용해 통치하는 것이 편리하다는 판단을 했습니다. 아우구스투스와 그 후계자들은 원로원의 권위를 이용해 새로운 제국을 확립했습니다.
원로원은 국가의 최고 의회이자 최고 재판소로서 상당한 특권을 가진 집단이었습니다. 또한 원로원은 입법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법률은 그들의 승인을 받아야 했습니다. 원로원은 매달 세 번 회의를 했는데, 황제도 원로원 의원의 자격을 자지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의원들과 함께 투표나 표결에 참여했습니다.
황제 통치 체제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제정되고 후계자들에 의해 유지된 제국은 공화정의 형식을 위장한 절대 군주정치였으며, 원로원 뒤에 숨어서 위임 받은 행정가 역할을 하면서 겸손한 척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황제들의 궁정
몇몇 황제를 제외한 대부분의 황제들의 의복과 식탁은 부유한 원로원 의원과 비슷한 수준이었고, 가내노예와 해방노예만을 부렸다고 합니다.
신격화
황제의 신격화는 습관적으로 절제와 조심성을 보였던 황제들이 그 한계를 벗어났던 유일한 예였습니다. 황제의 신격화는 아시아계 그리스인들로부터 처음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작가는 속주들이 황제와 총독을 추대한 것을 두고 로마에의 예속을 보여주기보다는 전제주의를 보여 주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카이사르가 생전에 로마 수호신의 반열에 오르기를 수락한 오만함과는 달리, 아우구스투스는 이러한 야심을 사절했습니다. 그러나 몇 몇 속주들에 대해서는 로마에 대한 숭배와 결합시키는 조건으로 자신에게 바치는 신전을 건설하도록 허락했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생전에는 신격화를 거절했지만 후계자의 소관으로 남겨두면서 하나의 관습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추대는 종교적 제도로 여겨지기보다 정치적 제도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전임 황제들의 신격화는 황제들의 위엄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아우구스투스와 카이사르의 칭호
아우구스투스의 원래 이름은 옥타비아누스였는데, 이 이름은 아리키아라는 작은 마을의 미천한 가문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지워버리고 싶어 했습니다. 카이사르라는 성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면서 주어졌습니다. 원로원에서 부여된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은 '존엄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네로 황제를 마지막으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혈통은 끝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이름만은 계속 보존되어 전해졌습니다.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가 군주에게만 부여되었다면, 카이사르는 군주의 친척들에게 주로 쓰였고 이후에는 제2인자라는 개념으로 쓰였다고 합니다.
아우구스투스의 성격과 정책
아우구스투스는 교묘한 독재자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의 이해관계에 따라 로마의 적에서 로마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로마 대중들에게 있어서 자유의 이미지
1.아우구스투스는 카이사르의 죽음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언제 제2의 브루투스가 나타날지도 모르는 일이었기 때문에 항상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카이사르는 왕이라는 칭호를 원했기 때문에 죽음을 맞이했던 반면,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과 국민이 과거의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보장만 받으면 기꺼이 예속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판단하였고 그 판단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힘없는 원로원과 무기력한 국민은 아우구스투스가 계획한 환상에 빠져들었습니다.
칼리굴라의 죽음 이후 원로원의 시도
칼리굴라가 살해되어 왕좌가 비어있었을 때 집정관들은 황제 체제 이후 70년만에 유피테르 신전에서 회의를 소집하여 역대 황제들을 비판하고, 충성심이 약했던 몇몇 군단을 등에 업고 48시간 동안 공화정의 독립적인 지도자로 행동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원로원이 행동하지 않고 논의만 하는 사이에 근위대가 게르마니쿠스의 동생인 어리석은 클라우디우스에게 황제의 자주색 옷을 입히는 것으로 원로원의 시도는 실패로 끝이 났습니다. 원로원은 근위대의 선택을 승인한 후에 클라디우스 황제가 베풀어준 사면의 은전을 받아들이는 선택을 했습니다.
군대에 비친 통치의 이미지
1. 아우구스투스는 군대의 방종을 두려워하고 경계했습니다. 군대는 시민들과는 달리 언제든지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소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최초의 혁명은 막대한 보상금으로 해결할 수 있었지만, 두 번째 혁명에서는 더 큰 보상이 필요할 지도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황제와 군대 사이에 원로원의 권위를 개입시켜 황제가 아닌 공화국의 최고 행정관(아우구스투스 자신)에게 충성할 것을 주장했던 것입니다.
군대의 복종
아우구스투스가 만든 황제와 군대 사이의 관계는 콤모두스 황제가 사망할 때까지 220년 동안은 군사정부에 대한 위험은 억제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18개월 사이에 4명의 황제가 살해당했고 로마 제국의 군대는 서로 간의 증오와 싸움으로 얼룩졌습니다.
후임자 지명
로마 제국 황제들은 제위가 비어 있는 동안의 위험을 예방하기 위해 미리 후계자를 정해서 황제가 사망했을 때 원만한 권력 이양을 할 수 있게 미리 막대한 권력을 나누어주었다고 합니다. 아우구스투스도 후계자를 지목했는데 후계자들이 모두 불시에 사망하고 난 후 양자였던 티베리우스에게 후계자의 권한을 주었고, 자신과 똑같은 권한을 가질 수 있도록 법률을 제정했습니다.
베스파시아누스도 이런 방법으로 장남 티투스를 후계자로 삼고 마음을 잘 다스리도록 했습니다. 티투스는 유대를 정복하고 동방 군단들의 숭배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오해를 받기도 했지만, 아버지 베스파시아누스는 그런 의심에 흔들리지 않았고, 믿어준 아버지에 대한 감사함을 느낀 티투스는 누구보다 겸손하고 충성스러운 부하가 되었습니다.
카이사르 가문과 플라비우스 가문의 경쟁
플라비우스 가문인 베스파시아누스는 미천한 가문 출신이며 최초의 평민출신 황제였습니다. 할아버지는 일반 병사였고 아버지는 세입을 관리하는 하급 공무원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카이사르 가문은 입양에 의해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로마인들은 아직도 게르마니쿠스의 손자이자 아우구스투스의 직계 후손인 네로 황제를 존경하고 있었습니다.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 황제가 짧은 기간 동안 연속적으로 살해당하자 군대는 황제를 자신들의 욕망을 채워주는 도구쯤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특별한 공적이 없었으며, 황제답지 않은 지나친 근검절약으로 그의 미덕도 빛을 잃었습니다. 반면에 그의 아들 티투스는 아버지보다 뛰어나서 로마는 일시적이었지만 평화와 행복을 누릴 수 있었고, 그에 대한 좋은 평가 덕분에 그의 동생인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15년간 보호받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서기 96년, 트라야누스의 후임자 지명과 그의 성격
도미티아누스를 암살한 자들에 의해 황제가 된 노쇠한 네르바는 자신의 힘으로 악화된 사회적 혼란을 잠재울 수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로마인들은 그를 존경하는 반면, 강한 인물을 원하기도 했습니다.
네르바는 혈연이 아닌 하(下)게르마니아의 막강한 군대를 지휘하고 있었던 트라야누스를 입양한 후, 곧바로 원로원의 칙령을 통해 그를 제국의 공동 황제이자 후계자로 선언했습니다.
트라야누스는 많은 찬사를 받고 있는 황제였습니다. 그 찬사를 그대로 다 믿을 수는 없지만, 250년이 지난 후의 황제 즉위식에서 그의 공덕이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그 찬사가 꾸며진 것 만은 아닌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서기 117년, 하드리아누스의 후임자 지명
트라야누스는 친척 하드리아누스에게 제국을 맡기는데 상당히 망설였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드리아누스의 성격이 변덕스럽고 불안정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하드리아누스는 합법적으로 후계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치세 동안 로마는 번영과 평화를 누렸습니다. 그는 큰 정책 방향부터 세부적인 문제까지 직접 챙겼습니다. 그러나 트라야누스가 걱정했던 것처럼 하드리아누스는 호기심과 허영심에 지배되었습니다.
그는 집권 초기에 황제 물망에 올랐던 4명의 원로원을 죽였고, 오랜 기간 병을 앓게 되자 잔인한 성격으로 변해 버렸다고 합니다. 그의 사망 후 원로원은 그를 신으로 선언해야 할지 폭군으로 선언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었는데,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의 간청으로 명예로운 황제로 선언될 수 있었습니다.
하드리아누스는 변덕이 심했는데, 그의 성향은 후계자의 선택에서도 나타났습니다. 그는 시민들이 당연하게 예측했던 사람이 아니라 전혀 부각되지 않았던 아엘리우스 베루스라는 귀족을 양자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는 후계자로 예상되었던 처남(세르비아누스)과 외손자(살리나토르)가 후계자의 결정에 불만을 품었다는 것을 알고, 두 사람을 반역죄로 자살하게 하였으며, 자신의 명분 없는 선택을 지지 받기 위해 군대에 막대한 하사금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후계자가 전선에서 병(결핵이라 알려짐)을 얻어 갑자기 사망하게 됨으로써 그런 노력들이 허사가 되어버렸습니다. 아엘리우스 베루스는 아들 한 명을 두었는데, 하드리아누스는 그의 아들을 안토니누스 가(家)에 맡겼고,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그를 양자로 맞았습니다. 안토니누스의 가의 양자가 된 베루스는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의 뒤를 이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공동 황제가 되었습니다. 저자는 베루스의 가장 큰 미덕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주도적으로 황제 업무를 볼 수 있게 양도했다는 점을 꼽고 있습니다. 베루스는 잘생긴 얼굴만큼 방탕한 사생활을 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두 안토니누스의 후임자 지명 · 서기 138~180년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두 아들이 있었지만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요청으로 조카인 마르쿠스 안토니누스(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베루스를 양자로 삼았고, 자신의 딸을 마르쿠스와 결혼시켰습니다. 또한 주변의 질시 따위에는 아랑곳 하지않고, 원로원의 동의를 얻어 마르쿠스에게 호민관과 집정관의 권력을 주었습니다. 마르쿠스도 안토니누스 피우스를 부모로서 존경하고 사랑했으며, 그들의 치세 때는 역사상 전 국민의 행복을 목표로 했던 유일한 시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안토니누스 피우스의 품성과 통치
티투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는 제2의 누마 왕이라고 불릴 만큼 미덕을 갖추었는데, 누마 왕은 좁은 범위에서 미덕을 발휘했던 반면,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는 제국 전체에 영향력을 미쳐서 질서와 평화를 전파했습니다. 그의 시대에는 역사적 자료가 거의 남아있지 않는다고 합니다. 사생활에서 그는 선하고 다정다감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천성이 소탈했으며 허영이나 위선을 몰랐습니다. 그는 황제로서 즐겨야 하는 쾌락을 적당히 즐길 줄도 알았으며, 자비로운 성향과 유쾌하고 차분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품성과 통치
마르쿠스 아울렐리우스 안토니누스 황제의 미덕은 엄격하고 근면한 수련을 기반으로 했습니다. 그는 수 많은 학자들을 만났으며, 수많은 강의를 들었고, 많은 시간 공부를 했습니다. 유명한 저서 <명상록>에서 그의 정신세계를 읽을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는 엄격했고, 다른 사람에게는 관대했으며,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고 자비로운 마음으로 대했습니다. 특히 그는 전쟁을 인간 본성에 대한 모독이자 재앙이라고 하면서 혐오했습니다. 그러나 나라를 위해 방어해야 할 때는 과감하게 출정했습니다. 그가 죽은 후 1세기가 지난 후에도 많은 사람들에게서 집안의 수호신으로 모셔질 만큼 후손들에게 감사와 존경을 받았습니다.
로마인들의 행복
로마의 가장 행복했던 시기는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사망 후부터 콤모두스가 즉위할 떄까지라고 인식되고 있습니다. 자발적 존경을 이끌어 냈던 네 명의 황제의 치세 동안에는 군대가 온화하지만 확고하게 통제되었다고 합니다. 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두 안토니누스 황제가 그들입니다. 작가 기번은 로마시민이 공화정을 적극적으로 원했으면 다시 공화정으로 복귀할 수도 있었던 시기로 보고 있습니다.
행복의 불확실성
작가는 황제의 인품에 따라서 국민의 행복에 직, 간접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매우 불안정하다는 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원로원과 법률의 제재는 훌륭한 인품의 황제에게는 제대로 작용하겠지만, 권력을 남용하는 황제에게는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역사를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군대는 폭정의 도구가 될 뿐이고, 부패한 로마 풍속은 아첨꾼을 배출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티베리우스, 칼리굴라, 네로, 도미티아누스에 대한 회상
작가는 로마 황제들의 연대기는 다양한 인간성을 보여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극단적인 선과 극단적인 악을 모두 찾아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음험하고 냉혹했던 티베리우스, 미친 칼리굴라, 허약했던 클라디우스, 방탕하고 잔인했던 네로, 짐승 같은 비텔리우스, 소심함과 비인간적인 면을 가진 도미티아누스는 영원한 역사의 수치로 남았다고 합니다.
거의 80년 동안(짧았던 베스피아누스 치세기간 제외) 로마는 끊임없는 학정에 시달렸고, 공화정 시대의 옛 가문들은 절멸되었으며, 덕망 있고 재능 있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처형되었다고 합니다.
폭군들 치하에서 로마인들이 겪었던 특별한 불행
로마인들은 속주민들과는 달리 시민적 자유와 혜택을 많이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폭군에 의한 폭정을 더욱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1. 작가 기번은 페르시아의 정부 형태에 대해 언급하였는데, 동방의 역사에서 코란과 그 성전의 번역자들은 백성들에게 군주정만이 인류의 유일한 정부 형태라는 인식을 심어놓았으며, 술탄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을 바치는 것이 최대 미덕이라고 세뇌시켰다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로마인들의 지식과 자유로운 정신
반면 로마인들은 사상은 노예 상태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로마인들은 억압 속에서도 자유에 대한 관념만은 포기하지 않았고, 오래 유지했습니다. 그러한 사상은 철학자들에 의해 교육되었고 전수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상을 가진 최후의 로마 시민들은 위선적인 원로원에 의해 혐의가 조작되었고 처형당했습니다. 폭군들도 원로원과 담합하면서도 원로원의 비열한 모습을 경멸했고, 원로원이 반감을 갖는 낌새만 비춰도 원로원 전체에 대해 노골적인 증오를 드러냈습니다.
피난처를 전혀 남기지 않았던 로마인들의 광대한 제국
2. 기번은 유럽이 수많은 독립 국가들로 분리되어 있을 때는 각 군주들은 다른 군주들과의 비교에서 나쁜 평가를 받지 않기 위해 자제하게 되지만, 유럽 전체를 아우르는 로마 제국처럼 도망칠 독립 국가 없는 상태에서는 전 세계가 황량한 감옥이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항은 곧 죽음이고 도주는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키케로는 추방당한 마르켈루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어느 곳에 있든지 항상 정복자의 권력 안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게."
<로마제국 쇠망사 1권 3장 요약>
로마의 초대황제가 된 아우구스투스는 속마음을 숨기고 자신의 발아래 로마 제국을 두었습니다. 겉으로는 자유를 수호하는 공화국의 형태를 취하는 듯했으나 누구보다 독재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교활하게 군대는 물론 민간의 권한까지 모두 틀어쥐어 사실상 로마 제국 전체를 자신의 손아귀에서 쥐락펴락하려는 야심을 현실화했습니다. 시민의 자유를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공화국에서 군주정으로 변모해 가는 로마를 관찰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인들의 지식과 자유로운 정신은 군주정 아래에서 퇴색하였고, 그런 정신을 가진 로마인들은 죽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황제들은 미리 후계자를 내세워 정권 이양을 순조롭게 하려고 하였는데, 후계자를 지정하는 과정에서도 여러 가지 문제점이 불거졌습니다.
로마제국은 명실상부하게 주위의 모든 독립국가를 아우르게 되면서 로마에 반기를 든다는 것은 곧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의미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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