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제국 쇠망사 1권 7장 요약(에드워드 기번, 윤수인_김희용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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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저서 읽기/로마제국 쇠망사(에드워드 기번, 윤수인_김희용 옮김)

로마제국 쇠망사 1권 7장 요약(에드워드 기번, 윤수인_김희용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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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미누스 황제의 즉위와 폭정· 아프리카와 이탈리아에서의 반란과 원로원의 권위· 내전과 폭동· 막시미누스 황제 부자, 막시무스 황제와 발비누스 황제, 고르디아누스 3대 황제의 횡사· 필리푸스 황제의 찬탈과 100년제

 

 저자는 세습군주제가 지구상에 존재하는 정부 형태 중 가장 조롱받을 수 있는 제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습군주제가 부정적인 면만 있는 것은 아니고 이점도 있는데 대중이 직접 군주를 뽑을 때의 위험함을 줄이는 면에 있어서는 유용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황제를 둘러싼 폭력이 자주 있었던 시대에는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자신들의 단합된 정서로 국민들에게 강요할 수 있는 집단은 군대인데 그 시대의 군인은 용맹과 물질적 혜택으로만 움직이는 집단이었습니다. 만약 이 두 가지를 교묘하게 이용한다면, 오히려 군주를 파멸시킬 수도 있는 손쉬운 방법이 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 원리는 현재에도 군사독재를 하는 국가에서는 적용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유럽의 전제 국가들에서는 세습에 대한 개념이 확고하게 성립되어 있어서 세습에 의해 평화로운 계승이 이루어졌지만, 아시아의 전제 군주들은 내전을 거친 후에야 왕좌를 물려받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로마에서도 공화정이라는 형식의 구속을 받았기 때문에, 후손에게 제위를 물려주려는 시도는 거듭해서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로마에서 황제의 자리는 미덕으로 얻을 수 있다는 개념이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개념이 부정적으로 작용해서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폭력을 써서라도)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세베루스가 황제일 때 트라키아 속주에서 둘째 아들 게타의 생일 축사를 위한 군사 경기 대회를 개최하였는데, 막시미누스는 농부임에도 불구하고 경기 참여를 요청하였고, 경기에서 힘과 용기를 인정받은 그는 금메달과 함께 황제를 호위하는 기병대로 임명되었습니다.
  막시미누스의 아버지는 고트족이었고 어머니는 알라니족에 속했습니다. 그는 세베루스 황제와 그의 아들 카라칼라 황제 치세에서는 백인대장까지 승진했고 두 황제의 신임과 총애를 받았습니다. 그는 알렉산데르 황제 치세에서 제4군단의 군단 참모장교로 임명되었는데, 그의 군단은 가장 기강이 잘 잡힌 군단이 되었습니다. 그는 계속 승진해서 군대의 최고 지휘관의 지위까지 올랐습니다.

로마 제국 제 25대 황제 막시미누스 [서기 235년 3월~ 238년 6월(3년)]

 막시미누스는 이제 군대의 최고 지휘관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습니다. 그는 밀정들을 풀어 황제에 대한 악의적인 이야기를 퍼뜨렸고 병사들은 어머니 밑에서 꼭두각시처럼 행동하는 알렉산데르 황제 밑에서 군인으로 있는 것을 치욕으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알렉산데르 황제는 페르시아 전쟁에서 귀환한 후 게르마니아 야만족들과 싸우기 위해 출정해야 하는 처지였습니다. 이때 막시미누스는 신병들을 모집하고 훈련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가 연병장에 들어서자 병사들이 그를 황제라 불렀고, 병사들은 알렉산데르 황제를 살해하고 반란을 성공시키기 위해 서둘렀습니다. 
 막시미누스는 군단병들의 환호성 속에서 만장일치로 황제로 승인받았습니다. 알렉산데르 황제는 막사에 자신을 죽이러 따라 들어간 몇몇 대대장들과 백인대장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황제는 죽으면서(서기 253.03.19) 섭정을 하던 자신의 어머니를 원망했는데, 그의 어머니도 그와 같은 운명을 맞이했습니다.
저자는 막시미누스의 잔인성은 경멸에 대한 두려움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막시미누스는 자신의 미천한 출신, 야만스러운 용모, 예술이나 제도에 대한 무지에 대한 열등감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미천한 시절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을 처형했는데, 자신에게 도움을 준 사람들마저 처형함으로써 배은망덕을 저질렀습니다. 
 열등감으로 뭉쳐있던 막시미누스는 특히 자질이 뛰어났던 신하들에 대한 의심과 경계를 늦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의심만으로 재판도 없이 많은 사람들을 처형했으며, 이 시기에는 밀정과 밀고자들로 들끓었다고 합니다. 그는 사람을 처벌함에 있어서도 잔인했으며, 3년의 통치기간 동안 이탈리아나 로마를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라인 강변이나 도나우 강변의 병영에서 오직 칼의 힘으로만 전제 정치를 했습니다. 
 막시미누스는 모든 도시들이 독립적인 재원으로 마련해 두었던 제물들을 뺏앗아서 국고로 몰수했습니다. 심지어 신이나 영웅, 황제의 동상들도 녹여져 화폐로 주조되었습니다. 이런 신성 모독적인 약탈에 국민들이 분연히 일어났고, 병사들조차 약탈의 몫을 부끄러워했습니다. 마침내 비무장 속주 하나가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아프리카 속주의 재무관은 부자에게 세금을 물리고 재산을 몰수하여 제국의 세입을 늘리고 있었는데, 속주의 부유한 청년들에게도 불리한 판정을 내려 세습 재산을 다 잃을 상황에 처하게 만들었습니다. 젊은 청년들은 극단으로 내몰리자 노예들과 농부들을 끌어들여 곤봉이나 도끼들로 무장했고 급기야 재무관을 단검으로 찔러 죽였습니다. 그들은 티스드루스라는 작은 마을을 점령하고 반란군의 깃발을 내걸었습니다(서기 237년 4월). 그들은 막시미누스가 국민들의 증오의 대상이라는 것을 믿고 아프리카총독이었던 고르디아누스에게 황제가 될 것을 제안합니다. 고르디아누스는 진심으로 거절했으나 그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이미 황제의 칭호가 주어진 이상 반역에 연루되었기 때문에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수락해야 했습니다.
 

로마 제국 제26대 황제 고르디아누스 1세 [238년 3월 22일 ~ 238년 4월 12일(15일)]

 
고르디아누스의 가문은 로마 원로원 가문 중에서도 최고의 가문에 속했습니다. 부계는 크라쿠스 가의 후손이고 모계는 트라야누스 황제 가문의 후손이었습니다. 재산도 막대하여 저택에는 화려한 장식품과 기념품이 즐비했으며, 개인 비용으로 검투사들이 나오는 대중 공연을 개최할 정도였습니다. 
 궁정을 카르타고로 옮긴 고르디아누스 부자는 아프리카 속주민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원로원의 승인을 받는 절차가 남았습니다. 그는 원로원에 보내는 편지에 자신이 황제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정중하고 공손하게 써서 보냈습니다. 
 원로원은 군사정부의 공포 정치에서 벗어나 공화정 정부의 부활까지도 기대할 정도로 희망찬 전망을 했습니다. 원로원은 비밀회의을 열어 발표할 칙령을 논의했습니다. 이제 막시미누스를 끌어내지 않으면 원로원 의원들의 생명도 위험하게 되었습니다. 원로원에서 집정관 실라누스가 연설을 하였고 막시미누스 부자를 공적으로 선포하였고, 만장일치로 고르디아누스 부자의 즉위가 승인되었습니다. 
 원로원은 우선 막시미누스의 충성스러운 부하이며 악행의 실행자였던 근위대장 비탈리아누스를 죽임으로써 시민과 병사들에게 혁명이 일어났음을 알렸습니다. 
 죽음보다 막시미누스의 폭정이 더 두려웠던 국민들은 원로원의 명분을 열렬히 지지했습니다. 
 그런데 마우리타니아의 총독 카펠리아누스가 카르타고를 급습하였고, 공격을 막을 수 없었던 고르디아누스는 자결하였고 아프리카 속주는 약탈과 잔혹 행위에 무방비로 노출되었습니다.(서기 237년 7월 3일)
고르디아누스 부자의 사망으로 공포에 휩싸인 원로원은 콘코르디아 신전에 모였고, 트라야누스 가문의 한 의원이 연설을 했습니다.

콘코르디아 신전 - 인근에서 발견된 라틴어 비문에서 이름이 붙여졌으며, 기원전 5세기에 지어졌다. 6세기부터는 교회로 바뀌었고, 현재는 신전의 계곡에서 가장 보존 상태가 좋은 유적지 중 한 곳이다.

 
우리는 두 분의 훌륭한 황제를 잃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는 한 이 공화국의 희망이 고르디아누스 부자와 함께 영영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의원들 가운데는 황제가 될 만한 덕성과 능력을 갖춘 분이 많습니다. 두 분의 황제를 선출해서 한 분은 외적에 맞서 전쟁을 수행하도록 하고 다른 한 분은 로마에서 민간 행정을 돌보도록 합시다. 제가 감히 지명을 해 본다면, 저는 기꺼이 막시무스 의원과 발비누스 의원에게 표를 던지겠습니다. 의원 여러분, 저의 선택에 동의해 주시든지 아니면 그 대신 자질이 더욱 뛰어난 분을 지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원로원에서 두 사람은 황제로 승인받았습니다. 발비누스는 뛰어난 웅변가이자 유명한 시인이었고, 존경받는 현명한 행정관이었습니다. 이에 비해 막시무스는 좀 더 거친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출신은 미천했지만 자수성가한 인물이었습니다. 국민들의 애정은 발비누스에게 더 있었지만 두 사람 모두 집정관을 지낸 경력이 있었습니다. 막시무스는 60세였고 발비누스는 74세로, 경험에 있어서도 완숙한 경지에 이른 두 사람이었습니다. 
 막시무스와 발비누스가 직책을 수여받은 후, 로마의 수호자들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 카피톨리누스 언덕으로 올라갔을 때, 대중은 황제 선출에 대한 지분이 자신들에게도 있다며 황제가 되었다가 목숨을 잃은 고르디아누스 가문에서 한 사람을 추가로 황제로 모실 것을 요구했습니다. 두 황제는 대중들과 무력 충돌이 일어날 것을 우려하여 고르디아누스의 손자인 13세의 소년에게 부황제 자리를 줌으로써 소요를 진정시켰습니다.
 

로마 제국 제 27대 공동 황제 마르쿠스 클로디우스 푸피에누스 막시무스[서기 238년 4월 22일 ~ 238년 7월 29일(98일)]
로마 제국 제27대 공동 황제 발비누스[ 238년 4월 22일 ~ 238년 7월 29일 (98일)]

한편 황제에서 물러나게 된 막시미누스는 맹수처럼 분노를 쏟아냈습니다. 알렉산데르 황제가 게르마니아와 사르마티아에 대한 전쟁을 치르면서 이미 군단이 집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막시미누스로서는 얼마든지 로마로 진군할 수 있었으나 외국과의 전쟁으로 인해 이탈리아로의 진군은 다음 해 봄까지 연기하기로 했습니다. 저자는 막시미스의 이성적인 행동을 유추해 볼 때 그에 대한 악의적인 평가는 다소 과장되었을 수도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복수보다 제국의 안보를 더 우선으로 두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막시미누스의 군대가 진군했을 때 이탈리아 변경 지역은 그의 군대가 진격해 올 것을 대비하여 원로원의 계획에 따라 마을을 황폐화시켰으며 다리들도 모두 파괴해 버렸기 때문에 머물 곳이나 먹을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서기 238년 2월). 막시미누스가 처음 공격한 곳은 아퀼레이아였는데 시민들은 원로원이 임명한 장군 크리스피누스와 메노필루스와 함께 온몸을 바쳐 싸웠습니다.

아퀼레이아

 새롭게 임명된 두 명의 황제 중 막시무스는 라벤나에서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막시무스는 막시미누스가 아퀼레이아를 버리고 로마로 진격할 것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지휘하고 있는 군대는 이탈리아의 나약한 신병과 게르마니아인으로 구성된 보조군밖에 없었는데, 그는 게르마니아인에게 의존하는 것 또한 위험할 수 있다는 판단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적군에서 음모가 발생하여 막시미누스가 살해되어 위험에 빠진 로마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막시무스는 지체없이 아퀼레이아의 병영으로 달려갔는데, 군대는 어쩔 수 없이 그를 황제로 승인했습니다. 막시무스는 병사들을 안심시켰고 하사금을 약속한 후 각자가 속한 속주로 돌려보냈습니다. 그러나 오만한 근위대는 달랠 수 없었습니다. 민간 권력이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고 이제 근위대는 원로원에 복종해야 하는 처지에 놓였으며, 혹시나 원로원이 복수를 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마저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운명은 여전히 그들 자신에게 달려 있었습니다.
 두 명의 황제로 분산된 권력은 시간이 흐르면서 황제들과 원로원 모두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습니다. 두 명의 황제는 서로에 대한 적대감이 높아졌고, 서로를 경멸하고 무시했습니다. 그들의 불화로 인해 근위대를 통제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두 황제는 카피톨 경기에 도시가 몰두한 시기를 틈타서 암살단이 습격해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도 서로 도움받기를 주저하면서 중요한 시간을 놓쳐버렸습니다. 근위대는 두 황제의 자의를 벗기고 수천 번 난도질한 다음 길거리에 내버려 두었습니다.(서기 238년 7월).
 두 황제가 살해됨으로써 부황제였던 고르디아누스 3세가 황제가 되었습니다. 병사들은 허수아비와 같은 어린 황제 아래서 오랫동안 방종한 생활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쨋든 로마는 내전을 피하고 새로운 황제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로마 제국 제 28대 황제 고르디아누스 3세 [서기 238년 4월 22일 ~ 244년 2월 11일 (5년 296일)]

 
 고르디아누스 3세는 동방 출신의 해충과도 같은 환관들에게 철저히 기만다했고, 공직들은 무능력한 사람들에게 팔려 나갔습니다. 다행히 고르디아누스 3세는 수사학의 대가인 미시테우스라는 신하의 딸과 결혼하여 환관의 횡포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서기 240년).
 다양한 방면에 재능이 있었던 미시테우스는 근위대장이 되어 직무를 상당히 잘 수행했습니다. 황제는 장인의 권고에 따라 페르시아의 침범에 맞서 몸소 동방의 원정에 나섰습니다. 황제가 몸소 출전하자 페르시아 군은 퇴각했고 고르디아누스 3세는 첫 번째 승리의 기쁨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미시테우스는 원정 기간 내내 군대의 살림을 철저하게 잘 꾸려서 부족함이 없게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미시테우스가 갑자기 이질로 목숨을 잃게 되었습니다. 저자는 독살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의 후임으로 온 근위대장은 아랍 출신의 필리푸스라는 사람이었는데 그는 젊었을 때 노상강도였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그는 황제를 보좌하기보다 황제의 자리를 찬탈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는 교묘한 책략으로 식량을 부족하게 하여 병사들을 동요시켜서 황제를 살해하게 합니다. 결국 필리푸스가 병사들의 투표로 황제에 선출되었습니다(서기 244년 3월).
 

로마 제국 제29대 황제 필리푸스 아라부스 [244년 2월 ~ 249년 9월 (5년)]

 
필리푸스 황제는 100년마다 열리는 100년제 축제를 최대한 성대하고 장엄하게 거행했습니다. 이 행사는 100년마다 열리는데 아우구스투스 황제, 도미티아누스 황제, 세베루스 황제에 이어 다섯 번째였습니다. 이번 행사는 특별히 로마 건국 100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도 있었습니다. 이 행사에서 생각이 깊은 사람들은 앞으로 맞이하게 될 로마 제국의 운명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35개 부족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인류 집단은 여전히 대서양에서 티그리스 강까지, 아틀라스 산맥에서 라인강과 도안우 강까지 뻗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로마 제국은 예전의 신선한 활력과 건강성은 사라지고 활력을 잃고 점점 쇠퇴하고 있었으며, 아름다운 속주들도 로마 제국의 쇠퇴를 느끼게 된 야만족들의 횡포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로마제국 쇠망사 1권 7장 요약]

막시미누스는 알렉산데르 황제의 총애로는 만족하지 못하고 스스로 황제가 되려는 야심을 불태웠습니다. 그는 알렉산데르 황제에 대한 중상모략으로 그를 살해하게 하고 황제가 되었습니다. 막시미누스는 미천한 출신에 대한 열등감으로 폭정을 했습니다. 
 
 아프리카 속주에서는 막시미누스 치하의 속주 재무관이 무리하게 벌금을 매겨 재산을 몰수하는 데 반감을 가진 청년들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들은 아프리카 총독인 고르디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했습니다. 그러나 카르타고에 있던 고르디아누스는 마우리타니아의 총독 카펠리아누스가 쳐들오자 패배했음을 알고 황제가 된지 불과 36일만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이제 막시미누스의 후환이 두려워진 원로원은 원로원 의원 중 막시무스와 발비누스를 공동황제로 선출했습니다. 전쟁에 출정했던 막시미누스는 복수를 위해 이탈리아로 진군했습니다. 대부분의 병사들이 막시미누스 황제 휘하에 있었기 때문에 공동황제였던 막시무스는 전쟁의 승리를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막시미누스가 병사들을 잔인하게 몰아치다 병사들에 의해 목숨을 잃은 것입니다. 
 
 막시무스와 발비누스는 서로 화합하지 못했기 때문에 근위대를 통제할 수 없었고 결국 근위대에 의해 둘 다 목숨을 잃었습니다. 군대는 부황제였던 고르디아누스 3세를 황제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미시테우스라는 신하를 장인으로 삼아 제국을 잘 이끌어갔으나 미시테우스가 죽음으로써 그의 운명도 최후를 맞았습니다. 
 
 고리디아누스 3세를 죽게 하고 황제의 자리를 찬탈한 사람은 아랍출신의 근위대장 필리푸스였습니다. 
 
 황제의 자리가 언제 바뀔지 모르는 위태로운 시기를 지나면서 로마 제국은 신선한 활력은 사라지고 침체되고 쇠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https://youtu.be/-GzFEMlS3BA?si=wdC4A3maKThN-n9x

https://youtu.be/gaOr_xBccFc?si=uo_W_UOQRCQS3HX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