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제국 쇠망사 1권 2장(에드워드 기번, 윤수인_김희용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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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저서 읽기/로마제국 쇠망사(에드워드 기번, 윤수인_김희용 옮김)

로마제국 쇠망사 1권 2장(에드워드 기번, 윤수인_김희용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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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누스 가(家) 황제들 시대의 로마 제국의 통일과 내부적 번영·예술·사람들

 

통치의 원칙

 

작가 기번은, 로마 제국이 위대한 점은 단지 빠르게 영토를 넓힌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수 세기 동안 제국을 유지 관리했다 점을 들고 있습니다. 빠르게 영토를 넓힌 칭기즈칸과 몽고의 왕이나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유지 기간이 짧았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기 어렵다는 입장입니다. 

로마는 속주들의 통치에 있어서 관리들의 학정도 있었지만 일반적인 원칙은 현명하고 이로운 것이었다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그 예로 속주민들이 조상의 종교를 그대로 믿을 수 있게 한다거나, 속주민들의 권리도 점차 로마 시민과 비슷한 수준으로 누릴 수 있었다는 점을 들고 있습니다. 로마인들이 자연의 신들을 숭배했기 때문에 속주민들이 그러한 행위를 하는 것에 대해 조롱할 수 없었습니다. 고대인들은 보편적으로 온화하고 관대했기 때문에 종교 간의 다른 점보다는 비슷한 점에 더 주목했습니다. 호메로스의 신화는 고대 세계의 아름답고 전형적인 형태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보편적인 관용 정신 

 

1. 종교적 자유는 서로의 종교에 대한 관용뿐 아니라 종교적 화합까지 이끌어 냈습니다.

 

로마 대중들

 

로마 시민들은 다신교도들이었고, 각자의 민족적 의식에 집착하면서도 이민족의 종교도 묵인했습니다. 로마인들은 현자들이나 조국을 위해 목숨 바친 영웅들은 신적인 존재까지는 아니어도 인류의 존경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보편적이었습니다. 

고대의 철학자들은 이성의 독자적인 위엄을 주장하기는 했지만, 실천에 있어서는 법률과 관습에 따랐다고 합니다. 그들은 속마음을 숨기고 어리석은 백성들의 신앙에 대해서 경멸하면서도 관습적으로 행해지던 미신적인 행사에 참여하곤 했습니다. 아마도 미신을 부정했을 때의 후폭풍이 두려워서 그랬던 것은 아닐까 추측해 봅니다. 

 

철학자들

 

아카데메이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는 종교성이 보다 약했는데, 아카데메이아 학파가 온건하게 '최상의 지배자'의 존재를 단지 의심하기만 했던 반면에 에피쿠로스 학파는 적극적으로 무시하고 부정했습니다. 

작가 기번은 이 시기의 작가들이 감히 신들을 공개적으로 조롱할 수 있었던 것은 사회의 상류층과 지식인들이 그런 생각에 공감대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추측을 하고 있습니다.

에피쿠로스학파의 창시자 에피쿠로스(위키피디아)

 

행정관

 

로마의 행정관들은 모두 철학자들이었으며, 원로원 의원들은 아테네의 여러 학파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제사장은 뛰어난 원로원 의원 중에서 선출되었고, 대제사장은 당연히 황제들이 맡았습니다. 그들은 공공축제를 열어 국민들의 풍속을 순화시키려고 했고, 정책에 있어서도 점술이나 신탁을 이용했으며, 배신했을 때는 복수의 신에게 가혹한 처벌을 받는다는 인식을 심어줌으로써 질서를 유지하는데 힘썼습니다. 이 시대 로마에서는 다양한 형식의 종교에 대한 관용적인 태도가 지배적이었습니다. 따라서 피정복민들은 자신들의 종교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음은 물론 후원까지 받았다고 합니다. 갈리아 속주에 대해서는 예외적이었는데 인간을 제물로 바친다는 이유로 드루이드교의 워험스러운 영향을 억압하고자 했으나, 이 종교는 암암리에 은밀하게 존속했습니다. 

 

로마의 자유

 

2. 자존심보다 야망을 쫓았던 로마와는 다르게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순수혈통을 유지하려는 편혐함으로 쇠퇴와 몰락의 길을 걸었습니다. 아테네의 번성기에도 인구가 줄었던 것에 비해 로마 제국의 인구는 빠른 속도로 늘어났습니다. 로마는 자유 공화정 체제에서 황제가 통치하는 체제로 바뀌었는데 거대한 통치자의 입장에서는 거대한 제국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시민의 권리가 많은 체제보다 독재체제가 효율적이라고 판단한 것으로 보입니다. 로마 시민들 또한  1급 시민으로서 명예를 지닐 수 있어서 만족스러워했으며, 로마는 이런 특권을 신중하게 확대해 나가면서 제국을 유지하려 했습니다.

 

이탈리아

 

이탈리아는 국가 통합의 중심으로 존중받았으며, 황제와 원로원 의원들은 이탈리아에서 출생하거나 적어도 이탈리아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이탈리아인들은 세금이 면제되었습니다. 이탈리아의 지방 자치제는 수도 로마을 모델링하여 독자적으로 법을 집행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가 편협하게 시민권을 부여했다면 제국으로 나아가는 데 걸림돌이 되었을 것이라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유명한 베르길리우스, 호라티우스, 리비우스, 카토, 마리우스, 키케로 등은 속주 출신이거나 변방출신이었습니다. 

 

속주들

 

로마 제국의 속주들은 공적인 권력이나 법적인 자유가 없었습니다. 로마는 피정복민의 왕을 회유하여 피정복 민족이 로마의 속박에 순응하고 나면 왕위에서 쫓아냈습니다. 자발적으로 로마에 예속된 자유국들도 겉으로는 동맹국의 지위를 부여받은 것처럼 보였지만 어느새 속국으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로마는 식민지를 확장해 가는 한편 충성스러운 속주민들을 로마 시민으로 받아들이는 이중 전략을 통해 속주들도 서서히 로마인들의 국가로 변모해 갔습니다.

 

식민도시와 자치도시

 

 로마인들은 정복지가 주는 혜택을 누리려고 정복지에 정착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그런 결과로 아시아 정복 40년 후에 미트리다테스 왕(미트리다테스 6세, 폰토스의 왕)에 의해 하루에 8만 명의 로마인들이 학살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식민도시 중에는 민간도시와 군사도시가 있었으며, 내부 정책은 철저하게 로마의 예를 따랐습니다. 식민지에 정착한 로마인들은 대체적으로 원주민과 잘 지내었고, 원주민들도 시간이 흐르면서 로마인들이 누리는 명예와 혜택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시민권을 획득하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시민권의 가치는 떨어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실질적인 혜택을 취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중요한 문제에서 로마법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고, 출세의 길도 열렸습니다. 또한 한때의 로마의 위협이 되었던 갈리아족이 이제는 로마의 평화를 지키는 데 기여하게 되었습니다.

미트리다테스 왕(미트리다테스 6세, 폰토스의 왕)은 이탈리아에서 동맹시 전쟁이 터지자 소아시아확장의 기회로 삼음.

 

 

라틴 속주와 그리스 속주의 분리

 

 로마인들은 언어의 영향력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라틴어를 널리 보급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 결과 이탈리아의 옛 방언들은 서서히 잊혀져 갔습니다. 그러나 동방 속주들은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이런 차이는 로마가 쇠퇴하면서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그 결과 서방 속주들은 새로운 지식과 세련된 문명을 빠르게 받아들였으며, 시민권도 쉽게 얻을 수 있었습니다. 에스파냐 속주 출신이었던 트라야누스 황제가 배출된 것만 봐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그리스인들은 오래전부터 우월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고 자부했었기 때문에 모국어를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로마의 제도와 권력은 받아들였지만, 그들의 풍속은 경멸했습니다. 그리스의 영향력은 로마 제국 하에서도 여전히 강력하여서, 로마 제국은 라틴어 권역과 그리스어 권역으로 나누어졌습니다.

 세 번째 권역으로는 시리아와 이집트 원주민들의 언어인데, 이들은 자신들의 언어를 고수함으로써 진보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합니다. 이들은 로마 시민권을 요청하지도 않기도 했지만, 받을 수도 없었다고 합니다.

 

두 언어의 일반적 사용

 

로마는 그리스의 예술은 인정하고 동경했지만, 그와는 별개로 군대와 민간 행정 부문에서는 일관되게 라틴어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그리스어와 라틴어는 여러 분야에서 동시에 사용되었습니다. 그리스어는 학문에서 주로 사용되었고, 라틴어는 제도권을 유지하기 위한 절차에서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두 언어는 둘 다 사용할 수 있었고 행정가들은 대부분 2개 언어를 사용했습니다.

 

노예

 

로마 제국의 노예들은 원래 자유로운 생활을 했었기 때문에 자신들을 속박하는 지배자에게 복수하기를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노예에 의한 반란으로 공화국이 몇 차례 위험에 빠졌었고, 그런 이유로 가혹한 규제와 잔인한 처우가 가해졌습니다. 그러나 로마 제국이 커지면서 노예공급이 줄어들자, 노예들에게 여러 가지 혜택을 주면서 결혼을 장려함으로써 노예들의 고단함이 완화되었고 가치는 올라갔습니다. 주인들도 노예들을 인간적으로 대우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하드리아누스 황제와 안토니누스 황제는 칙령으로 노예들이 법적인 보호를 받을 수 있게 했습니다. 그 결과 노예의 생사를 주인이 함부로 정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학대를 받은 노예는 행정관에게 호소할 수 있었고, 그에 따른 조치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노예 해방

 

노예는 주인에 의해 해방될 수 있었지만, 자유를 얻은 노예는 주인이 속한 정치사회의 일원이 되어야 했습니다. 노예가 무분별하게 자유를 얻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행정관의 허락을 받아야만 공식적인 특권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적인 영역에서의 특권만 인정되었고, 공적인 영역에서는 배제되었으며 3~4세대가 지날 때까지도 노예출신이라는 꼬리표가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노예들의 수

 

노예들의 수가 하인들의 수보다 훨씬 많았다고 합니다. 부유한 원로원의 집에는 전문직 노예들이 있었습니다. 상인이나 제조업자들은 일꾼을 쓰는 것보다 노예를 사서 쓰는 편이 이익으로 생각했으며, 시골에서는 노예가 가장 싼 농기구로 취급되었습니다. 로마의 한 저택에는 400명의 노예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 노예들은 자식에게 양도하기도 했습니다. 작가는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대의 한 해방노예가 그의 사후에 소 7200마리, 작은 가축류 25만 마리, 노예 4116명을 남겼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출처: missitaly.ru

 

로마 제국의 인구밀도

 

클라우디우스 황제 때 추산된 로마 시민의 수는 약 694만 5000명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여기에는 여자와 아이들을 합하면 2000만 명, 하층 계급과 노예까지 합산했을 경우, 로마 인구는 1억 2000만 명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복종과 화합

 

로마 제국은 아시아의 군주국과는 달리 모두가 자발적으로 복종했다고 합니다. 정복민들은 하나의 거대한 국민으로 융합되었고, 독립을 바라지도 않았습니다. 군대는 제국의 적에 대해서만 싸웠고, 행정관이 군사력을 위해 도움을 청하는 일은 거의 없었을 정도로 평화와 통일을 이루어낸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로마의 기념물

 

로마의 유적들은 우아한 예술의 역사를 보다 실용적인 역사와 결합시켰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습니다. 로마의 건축물 중 많은 양이 개인 비용으로 만들어졌지만 그 목적은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고 합니다. 

 

개인 비용으로 세워진 로마의 많은 기념물들

 

로마 건축물 중 상당수는 물리적인 동원을 무제한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던 황제들에 의해 지어졌습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아름다운 로마를 건설하려는 야망이 있었고,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화려한 건축물들을 지을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엄격한 경제 정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트라야누스 황제의 건축물에서는 그의 창조적인 재능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제국의 모든 속주에 공공 기념물을 건축하게 했던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직접 공사를 감독하기도 했습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예술을 사랑하는 예술가였습니다. 두 안토니누스 황제도 예술을 장려하였습니다. 귀족들도 질세라 황제들을 따라 했습니다. 로마에 콜로세움이 들어서자 다른 시에서도 작은 규모로 원형경기장을 세웠습니다. 개인적으로 황제들의 업적과 비슷한 규모와 위용을 자랑하는 기념물을 남긴 사람은 안토니누스 황제 시대에 살았던 아테네 시민 헤로데스 아티쿠스가 있습니다. 

 

헤로데스 아티쿠스의 실례

 

헤로데스 가문은, 수 많은 신들과 영웅들의 후예였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비참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헤로데스의 아버지 율리우스 아티쿠스가 자신의 집 아래에서 엄청난 보물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아티쿠스는 법에 따라 황제의 재산인 보물을 숨기지 않고 황제에게 보고했다고 합니다. 그 당시 황제였던 네르바는 아티쿠스의 보물을 빼앗지 않았으며 마음대로 쓰라고 했습니다. 아티쿠스가 개인이 쓰기에는 너무 많다고 말하자, 황제는 오용하라고 하였고, 아티쿠스는 공적인 일에 자신의 재산을 쏟아부었습니다. 그의 아들 헤로데스도 자치도시의 장관직을 맡았을 때 물이 부족하여 수도교를 짓는데 비용이 예산보다 2배로 불어나자 모두 자신이 감당하여 불평을 잠재웠을 만큼 큰 재력을 지녔던 것으로 보입니다. 

네르바 황제( 96년 9월 18일 – 98년 1월 27일) By 위키피디아

헤로데스 아티쿠스의 평판

 

 

젊은 헤로데스는 초빙되어 온 유능한 교사에게 가르침을 받고 수사학을 사용하는 뛰어난 웅변가가 되었습니다. 그는 집정관까지 되었으나, 정치에는 관심이 없었고 아테네와 그 인근의 별장에서 철학을 토론하며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가 남긴 유적들은 그의 고상한 취미와 관대한 성품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가 건설한 아테네의 경기장은 그 길이 600피트에 달한다고 합니다. 그는 죽은 아내 레길라를 기념하여 극장을 지었는데, 그것에 견줄만한 건축물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는 음악공연과 비극의 공연장인 오데움을 복원하였고, 여러 곳에 건축물을 짓고도 재산이 남아있었다고 합니다. 그 밖에도 많은 주민들이 그의 은혜를 입었으며, 아시아의 도시들에도 그가 기부자로 명기된 비문들이 많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이로 미루어 짐작해 보면 그의 재산은 황제에 버금갈 정도로 엄청났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헤로데스 아티쿠스가 죽은 아내 레길라를 추모하고자 건축하여 아테네 시미에게 기증한 곳 (위키피디아)

 

공공의 용도, 즉 신전, 극장, 수로 등에 사용된 대부분의 로마 기념물들

 

아테네와 로마의 공화정 체제에서 개인들의 주택은 수수하고 단순했지만, 공공 건축물의 웅장함은 시민들에게 자부심을 주었습니. 군주제가 도입된 후에도 황제들은 건축물을 통해 자신들의 위대성을 과시했습니다. 

네로의 황금궁전(BY historyskill)

 

콜로세움

 

티투스의 대욕장

 

트라야누스의 포룸_다키아 승전을 기념하기 위한 건축물

 

로마의 수도교(By 위키피디아)

 

수도교는 로마의 천재성과 힘을 보여 주는 최고의 기념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머나먼 수원지에서 수도교를 통해 로마에 물을 공급했습니다. 수도교가 없었다면 많은 도시들이 번성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제국 도시들의 수와 거대한 규모

갈리아와 에스파냐, 아프리카, 아시아 

 

1. 고대 이탈리아에는 1197개의 도시가 있었다고 합니다(도시라고 말하기 어려운 곳도 포함된 숫자임). 로마가 첫 번째 쇠퇴기의 징조를 보일 때에는 갈리아 키살피나(알프스 산맥 남쪽의 갈리아)의 급속한 발전으로 충분히 상쇄되었습니다.

갈리아(키살피나)By 위키피디아

 

2. 로마의 발전의 기세는 알프스 산맥을 넘어서, 프리타니아의 삼림 지대까지 영향력이 미쳤습니다. 삼림 지대도 변모하여 점차 쾌적한 주거지로 거듭났습니다. 요크에는 정부가 , 런던에는 상업으로, 바스는 온천으로 유명해졌습니다. 갈리아에서는 1200개의 도시가 조성됐습니다. 갈리아의 북부도시는 경제적으로 뒤떨어졌지만, 남부도시는 이탈리아의 문화를 모방할 정도로 부유했습니다. 갈리아는 18세기의 도시와 비교하여 비슷하거나 오히려 로마시대가 더 나았을 정도로 번성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에스파냐는 오히려 속주일 때가 더 번성했다고 합니다.

 

3. 카르타고의 지배 아래 있을 당시 아프리카에는 300개의 도시가 있었기 때문에 로마의 속주일 때 그 숫자가 줄어들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4. 아시아의 속주들은 카이사르 치세 때에는 500개의 번화한 도시가 있었고, 자연의 혜택으로 부유해졌고 세련된 예술로 장식되었습니다. 그 중 열한 개의 도시가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신전을 바치겠다고 논쟁을 벌였다고 합니다. 그 중 4개의 도시는 재정적으로 어려울 것이라 판단하여 제외시켰는데, 그 중에 라오디케아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라오티케아조차 재정적으로 어렵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탈락하지 않은 페르가무스, 스미르나, 에페수스와 같은 도시들은 얼마나 부유했을지 가히 짐작이 갈 만합니다. 시리아의 수도 안티오크와 이집트의 수도 알렉산드리아는 다른 속주들을 무시하면서도 로마에 대해서는 마지못해 굴복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안티오카, 알렉산드리아(위키피디아)

 

로마의 도로, 역참, 항해술

 

각 도시들은 공공 도로가 있어서 서로 연결되고 수도 로마와도 연결될 수 있었습니다.

로마의 포룸에서 시작된 도로는 이탈리아를 가로지르고 속주들을 거치면서 제국의 국경까지 연결해 주었습니다. 안토니누스 성벽에서부터 로마까지, 로마에서 예루살렘까지의 거리를 측정해 보면 북서쪽부터 남동쪽까지 연결되어 있는 교통망이 4080 로마마일(*로마마일: 천 걸음에 1마일, 한걸음은 두 발자국)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로마의 도로는 15세기(기번의 집필시기)가 지난 후에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 정도로 견고하게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21세기에도 로마시대에 만든 도로를 걸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입니다. 도로는 군대 이동을 위한 목적이 1차적이었지만, 속주들을 통합시키는 데도 한몫을 하였습니다. 로마 황제들은 빠른 정보 전달을 위해 우편 시설을 만들었습니다. 4~5마일 간격으로 역참(교통 통신기관)들이 세워져고 각 역참마다 40마리의 역마들이 대기하고 있었는데, 이 역마들을 이용하면 하루에 100마일은 쉽게 달릴 수 있었습니다. 이 역참들은 황제의 명을 받은 사신들만 쓸 수 있었지만 가끔 시민들의 편의를 위해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로마는 지리적으로 반도이기 때문에 해상에서도 비교적 자유롭고 편하게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이탈리아 해안에는 항구로 사용할 만한 곳이 없었는데, 클라디우스 황제가 테베레 강어귀에 인공적으로 만든 오스티아 항구는 로마의 위대성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기념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항구에서 출발하여 순항했을 때, 헤라클레스 기둥까지는 7일 안에, 알렉산드리아까지는 9~10일안에 도착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제국 서부 지역에서의 농업의 개선

과일의 전래, 포도나무, 올리브 나무, 아마, 인공 재배된 풀

 

로마 제국의 영향으로 교통 발달과 함께 생활의 발전도 가져왔습니다. 로마 이전에는 동방 세계는 예술과 사치를 즐긴 반면, 서방 세계는 농업을 경멸하는 호전적인 야만족이 살았다고 합니다. 야만족들은 농사를 짓기보다 약탈하는 것이 쉽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부의 틀안에서 농산물과 산업이 서방세계에도 도입되었습니다. 또한 교역이 개방되어 이윤이 높았기 때문에 원주민들은 생산물들을 늘려서 산업을 발전시키려고 했습니다. 당시에는 아시아나 이집트에서 유럽으로 엄청난 종류와 양의 동식물이 수입되었다고 합니다. 

대표적인 동식물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사과는 이탈리아 토착 과일이었는데, 새롭게 들어온 살구, 배, 석류, 시트론, 오렌지 등을 맛본 다음 모두 사과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구분하기 위해 원산지 이름만 붙였다고 합니다. 

 

2. 호메로스 시대 이후 포도주는 천 년이 지나서야 이탈리아에서 여러 종의 포도주를 맛볼 수 있었는데, 그중 3분의 2가 이탈리아에서 생산된 포도로 만든 것입니다. 그 이후 포도주는 갈리아의 나르본데시스 속주로 전해졌습니다. 포도는 추위에 약한 편인데 안토니누스 황제들 시대부터는 브루고뉴 지방에서도 포도가 재배되었다는 증거가 있다고 합니다. 

 

3. 올리브는 서방세계의 평화가 확산되는 시기에 퍼져나갔기 때문에 평화의 상징으로 여겨졌습니다. 올리브는 따뜻한 온도에서 자란다고 생각되었으나 여러 가지 경험에 의해 보다 넓은 지역에서 재배되었습니다.

 

4. 아마는 이집트에서 갈리아로 수입되었는데, 아마를 재배하면 땅이 척박해지는 단점은 있었지만, 아마로 인해 그 지역 전체가 부유하게 되었습니다.

 

5. 사료용 목초는 주로 루체른 지방에서 주로 사용되었는데, 루체른이라는 이름도 목초 학명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공화국 초창기에는 기근이 자주 발생했으나 로마 제국 하에서는 기근이 전혀 발생하지 않았는데, 기근이 발생하더라도 인근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사치품 공예

 

작가 기번은 사치품에 대해 부정적인 면도 있지만 그 제품을 제작하기 하여 기술자들이 부자로부터 삯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로 인해 부의 불평등이 어느 정도 해소되는 선순환 구조가 된다고 보는 입장입니다. 단, 이런 사치를 제국의 경계 내로 국한시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대외 무역

금과 은

 

동방 무역의 대상은 화려한 사치품이었고, 실크의 가격은 금과 맞먹었다고 합니다. 보석과 향료가 사치품의 주요 대상이었습니다. 비판적인 작가가 계산하기로 사치품을 사기 위해 연간 80만 파운드의 손실이 발생한다고 추산했습니다. 

 

전반적인 행복

 

로마 시민들과 속주민들은 제국의 번영과 평화를 진심으로 느꼈고 인정했습니다. 야만족들이 통합되었고, 인구가 증가했으며, 날로 화려해지는 도시를 찬미했습니다. 

 

용기의 쇠퇴

 

오랫동안 지속될 것만 같았던 로마 제국도 서서히 하향 평준화되었으며, 참신한 천재성은 소멸되었음은 물론, 군인 정신 마저 사라져 버렸습니다. 속주들의 병사들은 개인적으로 용감했을지 몰라도 공적인 용기는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야망을 가진 사람들은 황제의 곁에서 출세하기를 바랐으며, 버려진 속주들은 나태함과 무관심으로 서서히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천재성의 쇠퇴

 

하드리아누스 황제와 두 안토니누스 황제 시대와는 달리 이 시기에는 루키아누스라는 독창적인 시인만이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철학의 한계를 넓히려는 모든 시도를 포기하고 기존의 철학자들의 권위에 맹목적인 존경심을 가졌습니다. 

웅변가들의 작품은 모방만을 부추겼고, 고전의 모범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사람은 비난받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천재성은 쇠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루키아누스(위키디피아)

 

타락

 

철학자 롱기누스는 동시대인들의 퇴보를 보고 한탄하며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유아 시절에 사지를 묶여서 자란 아이들이 난쟁이로 머물 듯이, 우리의 미숙한 정신은 편견과 노예근성으로 묶여서 더 이상 자라지 못하고, 시민 정부에서 자유롭게 행동하고 시를 쓴 고대인들의 균형 잡힌 위대성에 이르지 못한다. 

 

카시우스 롱기누스(  213 – 273 AD)는  그리스의  수사학자이자   철학 비평가 _ 그는 자유에 대한 열렬한 사랑을 가졌고,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고 다른 사람의 결점과 오류를 폭로하는 데 있어서 매우 솔직했습니다. (위키피디아)

 

[로마제국 쇠망사 1권 2장 요약]

폐쇄적이었던 그리스와는 달리 속주들에 대한 관용과 개방적인 자세로 로마는 빠르게 커져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장할 때의 창의성은 사라지고, 학문의 진보도 답보 상태에 머무르며 현실에 안주하게 된 로마는 서서히 쇠락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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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 쇠망사 1권 3장(에드워드 기번, 윤수인_김희용 옮김)

3 안토니누스 가(家) 황제들 시대의 로마 제국의 정치 체계 군주정의 개념 군주정이란, 모든 통솔권이 한 사람에게 위임되어 있는 국가의 정치체계를 의미합니다. 국민들의 감시가 부족하면 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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