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베루스 황제의 사망· 카라칼라 황제의 학정· 마크리누스 황제의 찬탈· 엘라가발루스 황제의 우행·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황제의 미덕· 군대의 방종· 로마 재정의 전반적인 상태
세베루스의 위대함과 불만
뚜렷한 목표가 있을 때는 어려움을 극복하는 과정도 즐길 수가 있지만 막상 목표에 도달하고 나서는 허탈한 감정이 들기도 합니다. 미천한 지위에서 황제의 자리까지 올라간 세베루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모든 것이었지만 그 모든 것은 아무 가치가 없었다." 라고 말했습니다.이제 세베루스는 모든 야망과 열정이 식어버렸고 마지막으로 황제의 자리를 세습하여 가문의 영광을 지속하려는 야심만 남게 되었습니다.
세베루스의 부인이자 황후인 율리아
세베루스도 대부분의 아프리카 사람들처럼 미신을 열심히 연구하고 믿었으며, 점성술에도 능통했다고 합니다. 그는 갈리아 루그두넨시스의 총독으로 있었을 당시 첫 번째 부인을 잃었는데, 두 번째 부인을 선택할 때는 점성술에 따라 오직 좋은 운세를 타고난 사람만을 찾았습니다. 결국 시리아의 에메사에서 '율리아 돔나'라는 여자를 부인으로 맞았습니다. 그녀는 엄마로서도 온화한 자질과 함께 신중한 자세를 지니고 있어서 아들의 방종을 교정해줄 수 있었던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녀는 문학과 철학을 공부해서 어느 정도의 조예를 갖춘데다가 예술가들을 후원했기 때문에 지식인과 예술인 사이에서 칭송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사생활에 있어서는 추문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두 아들 카라칼라와 게타
세베루스와 율리아 사이에든 두 아들이 있었는데, 세습 황태자라는 안이한 안도감에 젖어 있었던 두 아들은 자신을 연마하는 데 에너지를 쓰지 않고 황제 자리를 놓고 서로 적대감만 쌓고 있었습니다.
카라칼라와 게타의 반목
그들의 증오는 점점 더 심해졌고 이해관계가 얽힌 총신들의 입김으로 더 격렬해졌습니다. 결국 국민과 정치인에 이르기까지 두 개의 당파로 나뉘어져서 경쟁은 격화되었습니다. 세베루스는 공평함과 균형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였고, 급기야는 두 아들에게도 황제의 지위를 주었기 때문에 로마는 세 명의 황제를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도 보람 없이 경쟁은 더 격화되었습니다. 세베루스는 이런 권력 다툼이 결국에는 비극을 불러올 것이라는 것을 예견했습니다.
서기 208년, 칼레도니아(스코틀랜드 일대) 전쟁
이런 상황에 브리타니아에서 전쟁이 발발했다는 소식은 세베루스에게 오히려 반가운 소식이었습니다. 그는 로마에서 나태해진 두 아들을 전쟁에 참여시켜서 정신을 고양시키고자 했습니다. 통풍의 고통으로 가마를 타고 다녀야 했던 세베루스도 신하들과 함께 몸소 출정했습니다.
세베루스는 섬의 최북단까지 갔지만 매복해 있던 칼레도니아 군의 공격과 매서운 추위로 인해 로마군의 손실은 5만 명이나 되었습니다. 그러나 로마군의 집요한 공격으로 결국 칼레도니아군은 무릎을 꿇었습니다. 하지만 칼레도니아 군은 로마군이 철수하자 또 독립 상태를 회복하고자 하였고, 이에 화가 난 세베루스는 원주민을 전멸시키라는 잔인한 명령을 내렸습니다. 다행히 황제의 죽음으로 이 명령은 실행되지 않았습니다. 군사 독재를 한 세베루스 황제의 잔인한 면모를 볼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핀갈과 그의 영웅들
칼레도니아인과 로마인
칼레도니아 전쟁은 로마가 치른 많은 전쟁에 비해 그렇게 주목할 만한 전쟁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전쟁에서 로마 군과 맞섰던 핀갈 왕에 대한 이야기는 흥미롭습니다. 핀갈 왕은 관대하고 온화한 성격을 지녔으며, 칼레도니아 인들은 로마 군인들 처럼 훈련을 잘 받은 것도 아니었으며 돈에 매수된 것도 아니었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싸웠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세베루스와 아들 카라칼라의 잔인성과 핀갈 왕의 관대함과 온화함을, 돈으로 움직이는 로마군과 자유 의지로 움직이는 칼레도니아 인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물질은 순간을 움직이지만, 마음은 영원을 움직인다는 것을 역사를 통해 배울 수 있었습니다. 어느 때보다 물질에 지배되는 자본주의를 사는 우리가 깊이 새겨야 할 대목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카라칼라의 야심
서기 211년 2월, 세베루스의 죽음과 두 아들의 즉위
세베루스 황제가 병으로 자리에 눕자 큰 아들 카라칼라는 무서운 야심을 드러내며 아버지의 목숨을 단축시키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세베루스는 황제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폭군인 아들 콤모두스를 잘 교육시켰더라면 로마 시민들이 폭정으로 고통을 당하지 않았을 거라고 빗나간 부정(父情)을 종종 비난했었습니다. 그러나 막상 자신도 비슷한 일을 겪게 되자 왕으로서 자식을 교육시키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몸소 경험하게 됩니다. 그도 아들을 처벌하는 것은 쉽지 않았던 것입니다. 저자는 그의 이런 불필요한 자비심이 그의 잔인성보다 훨씬 치명적인 결과를 낳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녀교육에 있어서 한계를 두지 않는 허용은 오히려 교육에 해가 될 수 있다는 것은 교육학 이론으로도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세베루스 황제도 자식 교육에 있어서 이 한계를 설정하는 데 실패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베루스는 65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두 아들의 화합을, 두 아들과 군대에게 부탁했습니다. 카라칼라는 단독으로 황제가 되고 싶었으나 군대는 세베루스의 유언을 따르기 위해 그의 두 아들을 모두 황제로 선언했습니다.
두 형제는 칼레도니아 전쟁을 중단하고 로마로 돌아왔고, 원로원과 국민과 속주로부터 합법적인 황제로 인정받고 환영받았습니다.
두 황제의 질투와 증오
적대 관계였던 두 형제는 항상 독살과 암살에 대한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고 촉각을 곤두세웠습니다. 칼레도니아에서 로마로 돌아오던 두 사람은 같이 식사도 하지 않고 잠자리도 따로 해서 속주민들이 그들의 반목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로마에 도착한 그들은 즉시 광대한 궁전을 두 개로 나누었습니다. 그들의 궁전은 철저히 방어되었으며, 공적인 자리에서도 무장 병사들을 대동해서야 만날 정도로 서로에 대해 불신이 깊었습니다.
두 황제 사이의 제국 분할에 대한 성과 없는 협상
결국 형인 카라칼라가 유럽과 서아프리카를 통치하면서 아우 게타에게 아시아와 이집트를 양보하는 협상안이 나왔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율리와 로마 국민들은 이 방법을 반대했습니다. 분리가 되면 제국이 와해 되는 것이고,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굴복시키기 위해 전쟁을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서기 212년 2월, 게타가 살해당함
카라칼라는 동생과 화해를 한다는 목적으로 게타를 어머니 처소에 불렀는데, 동생 게타는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숨어있던 백인 대장 몇 명으로부터 죽임을 당했습니다. 카라칼라는 오히려 자신이 암살당할 위험에 처했는데 빠져나왔다며 사실을 조작하였습니다. 군인들은 게타를 더 좋아했지만, 어쩔 수 없이 카라칼라를 황제로 인정하였고, 카라칼라는 그에 대한 보답으로 국고에서 막대한 하사금을 내렸습니다. 카라칼라는 마지막 형제에 대한 예우로 케타의 신격화와 함께 성대한 장례식을 치러 주었습니다.
카라칼라의 후회와 잔혹함
카라칼라는 동생을 죽인 죄책감으로 괴로워했지만, 그에 대한 반성 없이 오히려 부정적인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게다가 그는 게타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사람을 죽였으며,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마지막 남은 딸마저 처형시켰습니다. 게타와 인연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처형된 사람이 2만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이 시기 페르티낙스 황제의 아들 헬비우스 페르티낙스는 그에 대한 풍자를 했다는 이유로 처형당했습니다. 또한 트라세아 프리스쿠스는 단지 집안 내력이 자유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처형되었습니다.
파피니아누스의 죽음
근위대장 파피니아누스의 죽음은 이 당시 로마의 분위기에서는 국가적인 재앙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는 세베루스와 가장 친한 친구였으며, 세베루스는 그를 전적으로 신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카리칼라는 아버지에게 신임받는 충신들에 대한 반감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파피니아누스는 친구이자 황제였던 세베루스의 유언에 따라 두 형제를 화합시키려고 부단히 노력했는데 그 이유로 두 형제 모두에게 반감을 샀다고 합니다.
그는 카라칼라의 회유에도 응하지 않고 당당하게 죽음을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그는 법률가로서도 탁월한 명성이 있었지만 불의에 굴하지 않는 대담한 용기와 미덕이 더욱 빛나는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제국 전체로 확대된 카라칼라의 폭정
서기 213년
티베리우스, 네로,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악행은 원로원 계급이나 기사 계급으로 한정되어서 국민들은 어느 정도 악행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카라칼라는 모든 국민의 적이었습니다.
그는 게타 살해 1년 후 로마를 떠나서 주로 속주들, 그중에서도 동방의 속주들에 마물렀는데, 그 결과 속주들은 카라칼라의 약탈과 잔혹행위의 무대가 되었습니다.
그는 모든 도시들에 웅장한 궁전과 극장을 짓게 하고는 즉시 파괴할 것을 명령하기도 했습니다. 부자들은 파산했고 국민들은 무거운 세금으로 고통받았습니다. 그는 이집트알렉산드리아에서 일어난 경미한 도발에도 시민들을 무차별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그는 세라피스 신전에 안전하게 자리잡고서 알렉산드리아 시민이나 이방인들이 수천 명씩 학살되는 광경을 지켜보고 또 직접 지휘했다고 합니다.
규율의 완화
카라칼라는 병사들의 급여와 하사금을 과도하게 인상함으로써 국고를 탕진해 가며 병사들의 배만 불렸습니다. 이는 군사력만 장악하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아버지 세베루스의 위험한 가르침의 영향이었입니다. 또한 병사들 앞에서는 위엄도 잊은 채 병사들이 황제를 만만하게 볼 정도의 분위기를 만들었으며, 일반 병사의 복장과 풍속을 모방하기도 했습니다.
서기 217년 3월 8일, 카라칼라의 죽음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모방한 카라칼라
당시 근위대장은 두 사람이 업무를 나누어 맡고 있었는데, 군사 부문은 아드벤투스가 민간 부문은 오필리우스 마크리누스가 맡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한 아프리카 점술가가 마크리누스와 그의 아들이 제국을 통치할 것이라는 예언을 했습니다. 그 점술가는 로마 총독 앞에서도 자신의 예언을 고수했습니다. 로마 총독은 심문 결과를 시리아에 있는 카라칼라 황제에게 알렸습니다.
점술가의 예언이 맞았는지 황제는 자신에게 온 편지를 개봉하지 않고 근위대장 마크리누스에게 맡기며 급한 일일 경우에만 알려달라고 했습니다. 편지 내용을 본 마크리누스는 자신의 파멸이 멀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고, 역공을 하기로 마음 먹습니다. 그는 승급에 불마을 품은 마르티알리스라는 병사를 포섭해서 카라칼라를 암살을 계획하였고, 그 계획은 성공하여 카라칼라는 마르티알리스의 단검에 최후를 맞습니다. 카라칼라는 자신이 애정을 주었던 군대가 원로원을 위협하여 신의 반열에 오르기는 했지만 그로 인해 원로원의 위엄과 종교의 권위가 실추되었습니다.
마크리누스의 즉위와 성격
서기 217년 3월
로마는 황제 없이 3일을 보냈습니다. 황제 후보로 마땅한 사람이 없는데다 군사부문의 근위대장 아드벤투스가 민간부문을 맡고 있던 마크리누스에게 황제자리를 양보했기 때문에 군대는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마크리누스를 황제로 승인했습니다.
원로원의 불만
폭군에서 벗어났다는 기쁨으로 원로원과 속주들은 새로운 황제의 승인을 기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이성을 찾고 나자 출신도 모호하고 이렇다 할 공적도 없는 사람이 황제라는 자리에 앉아서 원로원 의원들의 생명과 재산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사실이 탐탁지 않게 느껴졌고, 원로원들과 국민들 사이에서는 노골적인 불만이 터져 나왔습니다.
군대의 불만
마크리누스는 황제자리를 지키는 것도 어려웠지만 내려오는 것은 죽음을 의미했기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엎친 데 겹친 격으로 그가 카라칼라 황제의 암살자를 공모했다는 치명적인 비밀이 누설되어 떠돌자 그에 대한 경멸감과 혐오감마저 더해졌습니다. 카라칼라의 낭비와 방탕 때문에 이미 국고는 바닥났고 사회는 혼란스러웠습니다. 마크리누스는 군대를 통제할 수도 없었으며 황제로서의 리더십을 발휘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군대 개혁을 시도하는 마크리누스
마크리누스는 군대 개혁을 위해 나름대로 합리적인 방법을 택했습니다. 기존 군인들의 반발에 대비하기 위해 기존 군인들에 대한 처우는 그대로 유지하면서 신입 병사들에게는 조금 절제된 처우를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카라칼라 황제 시대에 동방에 모여 있던 병사들을 속주로 분산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시리아의 병영에서 안락한 생활을 하던 병사들은 새 황제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게 되었습니다. 기존의 처우를 보장받았던 군인들도 황제의 미래 계획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게 되었고, 일이 많은데 급여까지 삭감당한 신참 병사들은 황제에 대한 불만이 점점 더 커졌습니다. 군인들은 다시 한 번 혁명의 유혹에 빠졌습니다.
율리아 황후의 죽음
서기 218년 5월
미천한 신분에서 황후까지 되었지만, 그녀의 인생은 결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황후와 황제의 어머니 자리에서 모두 물러나게 된 그녀는 스스로 삶을 마감하였습니다. 안티오크 궁전에서 살던 황후의 여동생 율리아 마이사는 과부인 두 딸 소아이미아스, 마마이아와 함께 에메사에 은거하게 되었습니다. 두 딸에게는 각각 아들이 한 명씩 있었습니다. 그 중 소아이미아스의 아들은 태양 신전의 제사장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었습니다.
엄격했던 마크리누스 황제가 에메사에 있는 병사들에게 병영에서 겨울을 나라는 명령을 내린 후, 병영에서는 황제에 대한 불만이 터져나왔습니다. 불만에 차 있던 몇몇 병사들이 태양 신전을 방문하였고, 그곳에서 카라칼라와 닮은 제사장을 보고 감탄하였습니다. 제사장의 외할머니였던 마이사는 제사장이 카라칼라의 사생아라는 암시를 넌지시 흘렸습니다. 마이사는 허영심에서 그런 근거 없는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그녀는 밀정들까지 시켜 재물을 뿌리면서 카라칼라와 제사장이 혈연관계라는 것을 인식시키는 데 성공했습니다. 지금의 황제를 끌어내리기 위해 누구든 새로운 황제를 만들어야 했던 군대로서는 좋은 대안이 생긴 셈이었습니다.
이제 에메사의 군대는 카라칼라의 피를 이어받았다고 주장하는 젊은 안토니누스를 황제로 선언했습니다.
마크리누스의 패배와 죽음
서기 218년 6월
상황이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는 상황에서도 마크리누스 황제는 필요한 행동을 취하지 않음으로써 불행을 자초했습니다. 마크리누스는 겪고 싶지 않았으나 젊은 황제 사칭자와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황제의 근위대가 우세하여 반란군을 제압하는 것 같았으나 젊은 황제 사칭자 비시아누스의 어머니와 할머니가 유개전차에서 뛰어내려 반란군 병사들에게 동정심을 호소하고 떨어진 사기를 붇돋웠습니다. 젊은 황제도 갑자기 용기를 내어 적진으로 돌진한 반면, 마크리누스 황제는 도망을 택했습니다. 황제가 도망간 사실을 알게된 근위대는 항복을 선언해버렸습니다. 이리하여 처음으로 아시아 출신의 황제가 탄생했습니다.
원로원에 서한을 보낸 엘라가발루스
처음에 원로원은 엘라가발루스가 반역을 일으킨 것에 대해 공적으로 선언하고 강경하게 대처하고 있었지만 힘이 없었던 원로원은 막무가내로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황제가 된 젊은 황제를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대안이 없었던 원로원은 차악을 택하는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서기 219년, 엘라가발루스
새로운 황제는 화려한 스타일의 액세서리와 의상을 입었고, 황제에게 어울리지 않는 여성화된 차림과 화장을 하였습니다. 원로원은 이탈리아 출신 황제의 폭정으로 고생했는데, 이제는 여성화된 동양 전제 군주 밑에서 고생을 견뎌야 한다고 생각하니 자괴감마저 들었습니다.
엘라가발루스의 미신적 행위
엘라가발루스라는 이름은 시리아어로 신을 의미하는 엘라(Ela)와 창조를 의미하는 가발(Gabal)에서 나온 것으로 창조신이라는 의미를 띠고 있습니다. 태양에 붙이기에 적절하고 만족스러운 이름으로 여겨졌습니다.
에메사에서는 엘라가발루스라는 이름으로 태양신을 숭배했습니다. 그는 이 신에게 감사를 표하는 것이 유일한 국무였으며, 에메사의 신이 다른 모든 신의 위에 군림하는 것이 유일한 목표였습니다.
신하들은 어쩔 수 없이 페니키아식 긴 옷을 입고 황제의 신앙을 추앙하는 모습으로 의식에 참여했지만 속으로는 분노하고 있었습니다.
엘라가발루스는 '아스타르테'라는 아프리카인들이 찬미하는 달의 여신과 태양신의 결혼식을 거행했습니다. 그리고 이 날을 제국 전체의 공공 축제일로 선포하였습니다.
엘라가발루스의 방탕하고 여성적인 사치
엘라가발루스는 절제의 미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성욕과 식욕을 만족시키려고 노력했고, 이런 행동이 후대에도 오명을 남기게 된 이유였습니다. 그는 성 역할에서 남자이기도 했고 여자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수많은 첩들을 거느렸고 황후도 연이어 갈아치웠습니다. 그중에는 베스타 신전에서 억지로 납치되어 온 성처녀도 있었습니다. 그는 그의 남자 애인들에게 공직을 나누어주는 등 무절제한 행위를 하였고, 이는 국가 재정을 어렵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저자는 어떠한 통제나 눈치를 보지 않고 향락과 사치를 무제한으로 누리는 동양의 군주의 방탕을 이전의 폭군 황제들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군대의 불만
서기 211년, 부황제로 선언된 알렉산데르
병사들은 자신들이 올려놓은 황제를 수치스럽게 생각하였습니다. 그의 할머니 마이사는 자신의 또 다른 외손자이며 엘라가발루스의 이종 사존인 알렉산데르를 부황제로 세우게 하고 만약을 대비했습니다. 그러나 알렉산데르가 국민들의 애정을 얻자 질투가 난 엘라가발루스는 그를 끌어내리려는 여러 가지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급기야 그를 폐위한다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힘이 없던 원로원은 황제의 명령을 받아들였으나 근위대는 분노했습니다. 이에 놀란 엘라가발루스는 눈물로서 호소하여 위기를 모면했습니다.
서기 222년 3월, 근위대의 폭동과 엘라가발루스의 죽음
굴욕적인 상황을 견딜 수 없었던 엘라가발루스는 병사들을 시험해보기 위해 알렉산데르가 암살당했다는 의혹을 흘려보냈습니다. 병사들은 격분했고, 알렉산데르가 나타난 다음에야 흥분이 가라앉았습니다. 그러나 엘라가발루스는 폭동의 주모자 몇 명을 처형했습니다. 이에 분노한 근위대는 엘라가발루스 황제를 잔인하게 살해했고, 사지가 절단된 시체를 테베레 강에 던져 버렸습니다.
엘라가발루스가 죽고 난 후, 알렉산데르는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라는 이름으로 황제의 칭호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17살의 나이로 어렸기 때문에 통치권은 어머니 마마이아와 할머니 마이사 두 사람의 맡게 되었습니다. 할머니 마이사는 알렉산데르가 즉위 후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기 때문에 어머니 마마이아 혼자서 섭정했습니다.
세베루스의 어머니인 마마이아의 권력
로마 제국에서는 황제와 관련된 여성들이 정치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 대체적으로 부정적인 인식이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새 황제의 어머니인 마마이아는 자신의 권력이 밖으로 드러나는 것에는 조심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권력의 실체를 쥐고 싶은 야심이 있었습니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는 한 귀족의 딸과 결혼했는데, 장인은 반역죄로 몰려 처형되었고, 왕후는 아프리카로 유배되었습니다. 이 배후에는 마마이아의 입김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습니다.
마마이아는 16명으로 구성된 국가 자문위원회를 만들었고, 의장으로는 울리아누스가 선임되었습니다. 정부의 각 부처에는 미덕과 능력을 겸비한 인물들로 교체되었습니다.
자문위원회가 가장 관심을 가진 것은 황제의 인격을 형성하는 일이었습니다. 황제의 개인 자질에 따라 로마의 행복과 불행이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알렉산데르 황제는 모든 면에서 나무랄 데 없이 잘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알렉산데르는 일찍 일어나서 개인적 예배를 올렸으며, 아침 시간은 대부분 자문위원회에서 보냈습니다. 매일 일정 시간을 할애해 시와 역사와 철학을 공부했습니다. 신체 수련도 열심히 했습니다. 신체가 건장했던 알렉산데르 황제는 모든 운동에서 뛰어났습니다. 황제의 식사는 검소했으며, 황제의 여흥이 시낭송이었기 때문에 사치로 인한 소비가 줄었습니다. 궁전은 일정 시간 동안 일반에게 공개되었다고 합니다.
서기 222~235년, 로마 세계의 전반적인 행복
알렉산데르 황제의 통치가 시작된 후 로마 제국의 국민들은 40년의 학정에서 해방되어 모처럼 행복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물가는 안정되었으며, 속주들도 과중한 세금에서 해방되었습니다. 과거의 원로원 의원의 처우와는 달리 이제는 원로원 의원 누구나 황제 앞에서 수치심 없이 설 수 있었습니다.
알렉산데르는 원로원의 간곡한 부탁에도 자신의 이름에 덕망으로 고귀해진 안토니누스를 붙이는 것에 대해 거절하였습니다. 이름보다 실질적으로 선정을 베풀고자 했던 알렉산데르는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군대 개혁을 시도한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이제까지 로마 제국 황제들은 군대의 힘을 빌려 안정적인 통치를 하기도 했고, 군대의 반란으로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군대를 어떻게 운영하느냐에 따라 황제의 운명도 달라질 수 있는 중요하고 막중한 사안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알렉산데르는 어떻게 군대개혁을 시도했을지 따라가보겠습니다.
알렉산데르 황제도 군대개혁은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황제가 절약한 돈으로 하사금을 내리고 부상한 병사들을 직접 방문하여 위로하는 등 갖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군대의 개혁은 멀게만 느껴졌습니다.
근위대의 폭동과 울피아누스의 살해
디오 카시우스의 위험
근위대장이었던 울피아누스는 국민들에게는 좋은 이미지였지만, 반대로 군인들에게는 적으로 느껴졌습니다. 그 이유는 알렉산데르의 군대개혁이 울피아누스의 충고 아래 진행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당시 로마의 군대라는 조직은 단지 자신들의 이익만을 쫓는 사조직처럼 국민의 안녕보다 자신들의 이익이 우선시 되었습니다. 알렉산데르의 선정도 국민에게는 사랑받았지만 군대에서는 인정을 받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사소한 사건으로 3일 동안 내전이 벌어졌고, 시민들의 보호로 목숨을 부지했던 울피아누스는 군인들의 막무가내식의 폭력과 방화로 다시 위험에 노출될 수 밖에 없었고, 가까스로 황제의 발 아래까지 도착했지만, 황제가 보는 앞에서 무참히 살해되었습니다.
군단들의 폭동
황제의 관대함은 군대의 독이 되었습니다. 군단들도 막무가내식의 근위대를 본받아서 자신들의 특권을 주장하였습니다. 연속적인 반란으로 황제의 장교들은 살해되었으며, 황제의 권위는 손상되었습니다.
알렉산데르도 페르시아 원정 때의 왕으로써의 위엄을 지켰던 일화가 소개되었습니다. 그러나 대중들의 마음은 대개 한순간에 이루어지 또 무너집니다.
알렉산데르 황제의 어머니는 아들이 성숙했을 때도 자신에게 복종할 것을 강요해서 황제를 웃음거리로 만들었습니다. 또한 페르시아 전쟁의 패배로 인해 황제의 권위가 떨어졌으며 로마 제국은 다시 내분과 재앙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콤모두스 황제로 부터 시작된 군대에 의한 독재는 로마 시민들에게 법과 자유라는 이상을 사라지게 했습니다.
로마군 편성
로마인들의 첫 번째 정복 사업은 투스카니에 있는 베이이 공격이었는데 로마군의 미숙함으로 전쟁은 10년 동안이나 지속되었습니다. 동계 작전의 지원을 위해 시민들의 세금으로 병사들에게 정기적으로 급여를 제공했습니다. 베이이 정복 후 200년 이상 승리가 이어졌으나 로마 시민들의 부에는 그다지 영향을 주지 못했지만, 시라쿠사, 마케도니아, 아시아를 정복함으로써 부가 따라왔습니다. 로마 시민들은 세금에서 해방되었으며, 남아도는 금은보화는 사투르누스 신전에 보관해 비상 사태에 대비했습니다.
속주들의 조세
아스투리아, 갈리시아, 루시타니아 등의 속주에서는 연간 2만 파운드의 금을 속주세로 받았다고 합니다. 저자가 추정하기로 속주들의 조세가 불모지에 까지 엄격하게 행해진 것을 보면 자연 자원이 풍부한 곳은 아마도 상당한 세금이 부과되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저자는 속주들로부터의 세입은 최소한 영국 화폐로 1500만에서 2000만 파운드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했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관세-물품 소비세-동산 및 부동산의 재산세 순으로 서서히 순차적으로 세금을 징수했습니다.
사치품에는 일상용품보다 높은 관세가 매겨졌습니다. 이 시기에는 다이아몬드가 가장 비쌌고, 에메랄드는 가장 아름다운 보석으로 인식되었습니다.
물품 소비세는 모든 물품에 부가되었기 때문에 자칫 불만과 폭동의 원인이 되기도 해서, 황제는 칙령을 발표해서 군대를 유지하려면 물품 소비세에 상당히 의존할 수 밖에 없다고 호소해야 했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물품 소비세 만으로 상비군을 유지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모든 유산과 상속 재산에 대해 5퍼센트의 새로운 세금을 부과했습니다. 세금 부과에 귀족들이 분노하자,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세금 문제를 원로원에 위임했고 원로원은 혈연에 의한 상속에는 세금을 징수하지 않고, 모르는 사람이나 먼 친척에 의한 상속에 대해서만 20분의 1을 징수하게 했습니다.
자식이 없는 부유한 노인들은 작은 독재자였고, 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아부하고 봉사하는 학문까지 생길 정도였다고 합니다. 키케로도 동료 시민들의 생명과 재산을 여러 번 보호해 준 답례로 17만 파운드의 유산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점은 유산의 20분의 1을 세금으로 징수하게 되면, 두세 세대가 지나면 유언자의 전 재산이 서서히 국고로 귀속된다는 사실입니다.
황제들은 세금을 철폐하면 인기를 얻을 수 있다는 유혹이 있었지만, 제국의 힘과 자원이 고갈되는 방법은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와는 반대로 세베루스 황제의 아들 카라칼라는 자신의 방탕과 낭비를 충당하기 위해서 상속세 비율을 20분의 1에서 10분의 1로 인상함으로써 시민들이 학정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속주민들은 로마 시민으로 대우해주는 대신 로마 시민과 같은 세금을 내야 했으며, 속주민으로써의 세금도 부담해야 했기 때문에 상속세는 물론 속주세 까지 부과되는 고통을 당해야 했습니다.
세금 문제는 로마 제국 쇠망사에 있어서 주요 원인 중의 한 축을 이룹니다.
카라칼라 황제 이후 로마 시민이라는 지위보다 직업에 따른 차별이 생겼는데 군대의 고된 일은 주로 변경 지대 농부나 야만족에 맡겨졌습니다. 그들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은 적이 없어서 상황에 따라 황제를 보호하기도 했지만 제위를 전복시키는 경우가 훨씬 많았습니다.
[로마제국 쇠망사 1권 6장 요약]
군사독재를 하던 세베루스 황제가 죽은 후, 공동왕이 된 세베루스의 두 아들 카라칼라와 게타는 왕위 다툼을 벌입니다. 카라칼라는 동생 게타와 화해한다는 명분으로 동생 게타를 어머니 처소로 유인한 후, 백인대장을 시켜 어머니가 보는 앞에서 동생 케타를 살해합니다. 동생을 살해한 후 혼자 황제가 된 카라칼라는 폭정을 저지르다 근위대장 마크리누스가 사주한 군인에 의해 살해됩니다. 황제가 된 마크리누스는 원로원은 물론 군대에서도 지지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 그가 군대개혁을 하려 하였고 군인들은 마음 속으로 불만을 품고 있었습니다. 군대는 사제로 지내고 있던 엘라가발루스를 세베루스의 계승자로서 황제로 칭하고 마크리누스와 맞섰습니다. 마크리누스는 엘라가발루스와의 전쟁에서 패해 도망가던 중 체포되어 죽음을 맞이했고, 그의 아들도 같은 운명을 맞아야 했습니다. 황제가 된 엘라가발루스는 사치와 성적인 방탕을 일삼으며 도덕적 타락은 물론 국가 재정을 악화시켜서 원로원과 국민들의 원성을 사고 있었습니다. 국민들이 엘라가발루스의 사촌동생이자 부황제인 알렉산데르를 더 사랑했기 때문에 질투가 난 엘라가발루스는 부황제를 폐위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화가 난 엘라가발루스는 폐위 반대를 한 군인 몇 명을 처형했습니다. 이에 화가 난 군대는 엘라가발루스를 살해하였고 그의 시신을 테베레 강에 버렸습니다. 부황제였던 알렉산데르가 황제가 되었고 그의 어머니 마마이아가 섭정을 했습니다. 로마의 재정은 세금으로 운영되었는데 아우구스투스 황제에 의해 안정적으로 운영되던 세금체계는 무능한 황제들이 자신들의 방탕을 세금으로 충당하기 위해 세금을 과하게 부가함으로써 로마 시민과 특히 속주민들은 학정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세베루스 황제의 사망· 카라칼라 황제의 학정· 마크리누스 황제의 찬탈· 엘라가발루스 황제의 우행·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황제의 미덕· 군대의 방종· 로마 재정의 전반적인 상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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