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제국쇠망사 1권 15장(3)(에드워드 기번, 윤수인, 김희용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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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저서 읽기/로마제국 쇠망사(에드워드 기번, 윤수인_김희용 옮김)

로마제국쇠망사 1권 15장(3)(에드워드 기번, 윤수인, 김희용 옮김)

  다섯 번째 요인, 교회 행정에 적극적인 그리스도교도들

 5. 그리스교도인들은 속세의 일과 쾌락에는 관심이 전혀 없었지만, 교회의 행정 체제 내에서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내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교단의 영적인 직무뿐만 아니라 세속적 지도까지도 담당할 많은 성직자들을 임명해야만 했습니다. 교단에 대한 그들의 충성심은 때로는 로마인들이 바람직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것처럼 닮아갔습니다. 그들도 자신과 동료들이 교회의 명예로운 직책에 오르려는 세속적 야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배신한 동료들의 이단적인 오류와 당파적인 책략을 적발하여 그들에게 불명예의 낙인을 찍어서 추방하곤 했습니다. 그리스도 교회의 행정 담당자들은 교회의 행정이 관행화되면서 지혜는 교활해지고 순결성도 점점 타락해졌던 것입니다. 

 교회업무에서 능력을 인정받은 사람들은 종종 종교적인 열정까지 더해져 점점 더 가혹해지고 완고해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교회 행정의 초기의 자유와 평등

 로마 제국 내 여러 도시에 세워진 교회들은 오직 신앙과 사랑의 유대만으로 결속되어 있었으며, 그들의 내부 조직을 구성하는 기반은 독립과 평등이었습니다. 

 그러나 신도들의 모임에서 성령의 감화를 전해 주었던 예언자들은 자신들의 특별한 능력을 남용하거나 오용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특히 코린토스의 사도 교회의 경우 자만심이나 잘못된 열정으로 오랫동안 비극적 분란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부작용으로 인해 예언자들에 의한 지도체제가 폐지되었습니다. 

 그 결과 공적인 종교적 직무는 전적으로 교회가 임명하는 성직자들(주교와 장로들)에 에게 일임되었습니다. 주교와 장로라는 명칭은 처음에는 동일한 직무와 지위를 지칭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장로'는 연령보다는 관록과 지혜를 나타내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주교'는 목회자인 자신의 관할하에 맡겨진 그리스도 교인들의 신앙과 풍습을 감독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었습니다. 교구 장로들은 동일한 권위를 지니고 합동 공의회를 통해서 아직 초기 단계이던 각자의 회중을 지도했다고 합니다.

 

  주교 제도

 회중의 협의 제도에는 최소한 회중의 의견을 수집하고 그 결의를 집행할 권한을 갖는 상급자격인 '당회장'이라는 직책이 도입되었습니다. 그리고 초기 그리스도 교회는 장로들 중에서 가장 현명하고 거룩한 사람을 명예직인 종신 사제로 뽑아 일생 동안 교회를 다스리는 업무를 수행하도록 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주교'라는 명칭이 '장로'라는 명칭보다 우위를 차지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장로'는 그리스도교 원로회의 구성원이라는 의미에 머물렀지만, '주교'는 '당회장'을 의미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1세기 말 이전에 도입된 것으로 보이는 이러한 교회 행정 체계는 그 편리성과 장점으로 인해 로마 제국에 산재해 있던 모든 교회에서도 채택되었다고 합니다.

 이 관할권에서는 교회의 성사와 계율의 행정권, 그 수와 종류가 서서히 증가하던 각종 종교의식의 감독권, 주교가 각각의 직무를 할당해 주던 교회 성직자들의 임명권, 교단 기금의 관리 감독권, 그리고 신자들의 이교도 재판관의 법정에서 드러내기 싫어하는 모든 종류의 분쟁 재판권 등이 포함되었습니다. 

 이러한 권한은 잠시 동안은 사제단의 조언과 전체 신도 모임의 동의와 승인을 얻어 집행되었다고 합니다. 초기 주교들은 직책에 대한 무게감이 크지 않았기 때문에 당회장이 사망하여 공석이 되면 전체 회중이 투표를 해서 사제들 가운데 새 당회장을 선출했으며, 이때 모든 구성원들은 자신들도 성직자가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교회회의/ 교회의 연합

 각 교회는 각기 별도의 독립적인 공화국과 같은 단체를 이루고 소통은 하고 있었으나, 그리스도교계 전체를 연결하는 최고 입법 회의가 존재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신도 수가 점점 많아지자 그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2세기 말경에 그리스와 소아시아의 교회들은 지역별로 '교회회의'라는 유용한 제도를 도입했습니다. 이내 독립적인 각 교회의 주교들이 매년 봄과 가을 일정한 시기에 각 속주의 수도에서 모임을 갖는 것이 관습과 법으로 확립되었습니다. 

 

 그들이 채택한 결의안은 교회법이라 불리는 것으로, 신앙과 규율에 관한 모든 중요한 쟁점을 규정했습니다. 이 교회회의 제도는 불과 몇 년 사이에 로마 제국 전체에 수용되었습니다. 각 지방의 의회들은 서로 정기적으로 서신 왕래를 통해서 각자의 의결 내용들을 상호 통보하고 승인했습니다. 이윽고 가톨릭 교회는 거대한 연방 공화국의 형태를 취하게 되었으며, 나아가 그에 걸맞는 세력까지 획득하게 된 것입니다.

 

  주교 권위의 확대

 교회회의가 점점 개별 교회들의 입법 권한을 대체해 감에 따라 동맹 관계를 구축한 주교들은 훨씬 더 광범위한 행정권과 재량권을 행사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의 권한은 점점 세어져서 3세기에 이르러 이들의 어조는 '권고조'에서 '명령조'로 바뀌어 권리 침해 현상을 예고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교 직권으로 표명되는 교회의 통일과 권능을 찬양했는데, 이 주교 직권에서는 모든 주교가 동등한 불가분의 권리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주교는 세속에서의 일시적인 권력과는 달리 신에게 위임받아 현세와 내세에 걸쳐 권한을 행사한다는 점이 큰 차이점입니다. 

 주교들은 그리스도의 대리인이고, 사도들의 후계자이며, 모세의 율법에서 정한 대제사장의 신비로운 대리인이었던 것입니다. 주교들은 사제 자격을 부여하는 특권을 독점함으로써 성직자와 평신도 모두의 자유로운 선거권을 침해했습니다. 

 주교들은 최고의 권위는 신도들의 회의에 있음을 인정하는 겸양을 보였으나, 각자의 교구를 운영할 때는 신도들에게 절대적인 복종을 강하게 요구하는 등 이중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주교 제도가 급속하게 발전하게 된 것은 하급 성직자들의 호교심보다 카르타고의 키르리아누스처럼 야심만만한 정치가의 수완과 성자나 순교자의 품성에 어울리는 그리스도교적 미덕을 적절히 조화시킬 수 있었던 여러 고위 성직자들의 적극적인 노력 덕분이었다고 합니다.

성 키프리아누스(200년?~258년) 자신의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청빈을 실천

 

  대주교 교회의 우위/ 로마 교회 최고 지도자의 야망

 주교들의 교회회의가 열릴 때마다 ,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소수가 다수를 지배했습니다. 각 속주의 교회회의에서는 주요 도시의 주교들에게 종신 당회장직이 부여되었으며, 이내 수도대주교나 대주교와 같은 야심만만한 고위 성직자들은 동료 주교들의 권한을 강탈하기 위해 음모를 꾸몄습니다. 또한 얼마 후 수도대주교들 사이에서도 권력의 우위를 차지하려는 경쟁이 치열해졌습니다. 

 로마 교회는 규모가 크고, 신도 수도 가장 많았음은 물로 서방에서는 가장 오래된 그리스도 교단이었습니다. 서방의 교회의 대부분이 로마의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자신들의 종교를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또한 단 한사람의 사도가 관여했던 안티오크, 에페수스, 코린토스 교회와는 달리 로마 교회는 베드로와 바울이 전도하고 순교한 명예로운 곳으로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로마의 주교들은 성 베드로라는 인물 그 자체는 물론 그의 임무에 부여되었던 모든 특권을 상속받았다고 주장해 오고 있었습니다.

카를로 크리벨리의 ‘베드로(우)와 바오로(좌) by 위키미디어 커먼스

 이탈리아 각 속주의 주교들은 그리스도교의 품계제에서의 수위권(首位權, 교회에서 수장이 되는 권리)을 로마의 주교들에게 인정해 줄 생각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시아와 아프리카 여러 나라에서의 격렬한 저항으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카르타고 교회와 그 지방 교회회의에서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던 키프리아누스는 로마 교황들의 야심에 단호하게 이의를 제기하여 성공을 거두었던 것입니다. 저자는 이들의 불화를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포에니 전쟁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평신도와 성직자

 교권의 신장과 더불어 평신도와 성직자 간에 주목할 만한 구별이 나타났는데, '평신도'는 그리스도교 교인 전체를 포괄하는 것이었고, '성직자'는 종교 의식을 위해서 별도로 선정된 사람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저명한 계층이었습니다. 그들은 교단 내에서 보상과 처벌이라는 유효한 두 가지 통치 수단을 획득하여 행사했는데 , 보상은 신도들의 경건하고 관대한 기부를 말하고, 처벌은 신도들의 신앙상의 위구심(염려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뜻합니다.

 

  교회의 세입

 1. 초기 그리스도 교회는 재산 공유제를 잠시 동안이나마 채택하고 있었습니다. 초기 개종자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사도들에게 바치고 자신은 전체에서 N분의 1만 분배받는 것에 만족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교세가 발전함에 따라 이러한 제도는 급속도로 타락하여 악용되었기 때문에 점차 폐지되었습니다. 

 새 종교를 받아들인 개종자들은 사유재산을 인정받았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성직자들은 전적인 희생을 허용하지 않고 적당한 몫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모든 신도에게서 자발적 헌금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모세의 율법에 따른 십일조가 여전히 신성한 의무이며, 게다가 계율이 불완전한 유대인들조차도 소유한 모든 것의 10분의 1을 바치라는 명령을 받고 있으므로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관대함을 발휘하여 여분의 재산을 양도함으로써 공적을 쌓아야 한다는 것을 주입받고 있었습니다. 

 신도들이 어느 지역에 있느냐에 따라 교회의 수입은 많은 차이를 보였는데, 데키우스 황제 치하의 행정관들의 견해로는 로마 교회의 신도들은 종교 의식에 금은 그릇을 사용할 정도로 상당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재산을 바친 부모는 성자가 되었지만, 불행한 자녀들은 거지가 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로마 제국에서는 황제나 원로원의 특별 허가나 특별 적용 면제가 없으면 어떠한 단체에도 부동산을 양도하거나 유증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황제 치하에서 그리스도교인들이 로마 시내에서도 토지의 소유권을 주장하고 실제로 소유하도록 묵인되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교의 발전과 로마 제국의 내정 혼란으로 인해 이 법의 엄격성이 완화되었으며, 결국 3세기말 이전에 로마, 밀라노, 카르타고, 안티오크, 알렉산드리아와 이탈리아 및 각 속주의 여러 대도시에 있는 부유한 교회들은 상당한 규모의 부동산을 소유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수입의 분배

 교회의 공유 재산은 주교에게 위탁되었습니다. 주교는 사제들에게는 영적인 직무만 맡게 했고, 하위 직급인 부제에게만 교회 수입의 관리와 분배 업무를 맡겼습니다. 그러나 일부 불성실한 재산 관리인들은 교회의 재산을 관능적 쾌락에 낭비했으며, 사리사욕이나 거짓 물자 구매, 탐욕스러운 고리대금업 등을 위해서 유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리스도 교회가 재산이 축적되고 교회의 서열을 제도화하는 가운데 여러 가지 부정적인 결과가 나타나는 것을 알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교인들은 핍박받던 시대의 순수한 신앙심은 점점 약해지고 세속에서와 같은 탐욕의 유혹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파문

 2. 전원의 동의로 제정된 규정을 거부하거나 위반했다는 이유로 그리스도 교회가 주로 문책한 대상은 특히 살인죄, 사기죄, 음란죄를 범한 파렴치범들과 주교단의 판정으로 이단 선고를 받은 일체의 이설 주창자나 그 추종자, 세례 후 우상 숭배를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파문은 영적인 측면과 함께 세속적인 측면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파문당한 그리스도교인은 신도들의 봉헌물에 대한 모든 권리를 박탈당했습니다. 파문당한 사람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었던 주위 사람들로부터 혐오스러운 존재로 낙인찍혔습니다. 그런 이유로 그들은 심리적으로 불안감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천국과 지옥의 열쇠를 쥐고 있는 성직자로부터 파문당했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이단자들은 영적인 위안을 독자적인 모임에서 찾고자 노력하기도 했지만, 우상숭배로 인해 파문당했던 사람들은 다시 한번 그리스도 교단의 혜택을 받게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고 합니다.

 

  공개적인 회개

 완고한 결의론자들은 회개자들에게 교회 안의 말석이라도 주는 것을 강하게 거부하고, 죄책감에 시달리게 하여 죽음으로 회개하면 신이 받아들일지도 모른다는 여지만을 남겨두게 했습니다. 

 그러나 온유하고 존경받을 만한 사람들은 엄격한 계율을 제정하여 속죄하도록 도와주는 한편, 사람들이 그의 죄를 모방하지 못하도록 강력하게 규제하려고 했습니다.

 회개자는 공개적인 고해로 자신을 낮춘 다음 금식으로 수척해진 모습으로 남루한 참회복을 걸치고서 교회 문 앞에 엎드려 자기 죄를 용서해 줄 것을 눈물로 애원하고 신도들의 기도를 간청했습니다.

 

 죄인, 이단자, 배교자는 오랫동안 서서히 이행되는 단계적인 고행을 거쳐서 다시 그리스도교인이 될 수 있었지만, 영구적인 파문은 이전에 회개하여 주교들의 자비를 입고서도 이를 어겨서 변명의 여지가 없는 재범들에게 만 선고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 계율은 주교들의 재량으로 다양하게 집행되었는데, 갈라티아인은 세례를 받은 후에 우상신에게 거듭 희생 제의를 올렸더라도 7년간의 고행으로 용서를 받을 수 있었으며, 만일 다른 사람들을 유혹하여 자신과 같은 죄를 짓게 했더라도 추방 기간이 3년 더 연장될 뿐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같은 죄를 범한 에스파냐인은 죽음으로써도 용서를 기대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상 숭배죄는 가혹한 죄가 내려지는 17가지 죄악 중에서 첫머리에 올려져 있었다고 합니다. 저자는 특히 이 17가지 죄악에서도 주교나 장로, 심지어 부제를 비방하는 일이 용서받을 수 없는 죄악으로 여겨졌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주교 교회 행정의 권위

 교회의 인간적인 힘은 관대함과 엄격함을 적절히 혼합하고 상벌 조치를 현명하게 시행함으로써 형성되었다고 합니다. 가부장적 지배권을 행사하던 주교들은 계율을 집행할 때 속마음을 숨긴 채 자신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조치는 날로 증가하는 신도들의 이탈을 막기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것입니다.

 저자는 키프리아누스의 연설문을 살펴보면 파문과 고행(고해성사)이라는 두 가지 교리가 신앙 생활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도덕적 의무 준수를 게을리하는 것보다는 주교들의 책망과 권위를 무시하는 것이 훨씬 더 위험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불법적인 행위를 처벌하지 않고 묵인한다면, 그러한 불법적인 행위를 허용한다면, 주교 제도의 유효성은 소멸하게 된다. 나아가 이는 교회를 다스리는 숭고하고 신성한 권한의 소멸이며 궁극적으로는 그리스도교 자체의 소멸을 의미한다.(키프리아누스가 동료들의 관대한 조치를 꾸짖으며 한 말)

 저자는 키프리아누스가 세속적인 명예는 없지만, 회중의 양심과 분별력을 좌우하는 절대적 지배권을 획득하는 것이 세속적인 권력보다 한층 더 자존심을 만족시켰을 것이라 보고 있습니다.

 

 세속적인 권력은 없었지만, 그리스도교의 성직자들은 점점 세속적인 권력에 못지않는 권력을 추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