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제국 쇠망사 1권 15장(1)(에드워드 기번, 윤수인,김희용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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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저서 읽기/로마제국 쇠망사(에드워드 기번, 윤수인_김희용 옮김)

로마제국 쇠망사 1권 15장(1)(에드워드 기번, 윤수인,김희용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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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교의 발전과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의 사상, 풍습, 신도 수 및 상황· 각종 의식, 학예, 축전

 

 저자 에드워드 기번은 그리스도교의 발전 및 확립 과정을 탐구하는 것은 로마 제국 역사에서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저자가 글을 쓰던 18세기에, 그리스도교는 로마뿐만 아니라 아시아와 아프리카 연안 지대까지 전파되었을 뿐만 아니라 캐나다, 칠레에 이르기까지 확고하게 자리매김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저자 기번은 교회사 자료가 너무 빈약한 데다 신빙성마저 없어서 탐구과정이 쉽지 않음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또한 기록하는 과정에서 신자들이 신앙을 비방하는 것으로 오해할까 봐 우려하고 있습니다. 그는 역사가는 신학자와는 다르게 종교가 인간 세상에서 나타내는 오류와 타락을 밝혀내야만 하는 입장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성장의 다섯 가지 요인

 저자는 그리스도교가 급성장 하게 된 원인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습니다.

1. 유대교가 굉장히 편협적이고 배타적인 데 반해 그리스도교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2.  내세에 관한 교리

3. 초기 교회가 갖추고 있었다는 기적을 행사하는 능력

4. 그리스도교인들의 순수하고 엄격한 도덕관

5. 그리스도교인들의 단결과 계율

 

  첫 번째 요인, 유대인의 열정

 고대에는 서로 상대의 토착 신앙을 존중하는 분위기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만은 상대의 신앙을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계자들 치하에서 전쟁을 통해 자치권을 인정받았습니다. 그들의 세력은 빠르게 늘어났지만 비사교적인 풍습과 독특한 종교 종교의식, 다른 인종들에 대한 증오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그들은 어떤 폭력과 책략에도 동요되지 않았으며, 자신들만의 세계를 지켜나갔습니다. 

 로마는 다른 민족의 종교에 대한 유화정책을 폈는데 유대인들은 로마의 온갖 우상숭배에 놀라고 분노했습니다. 칼리굴라 황제가 예루살렘 신전에 자신의 상을 세우려고 했을 때도 유대인들의 거센 반발로 좌절되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모세의 율법에 대한 애착을 갖는 만큼 다른 종교에 대한 혐오를 드러내었습니다.

 

  열정의 점진적인 증가

 제 2성전 시대의 유대인들 간에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우상숭배나 이상한 의식 등의 불신앙이 있었지만, 후대의 유대인들은 절박한 재난이 닥쳐올 때마다 기적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우상숭배에 물들지 않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유대인은 자신들의 감각을 믿기보다 옛 조상들의 전통을 굳게 믿고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제2성전(헤로데 성전)

  정복보다는 방어에 더 적합한 유대

 유대인은 가나안 땅을 정복하면서 놀라운 기적과 대규모 유혈 사태로 인해 여러 이웃 민족들과 해소하기 힘든 적대 관계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우상 숭배를 하는 몇몇 부족들을 전멸시키라는 신의 명령을 수행했습니다. 그들은 다른 민족과 결혼하거나 동맹을 맺는 것조차 금지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이방인을 종교 집회에 참석시키는 일도 금지되었습니다. 그들은 외부 사람들과 더 많이 교류할수록 견문은 확장될지언정 편협적인 사고는 여전했다고 합니다. 

 저자는 모세의 종교가 어느 단일 민족과 특별한 국가만을 위해 성립된 종교처럼 보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전이 파괴되기 전까지 모든 유대인 남자들은 1년에 3회 주 야훼 앞에 모습을 나타내야 했기 때문에 밖으로 퍼져 나갈 수 없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과의 교류를 기피했으며, 자신들의 율법을 최대한 지켜 나갔습니다. 그들의 율법은 반대의 습성과 선입관을 가진 민족들에게는 증오와 혐오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설령 유대교로 개종하기 원하는 사람도 할례 의식에 대한 두려움으로 개종을 못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교의 더 자유로운 열정

 그리스도교는 모세의 율법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개방적인 모습으로 세상에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희생 제의는 메시아의 대속(예수께서 죄인들 대신 죽음)으로 완성되었기 때문에 폐지되었습니다. 제식 율법은 영적인 예배로 계승되고 피의 세례는 물의 세례로 대체되었습니다. 이제 신의 은총은 누구에게나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모든 인류는 누구나 신의 은총을 받을 수 있고,  개종자는 신의 은총을 전파할 의무와 그것을 거절하면 경고할 의무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신앙심이 있는 유대인의 완고함과 분별력

 저자는 유대식 그리스도교인들이 모세 율법의 신성한 기원과 창조주의 절대적인 완전성을 내세워 꽤 그럴듯한 주장을 폈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해박한 신학자들이 구약성서의 모호한 표현이나 사도들의 애매한 행동들을 충분히 잘 해명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저자는 유대식 그리스도교에 대해 이단 판결을 선고한 것은 적절한 일이었다고 조심스럽게 말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나사렛 교회

 저자는, 예루살렘 교회의 초대 주교 15명은 모두 할례를 받은 유대인들이었고, 그들이 주재한 종교 집회에서 모세의 율법과 그리스도의 교리가 결합된 것으로 보아 유대교의 흔적이 얼마나 강하게 남아 있었는지를 볼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기초를 닦은 사람들은 나중에 나사렛파로 불리게 된 유대인 개종자들이었지만, 수많은 이교도 개종자들에게 수적으로 압도당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교도들은 유대인들이 성전과 도시를 잃은 이유가 신이 유대인을 업신여겼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으며, 그리스도교인들은 신이 노여워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고 합니다. 

 나사렛파 신도들은 폐허가 된 예루살렘을 떠나(강제이주) 펠라라는 소도시에서 약 60년 동안 고립 상태로 미미한 교세로 교회를 이어가면서 점차 쇠퇴해 갔다고 합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을 자주 방문하여 위안을 구하면서, 언젠가는 다시 그곳으로 귀환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거듭된 반란에 격분한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시온 산 위에 아일리아(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성씨) 카피톨리나(유피테르 신전이 있는 로마의 언덕)라는 이름의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여 신민도시의 특권을 부여했습니다. 그리고 이 도시에는 유대인의 출입이 금지되었고 명령을 어긴 사람을 처벌하기 위해 로마 수비대 1개 대대를 배치했다고 합니다.

나사렛파는 이 금지령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탈리아 라틴 속주에서 태어난 이방 출신의 수도원장 마르쿠스를 주교로 선임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설득에 따라 나사렛파 신자들 대다수는 100년 이상 지켜온 모세의 율법을 포기했습니다. 

저자는 그들이 자신들의 풍습과 선입관을 희생시킴으로써 하드리아누스의 식민도시에 자유로이 출입하게 되었으며, 카톨릭 교회와의 결합을 더욱 공고히 다지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에비온파

 이제 마르쿠스 주교와 함께 행동하기를 거부한 일부 나사렛파 신도들에게 이단과 종파 분열이라는 죄목이 전가되었습니다. 그들은 펠라의 거주지를 지키면서 시리아의 베로에아에 작은 교회를 세우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에비온파라 불렸는데, 그 이유는 나사렛파라는 이름이 과분하다는 이유로 모멸을 주기 위한 목적으로 불렀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재건되고 몇 년이 지나자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모세의 율법을 계속해서 지키는 사람에게 구원의 가능성이 있는가에 관해 유스티니아누스는 긍정적인 답을 했습니다. 

 유스티아누스도 유대식 그리스도교인들은 이런 경우 구원받을 희망이 없다고 여기고 있으며, 그들의 배타적인 태도를 솔직하게 인정했습니다. 따라서 저자는 모세를 따르는 사람과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과의 분리벽이 생길 수밖에 없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에비온파는 유대교의 입장에서는 배교자라 비난 당하였고, 그리스도교의 입장에서는 이단이라는 이유로 배격당하게 되었습니다. 에비온파는 4세기까지는 명백을 이어갔으나 그 후에는 그리스도 교회나 유대 공회당으로 흡수되었다고 합니다.

 

    그노시스파

 정통파는 모세의 율법에 관해 공정한 중요의 입장을 취했으나, 여러 이단 종파들은 대부분 극단적인 오류나 과정에 빠져 들었다고 합니다. 에비온파는 유대교의 정통 진리관을 고집하였고, 모세의 율법을 절대로 폐지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습니다. 

반면 그노시스파는 모세의 율법이 불완전하고 생각했으며, 그것이 신의 지혜로 제정되었을 리가 없다고 추론했습니다. 그들은 대개 육신의 쾌락에 반대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옛 유대 조상들의 일부다처제와 다윗 왕의 여자관계, 그리고 솔로몬의 후궁을 집요하게 비난했습니다. 또한 그들은 가나안 땅에서 유대인들이 원주민들을 몰살한 일을 인도주의와 정의에 관한 문제에서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에 대해 확답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팔레스타인조차도 우상 숭배하는 적들에 대한 동정심을 발휘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노시스파는 인간의 창조와 타락에 관한 모세의 설명을 신성 모독적인 조롱으로 여겼습니다. 

 그노시스파는 불경스럽게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편파적인 존재로 폄하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온 것은 인간을 여러 가지 오류에서 구원하여 진리와 완전성의 새로운 체계를 보여 주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유대교 신학자들은 그노시스파의 궤변을 받아들이면서도 자신들의 교리는 알레고리에 가려 공격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노시스파의 분파, 발전 그리고 영향력

 그노시스파는 가장 교양 있고 학구적이며 부유한 그리스도교 종파로 명성이 높았다고 합니다. 그들은 거의 이방 종족 출신이었고, 주로 시리아나 이집트 출신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들의 교리는 혼합되면서 50개가 넘는 분파로 나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 가운데 유명한 분파로는 바실리데스파, 마르키온파, 니케우스파 등이었다고 합니다. 그노시스파의 발전은 급속하고도 광범위했습니다. 

 그들 대다수는 2세기에 생겨나서 3세기에 번성기를 누렸고, 4~5세기가 되어 쇠퇴했다고 합니다. 정통 교회도 발전하는 데 있어서 궁극적으로는 그노시스파의 덕을 봤다고 합니다. 

 

   고대의 신들로 간주된 악마들

 정통파, 에비온파, 그노시스파와 유대인들의 종교의 공동점은 우상 숭배를 증오했다는 점입니다. 악마들은 인간을 자신의 죄와 불행에 동참시킬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신전에 숨어있다가 온갖 제전과 희생 제의를 제정하고 신화를 꾸며 내고 신탁을 내렸으며 종종 기적을 행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교인들은 민족 종교에 대한 사소한 존경심을 표시하는 것조차 악마에게 바치는 직접적인 경배의 표현인 동시에 신의 주권에 대한 반역이라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우상 숭배를 혐오하는 그리스도교 의식· 예술

 각 민족 종교는 단순한 교리만이 아니라 사회생활과도 연관이 깊었기 때문에, 그 당시 그리스도교인들은 우상숭배에 물들지 않는 것이 무척 어렵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로마에서는 공직자들이 회의를 앞두고 제사를 올렸습니다. 또한 로마에서는 축제일에 경기를 거행하거나 극장 공연을 했는데, 그리스도교인들은 이런 행사를 질색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교인들은 교리를 지키위해 사회적으로 고립되어야 할 경우가 많았으며 심지어 가까운 친인척의 행사에도 종교적 신념으로 참여할 수 없 의식 때문에 멀어지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우상을 만들거나 꾸미는 일에 관련된 직종도 우상 숭배에 오염된 것으로 간주했습니다. 또한 그 당시의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신화는 악마들의 영광을 찬양하기 위한 것이었고, 호메로스나 베르길리우스는 악마들의 뛰어난 종복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축제

 저자는 1월의 달력에 가득 씌여 있는 축제날을 그리스도교인들이 얼마나 혐오했을지 짐작이 간다고 말했습니다. 고대 관습에 따른 국가적인 축제일에 모든 가정이 현관을 등불과 월계수 가지로 장식하고 머리에 화관을 썼는데, 그리스도교인들은 이러한 국가적 축제일에 행하는 의식을 국민으로서 해야 하는 의무와 그리스도교인으로써 하지 말아야 하는 종교적 신념 사이에서 괴로워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교에 대한 열정

 그리스도교인들은 교육과 습관에 따라 행해오던 의식들에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이를 재확인하는 기회로 삼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들 입장에서 보면 악마들의 제국을 상대로 더욱 열성적으로, 그리고 성공적으로 성전을 수행해 나갔다고 합니다. 

 

   두 번째 요인, 철학자들 사이의 영혼 불멸에 대한 교리 

2. 고대 철학자들은 죽음이 인간을 삶의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준다는 논지를 주입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인간의 영혼과 육체를 별개의 실체로 인식했으며, 영혼은 육체의 감옥에서 풀려나면 한층 더 높은 수준의 미덕과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인식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키케로가 고대 철학자들이 주장한 영혼의 불멸성에 대해 고대 철학자들의 무지와 오류라고 기술했듯이, 저자 또한 고대 철학자들의 이러한 의견을 몹시 불합리한 결론이라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와 로마의 이교도들 사이의 영혼 불멸에 대한 교리

 저자는 로마의 민간 종교들이 비가시적 세계에 존재하는 영혼의 불멸성을 주장하는 데 관한 결함을 정리했습니다.

첫째, 신화 체계를 입증할 확고한 증거들이 없었다.

둘째, 지옥에 관한 묘사는 화가와 시인들의 상상력에 맡겨져 있었다. 터무니없이 꾸며낸 이야기들이 불합리하게 뒤섞여있었다. 

셋째, 그리스와 로마의 다신교도들은 내세에 관한 교리를 신앙의 기본 신조로 생각한 일이 거의 없었다. 그들의 기원에는  현세의 행복에 대한 갈망과 내세에 대한 무지가 드러났다. 

 

   유대인들 사이의 영혼 불멸에 대한 교리

 저자는 본질적인 종교원리가 유대인들에게 명확한 언어로서 계시되어 세습신관들에 의해 전해졌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모세의 율법에서는 불멸의 교리가 빠져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이집트의 노예 생활과 바빌로니아의 포로 생활을 하는 동안 그들의 희망과 근심은 모두 현세라는 좁은 범위로 한정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에즈라가 유대인의 옛 종교 기록들을 복원한 후에 예루살렘에서는 사두가이파와 바리사이파라는 두 가지 종파가 생겨났다고 합니다. 주로 부유하고 명망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사두가이파는 모세의 율법을 엄격하게 준수했으며, 영혼불멸설은 배격했습니다. 바리사이파는 성서의 권위에 동방의 철학이나 종교에서 몇 가지 사변적인 교의 도입했기 때문에 사두가이파는 바리사이파의 전통을 거부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바이사이파는 엄격한 생활 태도로 유대 민중 대다수를 그들 종파로 끌여들였고, 신정 일치(제정 일치 사회)의 하스몬 왕조 치세에는 영혼 불멸설이 유대 교회 내의 지배적인 의견으로 받아들여졌으며, 내세관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영혼 불멸설을 인정했다고 하더라도 영혼 불멸에 관한 교리는 그리스도의 권위와 모범으로 신성한 진리라는 재가를 받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교도들 사이의 영혼 불멸에 대한 교리

 초대 그리스도 교회에서는 비록 실행되지는 않았지만 이 세상의 종말과 천국의 도래가 임박했다는 믿음이 보편화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예언을 한 사람은 예수의 사도들이었습니다. 예수의 재림을 기대했던 그리스도교인들도 17세기라는 긴 세월이 지나면서 영광스러운 재림을 너무 재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알려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저자는 이러한 오류가 오히려 그리스도교인들이 심판자의 출현을 두려워해야만 하는 바로 그 공포의 순간을 기대하면서 살게 된 이유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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