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만족의 침입이 시작될 때까지의 게르마니아 정세, 데키우스 황제 시대· 서기 248년
저자는 앞서 8장에서 페르시아의 정부와 종교에 대해서 알아보았는데, 이는 로마 제국의 쇠망과 관련되기 때문에 살펴볼 가치가 있다고 밝혔습니다.
9장에서는 게르마니아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게르만족은 처음에는 로마 제국에 저항하였지만, 이내 침략하였고, 마침내는 로마 제국을 전복시켰기 때문에 보다 비중 있게 다루어질 필요가 있다고 합니다. 근대 유럽에서 가장 문명화된 나라들이 게르마니아의 숲 속에서 비롯되었고, 그들의 조악한 제도에서 근대 법률과 풍속의 시초의 원칙이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최초의 역사가 타키투스가 게르만족에 대해 상세하게 묘사해 놓았기 때문에 여기서는 그곳의 기후와 풍속과 제도에서 중요한 부분만 간략하게 정리해보고자 하였습니다.
고대게르마니아의 영토는 서쪽으로는 라인 강에 의해 갈리아 속주와 구분되었고, 남쪽으로는 도나우 강에 의해 일리리쿰 속주와 구분되었습니다. 다키아 속주 쪽은 카르파키아 산악 지대로 가로막혀 있었습니다. 동쪽의 국경은 게르만족과 사르마티아족이 서로 우호적이기도 하고 적대적이기도 하면서 애매하게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고대 유럽의 기후에 대한 가설은 많지만 합리적으로 입증할 만한 자료를 바탕으로 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로마의 속주들을 둘러싸고 있던 라인 강과 도나우 강은 완전히 결빙되어서 엄청난 무게도 충분히 견뎌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고대 겨울에는 게르만족이 로마를 침공할 때 병사들이 군수품을 아무런 어려움 없이 운반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또한 과거에는 추운 곳에서만 발견되는 순록이 살 정도로 기온이 낮았다고 합니다. 저자가 살던 18세기의 캐나다가 고대 게르만의 기후와 비슷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 캐나다는 센 강과 템스 강이 전혀 얼지 않는 계절에도 세인트로렌스 강은 정기적으로 결빙되었다고 합니다. 저자는 나무를 벌채한 지역이 태양 빛을 받았고, 습지는 배수가 되었고, 농사로 인해 기후가 올라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많은 저술가들이 게르마니아의 기후가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가설을 내놓고 있지만 보다 합리적인 접근을 해보면 그들은 대부분 남부 유럽인들보다 키가 크고, 체구가 컸으며 노동보다는 격렬한 활동에 적합했다고 합니다. 그들에게 추위는 쉽게 극복할 수 조건이지만, 반대로 더위에 노출되면 병들고 무기력해졌습니다.
타키투스는 그 지역의 야만족들을 인디게나이, 즉 그 땅의 원주민이라고 불렀습니다. 헤르시니아 산림지대를 방랑하던 여러 야만 부족들이 서서히 결속되면서 게르마니아라는 이름과 민족이 탄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저자는 스웨덴 웁살라 대학의 루드베크 교수의 황당한 주장을 소개하면서 대중들은 합리적인 추측보다 신화와 같은 이야기를 더 좋아하고 잘 믿는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타키투스 시대의 게르만족은 문자를 사용할 줄 몰랐다고 합니다. 문자의 사용은 문명인과 야만인을 구분하는 주요 잣대라고 말하면서 지식인은 독서와 명상을 통해 간접적인 경험을 할 수 있지만, 농부는 한정된 시간을 살며 정신의 작용은 소와 다를 바가 없다고 했습니다. 농부도 농사의 경험이 문자는 아니지만 머릿속에 정리되어 있을 것 같은데 저자가 농부의 정신을 소와 비교한 것은 너무 단편적으로 농부를 이해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물론 저자의 주장처럼 문자로 정리를 해놓지 않으면 지식의 발전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에는 누구나 동의할 것입니다.
18세기 당시 독일에는 2300개 정도의 도시가 있었는데, 고대 게르마니아에는 도시라고 할 만한 곳이 90개를 넘지 않았다고 하는데, 그나마도 숲 한가운데 허술하게 요새를 만들어놓은 정도라고 합니다. 타키투스는 게르만족이 로마를 오히려 감옥과 같은 장소로 여겨 경멸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주로 독립적으로 집을 지었고, 변변한 옷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으며, 가장 중요한 재산은 가축 떼 정도였습니다. 게르만족은 매년 경작지를 새로 분배하였는데, 오히려 이런 제도가 안정적인 농업발전을 못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게르마니아에서 금,은, 철은 심하게 부족했다고 합니다. 그들에게는 광맥을 찾아낼 기술과 끈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가장 중요한 생산품인 무기류에서 철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 증거를 뒷받침해 줍니다. 화폐의 사용도 없어서 물물교환을 하였습니다. 저자는 인간 활동에 기본인 화폐와 철을 이용하지 않는 인간들은 야만 상태에서 벗어나기는 어렵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야만족들의 공통점은 무기력한 나태함과 미래에 대한 무관심으로 보고 있습니다. 문명 상태에서는 사회 구성원들이 서로 연결되고 바쁘게 시간을 보내는데, 게르만족에게는 사회생활이라는 것이 없었다고 합니다. 집과 가족을 돌보고 땅과 가축을 관리하는 일은 노인들과 아이들, 여자들과 노예들에게 맡겨졌습니다. 게으른 전사들은 먹고 자는 동물적인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으로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격렬한 감정을 일으키는 전쟁이었습니다. 평화 시에는 음주와 도박에 빠져 살았는데, 자유와 목숨을 건 도박도 하였고, 그 결과 매를 맞고 노예로 팔려가는 것까지 감수했습니다.
게르만족이 밀이나 보리로 맥주를 만들어 부패하면 포도주 맛을 내는 술을 마실 때, 이탈리아와 갈리아에서는 품질 좋은 포도주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포도를 이식하려 하지도 않았고, 무역에 필요한 상품을 생산해내려는 노력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힘들게 포도주를 생산하는 것보다 맛있는 술을 생산하는 지방들을 침략하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고대 게르마니아의 기후는 샤를마뉴 대제 이후 10세기에 걸친 노력으로 크게 완화되었으며 토지 또한 비옥해졌습니다. 그들은 토지를 개간할 생각은 하지 않고 얼마 안되는 땅에서 어설픈 수준의 경작을 하면서 한탄만 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농산물을 늘리기보다 젊은이들을 국외로 이주시키는 임시방편을 쓰는 편을 택했습니다. 저자는 고대의 유럽 북방에 거주한 인구가 저자가 살고 있는 18세기보다 많았다는 것은 합리적으로 맞지 않고, 오히려 고대의 북방의 인구가 18세기 보다 훨씬 적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게르만족은 야만 상태에 머무는 보상으로 자유로운 삶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저자는 인간의 욕망과 소유야말로 전제 정치를 허용하는 가장 강력한 원인이라고 했습니다. 게르마니아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정부의 형태는 민주 정체였는데, 실제적인 법률보다는 가문이나 용맹, 혹은 웅변술이나 미신 등에 의해 제어되는 경향이 있었다고 합니다.
게르마니아 부족들은 원시적이지만 자유주의적인 정부 형태에 만족했습니다. 부족 전사들의 회의는 정해진 기간 동안 혹은 비상 사태가 발생했을 때 소집되었습니다. 게르만족은 정의나 정책을 고려한 발언은 분노와 경멸로 일축하면서 혐오하였고, 반면에 선동적인 연설가의 폭력을 기반으로 한 제안에 대해서는 창과 방패를 두드리면서 열렬한 찬성의 뜻을 표시했습니다. 게르만족은 항상 무장을 하고 회의에 참석했기 때문에 무기를 사용하게 될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저자는 폴란드 의회에서 폭력적인 소수당이 다수당을 굴복시키는 경우를 예로 들며 게르만족의 무식과 폭력성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부족의 장군은 위험이 닥쳤을 때 선출되었는데, 가장 용감한 전사가 지명되었으며, 이 지도자는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특별한 권한을 부여받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권한은 전쟁이 끝나면 소멸되었고, 게르마니아 부족들 또한 공동의 최고 지도자의 개념을 일체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부족 총회에서는 각 지방의 족장을 선출해서, 각 지역 내의 분쟁에 대한 조정을 했는데, 족장을 선출할 때는 개인적 자질뿐 아니라 출신 가문도 매우 중시되었습니다.
족장들의 권한은 토지에 대한 절대적인 권한을 쥐고, 매년 토지를 새롭게 분배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법적인 형벌은 내릴 권한은 없었습니다. 저자는 이에 대해 개인적인 명예나 독립성에 대한 숭고한 관념에 고무되어 있어서 오히려 중요할 수 있는 기술이나 산업에 대한 관념이 없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게르만족에게 족장의 권위는 개인의 의지에 반하여 복종을 강요할 만큼 강력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가문이 좋은 청년들은 명망 높은 수령의 충성스러운 부하가 되기 위해 경쟁했고, 수령들은 용맹스러운 부하를 얻기 위해 경쟁했습니다. 수령들은 승리를 위해 싸우고, 부하들은 그 수령을 위해 싸웠습니다. 어떤 작가는 봉건제의 뿌리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고 했지만, 게르만족은 선물에 있어서 어떤 조건이나 의무 따위는 부과하지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그 성격이 다르다고 합니다.
게르만족의 여성들은 거의 예외없이 정숙했다고 합니다. 일부다처제의 풍습도 부족장들을 제외하고는 일체 없었다고 합니다. 이혼은 관습에 의해 금지되었고, 간통은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로 취급되었습니다. 타키투스의 저서에서는 로마 귀부인들의 방탕과 게르만족 부인들의 정절을 비교한 내용이 있다고 합니다.
문명화된 생활에서는 남녀간의 교류에 있어서 타락할 수 있는 요소가 많지만, 게르만족 부인들은 먹고 살기에도 바빠서 그런 타락의 위험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었다고 합니다. 게르만족은 여성을 신뢰하고 존중했으며, 중요한 일은 서로 의논할 만큼 여성의 지혜를 높이 평가했습니다. 게르만족 여성들은 패전했을 경우, 자녀들을 죽이고 자신들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합니다. 그녀들은 외모에도 거의 신경 쓰지 않았고, 그들의 최고의 덕목은 정절이었습니다.
게르만족은 태양, 달, 불, 땅 같은 가시적인 자연 대상들과 가상적인 신들을 숭배했습니다. 그들은 점술에 의지했으며, 인간 제물이 신들이 가장 좋아하는 제물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신전을 만들지 않은 것은 탁월한 이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건축술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신은 숲속에 있다고 믿었으며, 보이지 않는 신에 대해 경외감을 느꼈습니다. 성직자들은 무식하고 문맹이었지만, 자신들에게 유리한 모든 종류의 술책들을 경험을 통해 습득하고 있었습니다.
게르만 성직자들은 족장들도 감히 행사하지 못했던 사법권을 행사했습니다. 종교적 권위는 주로 부족 총회에서 소란을 방지하고 질서를 유지하는 목적으로 사용되었지만, 넓게는 민족의 복지 향상 같은 보다 큰 관심사로 확대되기도 했습니다.
성직자들은 게르만족의 사나운 열정을 순화시키기보다는 욕심에 의해서 전쟁을 부추기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들은 윤회사상을 믿었던 것 같고, 전쟁터에서의 장렬한 최후는 현세에서나 내세에서의 행복한 미래를 보증하는 최선의 준비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이 시대의 음유시인들의 시는 문명인들의 시와는 달리 전쟁 현장이나 승리의 축하연이 베풀어 질 때 읊어졌기 때문에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명예욕과 열정, 죽음에 대한 경시 등은 게르만족의 불변의 정서가 되었습니다.
게르만족은 호전적이었지만 바루스 장군(로마 역사상 최악의 패장)의 패배로부터 데키우스 황제 치세까지의 250년이 넘는 긴 기간 동안 로마의 속주들을 침략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무기와 훈련이 부족했고, 내부 분열로 인해 다른 곳에 관심을 둘 여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게르만족은 철과 황금이 없었는데, 그들이 철제 검이나 긴 창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는 데서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의 무기인 프라메아에는 끝에 좁고 날카로운 철이 대어져 있는 투창이었는데, 먼 거리에서 던지기도 하고 상대를 찔러 죽이는 데도 사용했습니다. 게르마니아 기병대는 이런 창과 방패 하나로 만족했습니다. 보병대는 추가로 수많은 화살을 휴대했다가 그것을 직접 던졌습니다. 군장이라고 해봐야 헐거운 망토가 전부였습니다. 게르만족은 기병대도 있기는 했지만, 주된 군사력은 보병대였습니다. 그들은 군사교육을 체계적으로 받지 못했기 때문에 대부분 첫 번째 전투에서 전 병력을 쏟아부었고, 재집결하거나 후퇴하는 법은 알지 못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용맹만으로 전투에 뛰어들었던 것입니다.
로마군이 게르만족들을 보조군으로 채용한 것은 위험한 조치였습니다. 그들에게 점차 전술과 전략을 가르쳐 주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걱정을 실제로 나타나기도 했는데 바타비아인(서기 69~70년)은 자유와 야망을 성취하기 위해 바타비아 출신 8개 대대를 이끌고 갈리아 지방으로 진출해서 트레브와 랑그르라는 도시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였습니다. 그는 이 과정에서 로마군에서 익힌 기술을 사용한 것입니다. 이 책에서는 반란을 일으킨 키빌리스가 명예로운 조약을 맺어 자신과 동포들의 안전을 확보했다고 하는데, 바타비아의 수도인 울피아 노비오마구스 바타보룸(네이메헌)은 파괴되고 주민들은 2km 하류에서 무방비 상태로 도시를 재건해야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반란의 주동자인 키빌리스는 바타비아에서 추방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만약 고대 게르마니아의 여러 부족들이 서로 연합했다면 그 파급력은 엄청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내분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욕을 당하면 용서할 줄 몰랐고, 쉽게 흥분하고 분노했습니다. 수령들의 개인적 불화는 동맹국으로까지 확산되기도 했습니다. 계속적인 분쟁으로 인해 강력했던 나라들은 국경 지대를 변경 지대로 둘러싸고 싶어 했습니다. 변경 지대가 완충 작용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 나온 게르마니아 부족 중 브룩테리족은 로마군이 아니라 이웃 부족에 의해 완전히 절멸되었다고 합니다. 로마군은 야만족들의 불화로 어부지리를 얻은 것입니다.
로마인들은 이제 직접 싸우기보다 야만족들을 분열시키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위엄을 가장 한 채 뒤로는 온갖 회유와 술책을 썼습니다. 게르만족 사이의 모든 분쟁은 로마의 음모에 의해 조장되고 촉진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합니다. 또한 아무리 공공의 이익일지라도 개인적인 이익 앞에서 모두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마르쿠스 안토니누스 황제 치세의 로마인들에 대항하여 게르만족이 대연합하여 싸운 적이 있었는데, 오랜 전쟁 끝에 결국 로마에 무릎을 꿇었고, 전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콰디족과 마르코만니족은 가장 가혹한 벌을 받았습니다. 이 연합이 로마 제국의 첫 두 세기 동안 유일하게 결성된 게르만족의 연합이라고 합니다.
작가는 9장을 마무리하며 게르만족의 불규칙한 이합집산과 끊임없는 이동이 착시현상을 일으켜서 그들의 인구수를 상당히 늘려서 생각하게 만든 것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오류는 같은 대상이 이름만 바뀌어 계속 반복되거나 때로는 화려한 호칭들이 시시한 대상에게까지 남용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을 간과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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