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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타크세르크세스에 의한 군주정 복고 후의 페르시아 정세 그의 성격과 원칙
로마가 안정기에 있었을 때는 로마의 변방에서 발생하는 반란들은 로마의 번영에는 거의 영향을 미치치 못했지만, 군대에서 비롯된 혼란으로 무정부 상태에 이르자 북부(게르만족)와 동부(페르시아)의 민족들이 과감한 공격을 감행했습니다. 그 공격의 정도도 점점 가공할 만한 공습으로 바뀌어갔습니다.
아시아는 유럽에 앞서 고대에도 도시를 형성하고 제국의 지배 아래 전제 정치를 경험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동방은 아시리아가 지배했는데 쇠퇴하여, 메디아와 바빌로니아에 의해 양분된 후 페르시아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페르시아 군주들은 아시아 머물지 않고 더 큰 세상을 지배하기를 원했습니다.
키루스 왕의 후손인 크세르크세스 왕은 200만 명(학자들은 30~50만 명으로 추정)의 사람들을 이끌고 그리스를 침공했습니다. 이후 마케도니아의 필리푸스 황제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3만 명의 정예 병사들만으로 많은 페르시아 군을 무찔렀습니다. 이렇게 확립된 마케도니아의 동방 지배력도 셀레우코스 왕조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그러나 셀레우코스 왕조와 유목 민족인 파르티아 왕국도 아르타르크세르크세스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는 사산 왕조라는 새로운 왕조를 창시했는데, 이 왕조는 훗날 아랍인의 침공으로 무너질 때까지 페르시아를 지배했고, 로마에는 치명적으로 작용했습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는 유목 민족인 파르티아의 마지막 왕 아르타바누스 5세의 군대에 복무하면서 높은 명성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는 뛰어난 자질로 인해 오히려 추방을 명령받자 반란을 일으켰던 것 같습니다. 그는 비천한 출신의 사생아라는 설과 페르시아 왕가의 고대 후손이라는 설이 있는데 진실은 알 수 없습니다. 파르티아 인들은 대규모 전투에서 3번 패배했는데, 마지막 패배에서 왕인 아르타바누스 5세가 전사하자 왕국의 기상은 꺾이고 말았습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는 왕권을 승인받았고, 아르타바누스 5세가 쓰던 왕 중의 왕이라는 칭호도 사용했습니다. 그는 칭호가 주는 허영심보다 키루스 왕 시대(아케메네스 왕조)의 페르시아 제국의 명성을 다시 부활시키겠다는 다짐을 불태웠습니다.
조로아스터의 개혁
1. 페르시아가 오랜 기간 마케도니아와 파르티아의 지배하에 있던 동안에는 유럽과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은 서로의 미신과 종교를 받아들여서 서로 타락시키고 있었습니다. 아르사케스왕조(파르티아 제국)는 조로아스터교를 믿었지만, 다양한 우상이 혼합되어서 조로아스터교가 타락했다고 합니다. 페르시아의 고대 예언자이며 철학자인 조로아스터(자라투스트라)는 여전히 숭배되었지만 70개의 교파로 나뉘고 논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는 여러 종파를 통합하고 비신도들을 논파하려는 목적으로 전국에 있는 마기(사제)를 소집했습니다. 처음에는 경멸과 무시를 당해온 마기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아서 8만 명에 이르렀지만, 점점 줄어 마침내는 7명 만이 남았습니다. 7명 중에 가장 신앙이 깊었던 성직자인 에르다비라프가 동료들로부터 최면용 포도주 3잔을 받아서 마신 후 깊은 잠에 빠졌습니다. 그는 깨어난 후 자신이 천상으로 올라가 신과 단독으로 회담을 가졌다고 이야기함으로써 조로아스터교의 교조가 정확하고 권위 있게 확정되었습니다.
페르시아의 신학, 두 개의 원칙
조로아스터교의 대원칙은 잘 알려진대로 이원론입니다. 바로 선과 악입니다. 선의 원칙은 영원한 빛 속에 싸여 있는 반면 악의 원칙은 영원한 어둠 속에 묻혀 있다고 합니다. 선의 신 오르마즈드는 선한 인간을 창조해서 그의 아름다은 세상을 행복의 요소들로 가득 채워 놓았고, 세상의 질서를 관장했습니다. 그러나 악의 신 아리만은 오르마즈드의 조화로운 세계에 침입했습니다. 그 이후 선과 악은 서로 혼합되어 움직이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유용한 식물에서는 해로운 독이 생겨났고, 자연재해로 인해 자연의 부조화가 생겼으며, 인간 세계에도 악과 불행으로 영원히 흔들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오르마즈드의 선택을 받은 페르시아인만이 마지막 날의 승리의 영광을 위해 싸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승리의 날에 오르마즈드를 도와 아리만을 물리치면 그의 추종자들은 다시 어둠에 갇히고, 선이 우주의 영원한 조화와 평화를 유지하게 된다고 합니다.
종교적인 숭배
조로아스터교의 신학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견해가 많지만, 연구한 사람들은 오히려 매우 단순하다는 사실에 놀란다고 합니다.
다신교였던 헤로도투스는 그들이 유일신을 주장하면서도 자연의 여러 요소를 숭배한다고 비난했습니다. 그에 대해 그들은 불, 빛, 해를 미트라로 칭하며 숭배하는 것은 자연이라는 유일신의 가장 순수한 상징이자 강력한 대리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반박했습니다.
의식과 도덕적 의무
조로아스터교의 신도들에게 있어서 정의, 자비, 자선 등의 도덕적 의무는 필수적으로 요구되었습니다. 그 영원한 축복의 세계에서는 신앙심과 선행에 정비례해서 각자의 행복의 정도가 정해진다고 믿었습니다.
농업의 장려
자라투스트라는 독실한 신앙을 얻기 위해 흔히 행하는 단식이나 독신 생활을 죄악이라고 하여 혐오하고 경멸했습니다. 조로아스터교의 성자는 아이를 낳고 유용한 식물을 심고 해로운 짐승들을 죽이고 건조한 페르시아의 땅에 물을 끓어 오고 농사를 지음으로써 스스로의 구원을 완성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젠드아베스타 경전에는 이런 교훈이 적혀 있다고 합니다.
주의 깊고 부지런하게 땅을 경작하는 사람은 1만 번의 기도를 반복해서 얻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종교적인 선행을 비축하게 된다.
해마다 봄이 되면 원시 시대의 평등한 인간 관계를 재현하면서 현재의 인간관계를 한 번 돌아보게 하는 축제가 열렸습니다. 이 축제 때는 왕들도 농부들과 격의 없이 어울렸다고 합니다. 축제 기간에 왕들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의 노동으로 나는 살아갈 수 있고 나의 보호로 여러분들도 평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꼭 필요한 존재들이니 형제처럼 사랑하며 조화롭게 살아갑시다.
저자는 이러한 축제가 전제적인 제국에서는 희극과 같은 연극적인 행사였을 테지만, 때때로 군주의 마음에 유용한 교훈을 심어 주기도 했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습니다.
조로아스터교의 위세
어느 종교나 그렇듯이 순수한 신앙과 이기적인 동기가 섞인다면 종교의 숭고한 진실이 빛을 잃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마기(사제)의 세력은 엄격한 수련을 통해 더욱 확대되었습니다. 발크에 거주하고 있었던 대(大) 마구스는 조로아스터 교회의 우두머리이자 동시에 자라투스트라의 합법적인 후계자로 간주되었습니다. 마기의 재산은 상당히 많았습니다. 비옥한 토지 소유는 물론 페르시아인들의 재산과 노동에 대해서도 세금을 징수했습니다.
마기들은 마술에도 정통했다는 평판을 얻고 있었는데, 매직(magic), 즉 마술이라는 명칭도 이 마기(magi)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합니다. 아르타르크세르크세스의 통치에 마기의 조언이 영향을 주어서인지 이 성직자 집단은 그의 통치 하에서 예전과 같은 권세와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고 합니다.
박해의 정신
아르타크세르크세스는 조로아스터교의 예배를 제외한 모든 예배를 금지하는 칙령을 내렸습니다. 이로 인해 파르티아 왕들의 동상이 무참히 파괴되었습니다. 그들은 이단자를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전제 정치를 하는 아크타크세르크세스답게 오르마즈드 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박해는 오히려 이민족들을 신앙으로 결합시키는 결과로 나타나서 새 왕국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국왕 권위의 확립
2. 아르사케스 왕조가 비타크사에라고 불리던 18명의 강력한 지방 태수들이 왕의 칭호를 주는 것을 허용하였지만, 아르크세르크세스는 자신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왕의 칭호를 사용하지 못하게 했으며, 자신과 국민들 사이에 어떠한 중간 권력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군대를 동원하여 모든 지방을 시찰했으며 무력으로 저항하는 우두머리들을 제거했습니다.
페르시아의 세력 범위와 인구
유프라테스 강, 티그리스 강, 아라스 강, 옥수스 강, 인더스 강, 카스피 해, 페르시아 만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당시 페르시아에는 554개의 도시와 6만 개의 마을과 4000만 인구가 있었다고 추산되고 있으나, 페르시아의 자연환경의 여건(항구부족, 물부족)으로 미루어 볼 때 과장된 면이 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파르티아 제국과 로마 제국 사이의 전쟁
아르타크세르크세스는 지방 태수들을 평정한 후, 이웃 나라들을 위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스키타이인과 인도인들에게 쉽게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로마는 그들에게 군사력을 총동원해야 할 만큼 막강한 적이었습니다.
셀레우키아와 크테시폰의 도시들
서기 165년
서기 198년
셀레우키아는 마케도니아인들의 정복 이후 상(上)아시아의 수도가 된 곳이었습니다. 독립적인 공화국의 형태를 취하고 있었던 이곳은 귀족 출신 원로원 의원 300명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시민의 수는 60만 명이었습니다.
파르티아 왕들의 병영이 셀레우키아에서 불과 3마일 떨어진 곳에 위치한 크테시폰의 들판에 세워지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이 조그만 마을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거대한 도시로 변모하게 되었습니다.
마르쿠스 황제 시대에 로마 장군들이 크테시폰과 셀레우키아까지 진출한 적이 있었습니다. 셀레우키아는 당시 그리스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로마군을 우군으로 받아들였지만, 크테시폰은 로마를 적군으로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두 도시 모두 같은 로마군에게 무참히 짓밟혔습니다. 그 여파로 셀레우키아는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크테시폰은 다시 힘을 길렀으나 세베루스 황제 때 패전함으로써 불행을 겪었으나 바빌론과 셀레우키아의 뒤를 이어 동방의 거대 수도로 남아 있었습니다. 크테시폰은 날이 따뜻하여 여름에 엑바타나(하마단)에 머물던 왕들이 겨울에는 이곳에 머물렀기 때문에 명백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인들의 오스로에네 정복
서기 216년
로마는 크테시폰과 셀레우키아와의 전쟁에서는 큰 이득을 얻지는 못했고, 사막으로 가로막혀 있어서 유지에 신경을 쓰지도 않았습니다. 반면에 오스로에네는 작았지만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 사이에 있어서 비옥한 토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한편 파르티아와 로마 사이에 끼여 있었던 오스로에네는 마음속으로는 파르티아 제국에 우호적이었으나 강했던 로마 제국에 마지못해 속국으로 남아있었습니다.
로마는 충성을 보다 확실히 해두기 위해 오스로에네의 몇몇 지역에 요새를 건설하였고, 나시비스에는 로마 수비대를 상주시켰습니다. 에데사도 로마의 속주로 전락했습니다. 로마는 파르티아 왕국이 몰락하기 10년 전에 유프라테스 강 건너편에 확실하고 영구적인 기지를 구축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서기 230년, 아시아의 속주들을 요구하고 로마에 전쟁을 선포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아르타크세르크세스는 과거 키루스 왕이 프로폰티스 해에서 에게 해에 이르는 아시아 전역을 정복했고 그 후계자들은 오랫동안 그 지역을 지배해 왔고, 카리아와 이오니아 지역도 페르시아 태수의 통치를 받았으며 에티오피아 국경 지역까지의 이집트 전역도 페르시아의 통치 아래 있었다고 주장하면서 페르시아의 권리를 요구하였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그가 보낸 400명의 화려한 사절단에 의해 로마에 전해졌습니다. 이 협상은 전쟁을 선언한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로마의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황제와 페르시아의 왕 아르타크세르크세스는 각각 군대를 소집하여 직접 전쟁에 나서기로 결심했습니다.
서기 233년, 알렉산데르 세베루스의 가상의 승리
저자는 당시 이 전쟁에 대한 기록 중 알렉산데르 황제가 원로원에서 한 연설에 대해서 그 내용이 너무 황당하다는 평가를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아르타크세르크세스의 군대가 완전무장한 기병 120만 명( 말이 120만 마리가 필요함), 코끼리 등에 망루를 설치하고 궁수들을 가득 태운 코끼리가 700마리(역사상 아무리 많이 동원되어도 전투용 코끼리는 약 300마리를 넘기지 않았음, 통상은 100마리를 넘기지 않았음), 전차 1800대(다리우스 왕의 아르벨라 전투에는 전차 200대가 동원되었음)로 구성되었다고 합니다.
정말 이런 군대를 이겼다면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황제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필적할만한 눈부신 승리라는 것입니다. 저자는 황제의 허영심에서 이런 연설을 하였고 원로원의 굴종적인 아첨으로 연설내용이 받아들여졌다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한 역사가에 따르면 이 당시의 전쟁에서 로마는 세 개군으로 구성되어 각각 다른 길을 통해 페르시아를 침공하기로 했지만, 제1군은 패배하였고, 제2군은 몇 번의 승리를 거둠으로써 체면을 세웠으나 퇴각하면서 추위로 인해 많은 인명피해를 입었다고 합니다. 알렉산데르 황제가 이끄는 주력부대는 승리를 앞두고도 안티오크로 퇴각했습니다. 반면 아르타크세르크세스는 몸소 전쟁에 나섰으나, 경험 많은 로마 군단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결국 큰 포부와는 달리 아르타크세르크세스는 메소포타미아의 작은 속주 하나조차도 탈환하지 못했습니다.
서기 240년, 아르타크세르크세스의 성품과 교훈
아르타크세르크세스가 제정한 법률은 페르시아 왕국의 마지막 시기까지 종교 정책과 민정의 토대로 존중되었다고 합니다. 그가 남긴 말을 보면 정부 본질에 대해 깊은 통찰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군주의 권위는 군사력에 의해 방어되어야 하고, 군사력은 세금에 의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 모든 세금은 결국 농업에 기반하는 것인데, 농업은 공평하고 온화한 보호 없이는 결코 융성할 수 없다.
근대 페르시아 역사가들은 사산 왕조를 진실하고 참된 왕조로 간주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의 아들 샤푸르 1세 역시 훌륭한 군주였다고 합니다. 샤푸르 1세 역시 로마와는 소모적인 전쟁으로 반목만 쌓았다고 합니다.
페르시아의 군사력
동방에서는 전쟁술은 거의 발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들은 요새를 구축하거나 포위하거나 방어하는 기술도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주로 개인적인 용맹에 의존했고, 용맹보다 병사들의 수에 더 의존했습니다. 보병 부대는 농부들로 구성되었는데 그들은 오합지졸이었습니다. 페르시아의 군은 효율적이지 못했고 때로는 기근으로 군대가 분산되거나 자멸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합니다.
페르시아의 우수한 기병
페르시아의 귀족들은 일곱 살이 되면 거짓말을 않을 것과 활쏘기와 말타기를 배웠습니다. 사냥을 통해 인내심과 복종심을 습득하도록 엄격한 훈련을 받았습니다. 페르시아의 귀족들은 전시에 봉사한다는 조건으로 왕으로부터 토지와 저택을 하사 받았습니다. 경기병과 중기병으로 구성된 페르시아 군대는 막강한 위용을 자랑했는데, 이들은 쇠퇴해 가는 로마 제국의 동방 속주들을 순식간에 돌격해서 위협하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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