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2세기 로마 제국은 지구상에서 가장 탐나는 지역과 문명화된 지역을 차지했습니다. 광대한 지역을 차지하는 로마의 군주제는 지방의 통합을 이루어냈으며, 주민들은 부를 통해 사치를 누리기도 하고 남용하기도 했습니다. 로마제국의 번영은 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그리고 두 명의 안토니누스를 거치면서 80년 동안 이어졌습니다. 제1권의 1장과 3장에서는 로마제국의 번영에 관하여 이야기할 것입니다. 로마제국의 번영과 쇠퇴의 역사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로마인의 주요 정복은 공화정 하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황제들은 원로원과 집정관들의 경쟁과 열의로 얻어진 지배권을 유지하는 것에 만족했습니다. 첫 7세기 동안은 승리가 끊임없이 이어졌으나 아우구스투스에 의해 온건 정책이 도입됩니다. 그는 전쟁으로 인한 이득보다 손실이 더 많을 것이라 판단하였으며 먼 변경에서 전쟁을 수행하기 쉽지 않다는 점과 전쟁의 결과에 대해서도 확신할 수 없다는 이유 등으로 전쟁을 꺼리게 됩니다. 그는 야만족과도 양보와 협상을 통해 안정과 위엄을 지킬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실제로 아우구스투는 파르티아와 전쟁을 하지 않고 협상을 통해 크라수스의 패배로 빼앗겼던 군기와 포로들을 되찾았습니다.
그는 통치 초기에 에티오피아와 아라비아 펠릭스를 정복하려고 했지만 더위로 인해 침략자들이 물러나자 고립된 지역의 원주민들을 보호했습니다.
독일의 숲과 습지에 살고 있는 야만족들은 로마 제국의 중압감에 일시적으로 굴복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내 저항하여 독립을 되찾았는데 이때의 경험은 아우구스투스에게 흥망성쇠의 무상함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제도권 밖에서 자유롭게 생활하는 사람들 특성 상 다른 국가의 제재를 받는다는 것이 체질과 맞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후대의 황제들에게 남기는 유언에서 서쪽으로는 대서양, 북쪽으로는 라인강과 다뉴브강, 동쪽으로는 유프라테스, 그리고 남쪽으로는 아라비아와 아프리카의 사막 즉, 자연이 주는 경계를 지키라는 것이었습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모방하는 계승자들
아우구스투스의 유언은 후계자들에 의해 채택되었고, 초기의 황제들은 쾌락과 폭정에 빠져 군대나 변경의 속주에는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황제들은 자신들의 나태를 행동력을 갖춘 장군들이 대신 누리도록 놔둘 생각도 없었습니다. 신하가 명성을 쌓는 것은 자신들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장군들은 변경 지대를 방어하는 것으로 자신의 의무를 다하려 합니다.
최초의 예외가 되었던 브리타니아 정복
서기 1세기 동안에 로마 제국은 유일하게 브리타니아 속주를 추가합니다. 브리타니아의 지정학적 위치가 정복욕을 부추겼고, 진주 채취에 대한 확인되지 않은 소문으로 탐욕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브리타니아는 섬나라였기 때문에 대륙의 경계와는 별개로 생각한 부분도 있었습니다.
브리타니아는 용맹하기는 했지만, 단결하지 못하여 제국 장군들의 꾸준한 진격에 무너져버립니다. 로마의 장군 아그리콜라는 여세를 몰아 브리타니아에 이어 개발하면 매력적일 것이라고 예상한 아일랜드까지 정복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는 오히려 탁월한 능력으로 브리타니아에서 물러나야 했고, 그의 정복 계획은 무산됩니다. 로마인들은 비옥한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야만적이라고 생각하는 지역에 대해서는 정복하려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트라야누스의 동방 정복
트라야누스 황제는 명예욕이 강했습니다. 그이 명예욕의 원천은 끊임없는 찬미를 받아온 알렉산드로스 대왕이었습니다. 그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처럼 위대한 황제로 기억되고 싶어서 동방의 여러 나라에 대한 원정을 착수했지만,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명성은 따라잡을 수 없음을 알고 좌절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일시적이기는 했으나 트라야누스는 내부분열을 겪고 있던 파르티아인들을 정복했으며, 페르시아만까지 진군하게 됩니다. 그는 이 머나먼 바다를 항해를 처음이자 마지막 황제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라비아 연안을 닥치는 대로 약탈했으며, 원로원은 그의 계속되는 정복에 놀라움을 느낍니다. 많은 군주와 부족들이 황제의 지배 아래 들어가거나 보호를 요청했고, 로마의 속주로 전락했다는 소식이 로마로 들려왔습니다. 그러나 트라야누스의 죽음 이후, 로마인들은 그가 정복한 속주들의 저항을 걱정하게 됩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 안면재건(WORLD HISTORY 제공)트라야누스 안면 재건(voshart.com)
하드리아누스 황제와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의 대조
명예욕이 강한 트라야누스에 비하면 하드리아누스는 온건주의처럼 보이지만, 하드리아누스 황제도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에 비하면 굉장히 활동적인 황제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군인으로서, 정치가로서, 또 학자로서 다양한 재능을 갖추었던 황제로서, 그에게는 황제의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 곧 자신의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것이 되었습니다. 호기심이 아주 많고 자기개발에 진심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실제로 여행도 수없이 다닐 정도로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그의 치세기간에 황제가 방문하지 않은 속주는 없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굉장히 활동적인 황제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
그와는 대조적으로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는 그의 조용한 일생을 이탈리아의 중심부에서만 보냈다고 합니다. 그의 23년의 통치 기간 동안 가장 긴 여행이 로마 궁전에서 라누비움의 별장이었던 것으로 보아 소극적인 황제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
하드리아누스 황제와 두 명의 안토니누스 황제의 평화 체계
하드리아누스 황제와 두 명의 안토니누스 황제는 개인차는 있었지만,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일반적인 원칙은 일관되게 채택되고 준수되었습니다. 제국의 경계를 확장하려는 시도는 없었지만, 제국의 위엄은 잘 지켜나갔습니다. 세 명의 황제의 43년의 치세기간 동안은 전 인류적인 평화를 전망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성공적인 결실을 맺었습니다. 주위의 야만족들도 분쟁이 일어났을 때 로마황제에게 중재를 요청할 정도로 존경도 받았습니다.
마르쿠스 안토니누스의 방어 전쟁
로마는 막강한 군사력만으로도 싸우지 않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르쿠스 안토니누스 황제는 침략해온 파르티아인들과 게르만족과 싸워야 했고, 유프라테스 강과 도나우 강 유역에서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이 시기의 로마는 먼저 침략하지 않는다면 굳이 전쟁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로마 황제들의 군대 편성
정복 전쟁이 계속 되면서 로마에서는 전쟁이 사업으로 전락해갔습니다. 군인이 되면 먼 거리 속주민이라도 로마 시민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병사를 모집할 때면 남쪽보다 북쪽 지역, 도시보다는 시골지역, 육체 노동을 하는 사람을 선호하였습니다. 그러나 지휘관들은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훌륭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일반 병사 중에는 비천한 출신과 방탕한 자들도 다수 섞여 있었다고 합니다. 지역적으로 남쪽 지역보다 북쪽 지역을 선호하는 것은 북쪽의 기온이 더 낮기 때문에 더 남쪽 지역 사람에 비해 더 강인하다는 이미지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로마군의 규율
공화정 시대의 군인들과는 달리 전제 군주의 용병들에게는 공적 미덕을 찾아보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공백을 명예심이나 종교 등으로 메울 필요가 생겼습니다. 직업적인 면에서는 농부나 직공들보다 군인이라는 직업이 더 명예롭게 인식되었습니다. 또한 군단의 선두에서 번쩍이는 황금색 독수리 군기는 맹목적인 헌신의 대상이 되었으며, 아무리 위험한 상황에서도 깃발을 내팽겨치는 것은 불명예로 간주되었습니다. 현실적인 관점에서는 규칙적인 급여와 수시로 지급되는 상여금, 정해진 복부 기간을 마치면 보상금을 받는 등 경제적인 혜택이 전쟁의 어려움을 이겨내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반면에 군율을 어겼을 때는 가혹한 처벌은 물론 사형까지도 집행함으로써 상관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을 이끌어냈습니다.
황금색 독수리 군기
군인 채용 (그림: Adam Hook, Osprey Publishing )로마 군대에서 가장 가혹한 형벌 (이미지: zen.yandex.ru )
로마군의 훈련
라틴어로 군대라는 말은 훈련이라는 단어에서 따올 정도로 로마 군대는 훈련을 중요시 했습니다. 이 훈련에는 고참이라고 해서 예외는 없었습니다. 모의 훈련 때는 실제보다 2배 무거운 무기로 연습했습니다. 전쟁에서 나올 수 있는 거의 모든 동작을 연습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고대 역사가에 따르면 로마 군대의 훈련은 유혈사태가 없는 실제 전쟁과도 같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트라야누스 황제와 하드리아누스 황제 모두 몸소 신병을 훈련하고 상도 내렸다고 합니다. 군사 교육이 규율일 정도로 철저한 훈련을 했습니다.
훈련받는 로마군(이미지:printerest@Fireman_Jeck)
황제들 통치하의 군단
무기
중무장한 보병 군단은 10개 대대, 55개의 백인대로 나누어져서 각각의 대대장과 백인대장의 명령을 받았습니다. 가장 명예로운 대대로서 독수리 군기를 보관할 임무를 맡았던 제1대대는 1105명의 군사로 구성되었으며, 그들은 용맹과 충성심이 가장 뛰어난 것으로 인식되었습니다. 나머지 9개 대대는 555명의 병사로 구성되었고, 총 병력은 6100에 달했습니다. 무기로는 개면식 투구, 가슴받이 혹은 쇠미늘 갑옷 상의, 정강이받이와 커다란 방패가 있습니다. 왼손에는 방패를 들었고 오른 손에는 길이가 6피트나 되는 투창을 들었습니다. 병사들은 먼저 투창을 던지고 단검으로 공격했다고 합니다. 로마군은 8열 종대로 가로와 세로 각 3피트씩의 거리를 두는 개방형 대형을 유지한 반면, 그리스와 마케도니아의 전술은 16열 횡대의 밀집대형을 이루었기 때문에 움직임이 비교적 자유로운 로마군에 대적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로마군대(BY englishhistory.net)
밀집대형 (wikipedia)
기병
제1기병대는 132명, 나머지 9개 대대는 66명의 기병으로 구성되어, 한 연대는 총 726명의 기병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공화정 시대의 기병대는 공직 진출을 염두에 둔 귀족자제들이 대부분이었으나, 제정 시기에는 더 이상 귀족 자제들로 구성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말은 주로 에스파냐나 카파도키아에서 사육되었습니다.
로마기병
포
속국들의 부족으로 구성된 보조군은 주로 먼 변경으로 출정시켜 제국에 위협이 되는 용맹성을 소진하게 만들었습니다. 보조군의 병력은 대개 정규 군단 병력과 비슷한 규모를 유지했습니다. 보조군은 자신의 나라에서 쓰던 무기를 가지고 싸웠기 때문에 다양한 교전에 유리한 면이 있었습니다. 각 군단의 포병대는 10개의 대형 발사기와 55개의 소형 발사기로 구성되었는데, 사선이나 수평으로 발사할 수 있었습니다. 이 발사기들은 돌이나 화살을 넣어 적에게 맹렬하게 공격했습니다.
로마의 발사기(위키피디아)
병영
로마 군단의 병영은 요새화된 도시의 모습을 띠고 있었습니다. 보통은 가로 세로 700야드 크기의 정사가형의 형태를 갖추었는데 2 만 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규모였다고 합니다. 출발을 알리는 나팔이 울리면 병영은 즉각 해체되고 병사들은 각자 할당된 짐을 짊어지고 20마일 가까운 거리를 질서정연하게 행군했다고 합니다. 행군 중 적이 나타나면 짐을 벗어던지고 전투를 했는데, 최전선에는 투석병과 궁수들이 맨 뒤에는 포병대가 배치되었습니다.
로마군의 병영(위키피디아)
군단의 수와 배치
브리타니아-3개 군단
상(上)게르마니아_ 3개 군단
하(下)게르마니아_ 2개
라에티아_ 1개 군단
노리쿰_ 1개 군단
판노니아_4개 군단
다키아_2개 군단
이렇게 해서 모두 16개 군단이 라인 강과 도나우 강 지역을 방어했습니다.
유프라테스 강의 방어는 시리아 6개 군단, 카파도키아에 2개 군단이 맡았습니다.
이탈리아에는 수도 방위대 혹은 근위대 2만 명 이상의 정예 부대가 황제와 수도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었습니다. 이 근위대는 앞으로 제국의 혼란에 깊이 관여하게 되는 세력입니다. 근위대의 특징은 의상이 화려하다는 것입니다.
근위대
해군
로마 군사력의 전반적인 상태
로마인의 야망은 육지에 있었기 때문에 바다에 대한 모험 정신은 없었습니다. 바다는 로마인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황제들은 지중해를 평화롭게 유지하면서 무역을 보호하는 정도로 관여하였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가벼운 쾌속 범선이 전쟁에서 실용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라벤나와 미세눔 두 곳의 항구에 쾌속 범선을 조직하여 각각 지중해의 동쪽과 서쪽을 관할하도록 했습니다. 각 함대에는 수천 명씩의 해병을 배치했습니다. 로마의 육군과 해군을 합하도 45만명을 넘지 않았는데 , 이 숫자는 로마 제국의 속주에 지나지 않았던 현재의 한 왕국의 군주가 지난 세기에 보유했던 군사력과 같은 규모밖에 되지 않는다고 작가 말하고 있습니다.
라벤나항과 미세눔항
로마 제국 속주들에 대한 고찰
에스파냐- 유럽의 맨 서쪽에 위치하였고, 아우구스투스 시대에는 3개의 속주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원주민이었던 야만족 주에 켈티베리아족이 가장 강력했고 칸타브리아족과 아스투리아족이 가장 완강하게 저항했다고 합니다. 산악 지역의 이점을 이용하여 로마 군대에 끝까지 저항했으며 아랍인의 굴레도 제일 먼저 벗어던졌습니다.
갈리아- 고대 갈리아는 지금의 프랑스보다 훨씬 컸습니다. 아우구스투는 카이사르가 정복한 갈리아를 자연지형을 감안하여 100개가 넘는 독립국들을 분할했습니다. 안토니누스 가(家) 황제들 시대에 갈리아는 나르본네시스, 아퀴타니아, 루그두넨시스, 벨기카, 상, 하 게르마니아라는 여섯 속주로 나뉘어 통치되었습니다.
고대 로마시대의 갈리아지도(BY 나무위키)
브리타니아- 잉글랜드와 웨일스, 덤버튼에서 에든버러에 이르는 스코틀랜드 저지대가 로마의 속주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언어와 풍속의 유사성을 살펴보면 에스파냐, 갈리아, 브리타니아에는 같은 인종에 속하는 건장한 야만족이 살았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이 세 지역은 유럽 속주의 서부 지역을 이루게 됩니다.
영국지도(BY BRITANNICA)
이탈리아- 테베레 강은 로마의 일곱 언덕과 사비니족, 라틴족, 볼스키족의 고장을 굽이치며 흘렀는데, 이 강변에서 나폴리의 변경에 이르는 지역이 로마가 최초의 승리를 거둔 무대였습니다. 후계자들은 이 지역에 화려한 별장과 수도원을 세웠습니다. 나폴리에 인접한 지역과 그 밖의 지역에는 다양한 부족들이 거주하고 있었고, 해안 지방에는 그리스의 식민도시들이 번성하고 있었습니다. 아우구스투스가 이탈리아를 11개 지역으로 나누었을 때 이스트리아라는 작은 지방은 로마 황제 직할령으로 편입되었습니다.
이스트리아 반ㄷ(BY 위키피디아)
도나우 강과 일리리쿰의 국경 지방 - 로마의 유럽 속주들은 라인 강과 도나우 강이 방벽이 되어 보호받을 수 있었습니다. 흑해로 흘러들어 가는 도나우 강을 따라 위치한 속주들은 모두 일리리쿰의 경계지역이라는 의미로 일리리쿰이라고 불렸으며, 제국 내에서 가장 용감하고 호전적인 속주들로 인식되었습니다. 일리리쿰에 포함되는 속주로는 라에티아, 노리쿰, 판노니아, 다키아, 달마티아, 트라키아, 모에시아, 마케도니아, 그리스 등이 있었습니다(아래 지도 참조).
*라에티아, 노리쿰과 판노니아, 달마티아, 모에시아와 다키아,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그리스, 소아시아, 시리아, 페니키아, 팔레스타인, 이집트, 아프리카 등은 지도를 참고하여 확인해 보세요. 서기 98~180년 경의 로마제국의 속주들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로마를 중심으로 속주들이 타원형의 형태 위치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아래 지도 참조).
로마 제국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
로마인들은 오만하게 로마 제국이 곧 전 세계라는 생각으로 변경 지대의 나라들을 무시하거나 거의 잊어버렸다고 합니다. 로마 제국의 폭은 2000마일이 넘었고, 길이는 3000마일이 넘었다고 합니다. 또한 가장 살기 좋은 위치인 북위 24도에서 56도 사이에 위치해 있었고, 160만 제곱마일 이상일 것으로 추정되며, 총면적의 대부분이 비옥하고 잘 개간된 농경지였다고 합니다.
<로마 제국 쇠망사 1권 1장 정리>
로마제국 쇠망사 1권 1장에서는 서기 98~180년까지의 로마 제국의 범위와 군사력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로마 제국이 생각보다 크지 않은 규모의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음에도 제국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실전에 못지않는 훈련에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거의 일당백이라고 할 정도 규모에 비해 수많은 속주들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유언에 따라 더 이상 정복전쟁은 하지 않았지만 로마 제국의 위엄만은 지키려고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전쟁은 하지 않았지만 로마 제국의 군대는 언제나 강한 이미지를 유지함으로써 주위 속국들이 함부로 할 수 없는 위압감을 주었습니다.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국가적으로 많은 준비와 노력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다음 포스팅은 1권 2장 안토니누스 가(家) 황제들 시대의 로마 제국의 통일과 내부적 번영·예술·사람들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포스팅에 잘못 기록된 부분이 있으면 댓글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이상 책소방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