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의 그리스도교 박해사
― 엄격함과 관용 사이에서 펼쳐진 신앙의 투쟁 ―
그리스도교는 로마 제국의 광대한 지중해 세계 속에서 점차 뿌리를 내렸습니다. 그러나 로마는 이 새로운 종교를 ‘위험한 이단’으로 간주하여 때로는 탄압했고, 때로는 방관했습니다. 이번 포스팅은 로마의 박해가 어떻게 전개되었고, 그 속에서 어떤 인간적·역사적 이야기들이 있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엄격함과 관용의 양자택일/ 10대 박해 사건
로마 제국의 박해는 일관성 있게 이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황제의 기질, 시대 상황, 지역 통치자의 재량, 그리고 신자 개인의 태도에 따라 박해의 강도와 양상이 달랐습니다.
5세기 교회 사가들은 이를 상징적으로 10대 박해 사건을 확정했습니다. 네로 황제 부터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까지를 그리스도교에 가장 적대적인 시기로 본 것입니다.
당시의 비일관적인 박해는 교회를 무너뜨리기보다는 오히려 신자들의 신앙심을 자극하고, 느슨해진 규율을 다시 세우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박해의 시기가 지나면, 항상 일정 기간의 상대적 평화와 안정이 뒤따랐습니다.
특히 몇몇 황제들의 종교에 대한 무관심 또는 정치적 관대함 덕분에,
그리스도교는 비록 공식적으로는 불법이었지만, 사실상 공공연하게 신앙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티베리우스와 마르쿠스 안토니누스의 가상의 칙령
초기 교부 테르툴리아누스의 호교론에서는 다음과 같은 전승을 소개합니다.
예수에게 사형선고를 한 본디오 빌라도가 자신이 예수를 무고하게 죽였다는 고백을 황제에게 보고한 일로 순교의 위험에 처했었다는 기록과 티베리우스 황제가 예수를 로마 신들의 반열에 올리는 것을 고려했지만, 원로원의 반대에 부딪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 기록입니다.
하지만 이 기록은 티베리우스가 사망한 지 160년이 지난 뒤에 쓰인 것으로, 역사적 신뢰성은 떨어지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마르쿠스 안토니누스 황제에 대해서도 유사한 전승이 존재합니다. 마르코만니 전쟁 당시 로마 군이 폭우 덕에 위기를 모면한 사건을, 후대에는 그리스도교 병사들의 기도 덕분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당시 황제는 만장일치로 전쟁의 승리를 유피테르와 메르쿠리우스 신의 개입의 덕택으로 인정했습니다.
실제로 마르쿠스 안토니누스는 철학자의 입장에서 그리스도교를 경멸했고, 통치자로서 신자들을 박해한 황제였습니다. 이와 같은 황제들의 호의적 기록은 교회가 후대에 신앙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만든 ‘성스러운 전승’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서기 180년, 콤모두스와 세베루스 치세의 그리스도교도들의 상황/198년
콤모두스 황제 치세(180~192년)는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시기였습니다. 황제의 정부 마르키아가 그리스도교 신자였으며, 그녀의 영향으로 여러 신자들이 석방되기도 했습니다.
교회는 박해 없이 성장을 지속했으며, 일부 귀족 출신들도 개종하는 등 안정된 분위기를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193년 세베루스가 집권하면서 상황은 바뀝니다. 초반에는 관용적인 분위기가 이어졌지만, 그리스도로 개종하는 사람이 많아지자 심기가 불편해진 세베루스 황제는 202년 그리스도교와 유대교로의 개종을 금지하는 칙령을 공포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선조들에 대한 제사를 실행하는 그리스도교인들은 기꺼이 용서해주는 관대함을 보였습니다.
이러한 긴장이 고조되던 시기,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에서는 유명한 순교 사건이 일어납니다.
203년, 귀족 여성 페르페투아와 그녀의 하녀 펠리시타스가 개종 후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고, 결국 원형경기장에서 맹수에게 찢기고 결국 참수당했다고 합니다. 페르페투아는 어린 아들이 있었고, 그녀의 하녀 펠리시타스는 임신 중이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신분을 초월한 우정으로도 유명하다고 합니다.
서기 211~249년, 세베루스의 계승자들의 치세 하 그리스도교도들의 상황
세베루스 황제의 사후, 그리스도교는 38년간의 평온기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또한 아시아 속주 출신의 황제가 선출된 것은 그리스도교에 유리하게 작용했습니다.
황후 마마이아는 동방의 신학자 오리게네스와 대화를 원할 만큼 신앙과 학문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그의 가르침에 감동을 받아 정중히 대우했습니다. 그녀의 이러한 태도는 아들 알렉산데르 세베루스 황제에게 이어져, 그리스도교를 포함한 여러 철학적 전통을 존중하는 관용적 신앙 태도로 나타났습니다. 마마이아는 예배당에 아브라함, 오르페우스, 아폴로니우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신상을 함께 두며 다양한 종교적 현자들에게 경의를 표했습니다.
이 시기에는 교회가 도시 사회의 한 제도적 구성원으로 성장하며, 예배당이 세워지고 교구와 성직자 체계가 정비됩니다. 또한, 주교가 황궁과 공식적으로 접촉한 최초의 시기로 기록됩니다.
그러나 235년 즉위한 군인 황제 막시미누스(재위 235~238년)는 전임자 세베루스를 지지한 궁중 인사들과 그리스도교인들을 적대시하였습니다. 그는 교회를 정권 안정에 방해되는 정치적 세력으로 간주하고, 성직자 중심의 박해를 시행했습니다. 그러나 막시미누스의 박해는 종교적 박해라기보다 개인적인 분노표출에 의한 정치적 박해로 인식되기도 합니다.
막시미누스 이후 몇 차례 짧은 황제 교체가 이어진 뒤, 필리푸스 아라브스(재위 244~249년)가 집권합니다. 그는 제위 기간 동안 교회를 억압하지 않고 사실상 관용을 베푼 황제로 알려져 있습니다.
일부 기록에서는 그가 그리스도교인 혹은 그리스도교에 우호적이었다는 주장도 있으나, 학계에서는 그보다는 실용적 관용 정책에 가까웠다고 봅니다. 필리푸스 치세 동안 교회는 숨을 고를 수 있었고, 대규모 박해는 중단되었으며, 당시의 로마 주교 파비아누스는 안정적으로 교회를 이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필리푸스 황제의 그리스도교에 대한 관대한 조치는 그가 그리스도교인이고 전임 황제인 고르디아누스 3세를 암살한 죄를 고백성사와 참회를 통해 속죄하려 했다는 소문의 원인이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인들의 평화는 매우 짧았습니다.
필리푸스를 몰아내고 집권한 데키우스 황제(재위 249~251년)는 로마 전통질서 회복을 외치며, 전 제국적 박해를 주도한 최초의 황제가 됩니다. 데키우스의 그리스도교 박해는 단순한 신앙 문제를 넘어서, 정치적 위협으로서 그리스도교를 경계하고, 박해를 감행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249년, 그는 로마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고 ‘제사 증명서’(libellus)를 제출할 것을 모든 시민에게 명령합니다. 이를 거부한 신자들은 체포, 고문, 추방, 심지어 처형되었습니다. 이는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국가 차원의 대박해였으며, 수많은 순교자를 낳았습니다.
한편, 이 박해로 인해 배교자 문제’(박해 중 신앙을 포기한 자들의 복권 여부)가 교회 내부에서 큰 논쟁이 되었고, 훗날 교회의 교리와 정체성 정립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서기 253~260년, 그리스도교도들의 상황
발레리아 황제는 경솔하고 변덕스러운 성품을 지녔는데, 집권 전반기에는 그리스도교에 매우 관대했으나, 집권 후반기에는 데키우스 황제의 탄압 정책을 채택하고 그리스도교인들을 가혹하게 박해했습니다.
그러나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페르시아에 포로로 잡히고, 그의 아들 갈리에누스가 즉위하면서 로마는 여러 혼란에 직면하게 되었고, 이로 인해 그리스도교인들은 박해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서기 260년, 사모사타의 파울루스
교회가 제도화되면서 내부의 문제도 표면화되기 시작합니다.
안티오크의 대주교인 사모사타 출신 파울루스는 사치스럽고 세속적인 생활, 그리고 성직 매매와 권력욕으로 비판받았습니다. 그는 식탐에 빠져 있었으며, 여가를 즐기기 위해 두 명의 젊은 미녀를 고정적으로 주교 공관에 들여놓았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처럼 부패한 성직자에 관대했으며, 자신에게 아부하지 않는 성직자들에게는 냉정하게 대했다고 합니다.
서기 270년, 안티오크의 주교 지위에서 강등된 파울루스
서기 274년, 아우렐리아누스의 결정
파울루스의 파문을 둘러싼 분쟁은 결국 황제의 판결로 이어졌습니다.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교회 내 분쟁에 개입하여, 로마 주교의 판단에 따라 안티오크 주교직의 정당성을 결정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이는 황제가 공식적으로 교회 권위의 상하 구조를 인정하고 개입한 첫 사례 중 하나로 평가됩니다. 아우렐리아누스 황제의 개입은 각 속주들이 수도에 대한 의존적 유대를 복원하고 강화하기 위한 조치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서기 284~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 치세의 교회의 평화와 번영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집권 초기에는 그리스도교가 일정 부분 인정받으며, 교회는 안정적인 성장을 이룹니다. 특히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그리스도교인이라도 능력이 있으면 주요 관직에 자주 등용했다고 합니다.
예배당이 합법적으로 운영되고, 성직자가 도시 행정에 관여하는 일도 생깁니다.
이 시기 교회는 외형적으로 크게 번성했지만, 동시에 교회 내부의 권력화와 세속화에 대한 비판도 커졌습니다.
이교도들 사이의 열정과 미신의 확대
디오클레티아누스 치세 후반, 로마 제국 내에서는 이교도들의 종교적 열정이 다시 고조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로마 전통 종교를 부흥시키려는 황제들과 귀족들은 미신적 신앙(신탁, 점성술, 정화 의식 등)을 통해 정치적, 사회적 안정을 추구하려고 했습니다.
이교도와 그리스도교인들은 서로의 기적에 대해 마법의 조작이나 악마의 힘에 기인한다고 반박했습니다. 이교도들은 그리스도교가
공공의 질서와 황제 숭배를 위협한다고 여겼으며,
교육과 사회 전반에서 이교적 가르침과 제의 행위를 강화하며 그리스도교에 대한 경계심을 드러냈습니다.
특히 다신교 지지자들은 철학자, 로마 전통 종교의 성직자, 귀족의 연대를 통해 그리스도교를 배격하려는 분위기를 형성했고,
많은 로마 지식인들도 기독교가 제국 질서를 무너뜨릴 위험한 사상이라고 인식했습니다.
신플라톤학파는 다신교를 속으로 경멸하고 있었지만, 그리스도교에 대항하기 위해 그들과 함께 했던 것입니다.
이때 철학자들이 그리스도교를 반박하기 위해 쓴 글들은 그리스도교가 공인되면서 불길 속에 던져졌다고 합니다.
몇몇 그리스도교 병사들을 처벌한 막시미아누스와 갈레리우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서방의 공동황제 막시미아누스는 군대 내에서 그리스도교 병사들의 신앙을 문제 삼기 시작합니다.
그는 병사들에게 전통 신들에게 충성을 맹세하도록 강요했고, 이를 거부한 병사들은 계급 강등 또는 처형을 당했습니다.
막시미아누스 황제는 종교적 신념으로 군인의 직무를 거부한 병사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처형했습니다. 또한 백인대장 마르켈루스는 백인대장 휘장을 벗어던지고 그리스도만을 섬기겠다고 소리쳤습니다. 결국 그는 탈영죄로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이런 사례들은 황제들의 마음을 그리스도교에서 떠나게 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동방에서는 갈레리우스가 더욱 적극적으로 그리스도교에 대한 반감과 적대감을 키워갔습니다.
그는 신탁과 주술에 심취했던 인물로서, 그리스도교의 조직력과 급속한 확산을 심각한 위협으로 간주하였습니다.
결국 이 두 황제의 영향 아래, 디오클레티아누스는 303년 전면적인 대박해를 선포하게 되는 결정적 계기를 맞이합니다.
전면적인 박해를 시작하도록 디오클레티아누스를 설득하는 갈레리우스
세속화된 교회에 대한 비판, 그리고 제국 내부의 질서 위기 속에서 공동 황제였던 갈레리우스는 그리스도교가 로마 신들에게 위협이 된다고 주장하며, 디오클레티아누스를 설득합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그리스도교인들에게 공직을 주지 않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박해를 하는 데는 신중한 입장이었지만, 갈레리우스의 비위를 맞추려는 신하들의 끈질긴 요구를 받아야 했습니다.
역사적 정황에 따르면, 갈레리우스의 어머니는 그리스도교인 시종들로부터 무시당한 경험이 있었고, 이로 인해 그리스도교에 강한 반감을 품게 되었습니다. 갈레리우스 역시 어머니의 영향을 받아 그리스도교에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로마 제국 내 그리스도교 박해는 단순한 종교 억압이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가 얽힌 복합적 갈등의 역사였습니다.
박해는 교회를 흔들었지만 동시에 신앙을 정화하고, 공동체를 결속시키는 역할도 했습니다.
또한, 반복되는 박해와 평화의 사이클은 제국이 종교를 어떻게 인식하고 활용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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