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제국쇠망사 1권15장(4)(에드워드 기번, 윤수인, 김희용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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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저서 읽기/로마제국 쇠망사(에드워드 기번, 윤수인_김희용 옮김)

로마제국쇠망사 1권15장(4)(에드워드 기번, 윤수인, 김희용 옮김)

다섯 가지 요인들의 개괄 / 다신교의 약점

저자는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 내에서 성공적으로 전파된 요인으로 배타적인 열정, 내세가 임박했다는 기대감, 기적에 대한 확신, 엄격한 미덕의 실천, 그리고 초기 교회의 체제 등을 들고 있습니다. 

그들의 배타적인 열정은 목숨을 잃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발휘하게 했습니다. 나머지 요인들은 그들의 용기를 발휘하는 데 강력한 수단을 제공했습니다. 또한 초기 교회의 체제 구축은 그들의 용기에 위력을 더해 주었습니다. 

반면에 로마와 여러 속주의 다신교 사제들은 대부분 부유한 명문가 출신으로서 유명한 신전이나 공적인 제사들을 관리하는 것을 일종의 명예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자비로 종교적인 경기 대회를 개최하는 일은 자주 있었지만 국가의 법률과 관습에 따라서 예부터 전해 온 제의식들을 수행하는 데는 무관심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겸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앙심에 열정을 바치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또한 다신교도들의 종교 이론은 온갖 미신적인 공상들을 제멋대로 받아들여서, 체계적이지 않고 그 의미도 모호했다고 합니다. 

게다가 다신교도들은 숭배 대상 마저 수시로 바꾸었기 때문에 어떤 신에게도 진실한 열정을 바칠 수 없었습니다.

 

 신흥 종교에 우호적인 것으로 입증된 이교도 세계의 회의론

 그리스도교가 세상에 나타났을 즈음에 다신교는 철학자들의 회의적인 글들에 영향을 받아 그 힘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 철학적인 지식층들은 국가의 종교 제도에 은밀한 경멸을 숨기고 있었고, 이런 분위기를 알아챈 일반 사람들은 그들의 영향을 받아, 지금까지 믿고 있었던 자신들의 신앙에 의구심과 불안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기존의 신앙을 버린 사람들은 공허한 마음을 달래기 위해 새로운 신앙을 찾았을 것이고, 그런 열망이 그리스도교의 급속한 발전에 기여했던 것입니다. 

 

로마 제국의 평화와 통합에 우호적인 것으로 입증된 이교도 세계의 회의론

/ 그리스도교의 발전에 대한 역사적 견해

 로마 군대가 사용하기 위해 건설되었던 많은 국도 덕분에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은 다마스쿠스에서 코린토스로, 이탈리아에서 에스파냐나 브리타니아의 벽지로 쉽게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의 적극적인 이동은 디오클레티아누스와 콘스탄티누스 황제 치세 이전에 그리스도교 신앙이 이미 로마 제국의 모든 속주와 대도시에 전파되었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강력한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정확한 통계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당시 그리스도교에 대한 자료를 믿기는 어렵다고 합니다. 

 

동방에서의 그리스도교의 발전

사도 바울이 열렬한 신앙심을 발휘했던 주요 무대는 유프라테스 강에서 이오니아 해에 이르는 비옥한 지역이었습니다. 그의 제자들의 복음을 열심히 전파했기 때문에 최초의 2세기 동안에는 그리스도교인들이  이 지역 내에 살고 있었습니다. 

시리아에서 가장 오래되고 저명한 교회는 다마스쿠스, 베로이아, 즉 알레포, 그리고 안티오크의 교회였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예언적 도입부에서 아시아의 일곱 교회, 즉 에페수스, 스미르나, 페르가뭄, 티아티라, 사르디스, 라오디케아 및 필라델포이아의 교회들을 언급했기 때문에 불후의 명성을 안겨 주었으며, 이 교회들은 곧 인구가 조밀한 이 지방 곳곳에 자신들의 식민 교회들을 퍼뜨렸다고 합니다. 

일찍부터 키프로스 섬과 크레타 섬,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의 여러 속주가 이 새 종교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였고, 곧 코린토스, 스파르타, 아테네의 도시들에도 일종의 그리스도교 국가가 건설되었습니다.

역사가 오래 된 그리스와 아시아의 교회들은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신도를 늘릴 수 있었습니다. 

철학자 루키아누스의 저서에서 콤모두스 황제 치세 때 폰투스는 에피쿠로스 학파 사람들과 그리스도교인들로 넘쳐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사후 80년이 채 되지 않았을 때, 플리니우스는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보낸 편지에 신전들은 거의 황폐화되었고, 성스러운 희생제물을 구입하려는 사람도 매우 드물며, 또한 그리스도교라는 미신이 폰투스와 비티니아의 여러 속주들을 감염시키고 있다고 썼습니다. 그는 그리스도교를 근절하려고 했다가 실패한 것에 대해 한탄했다고 합니다.

 

안티오크 교회

각 속주에 살던 실제 신자의 수를 정확하게 추정할 만한 근거는 없지만,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후 60년이 지난 테오도시우스 황제 치세에서, 안티오크 교회의 신도의 수는 10만 명이었고, 그 가운데 3000명이 교회의 봉헌물에서 나오는 돈으로 생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안티오크의 전체 주민의 수가 적어도 50만 명 이상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리스도교인들이 아무리 열심히 교세를 확장했다고 하더라도 전체 인구의 5분의 1을 넘지 못했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습니다. 

크리소스토무스는 그리스도교 신도의 수가 유대교인이나 이교도보다도 많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는 공공 자선 기금을 분배받을 권리를 가진 시민 명부와 세례를 받아 천국에 들어갈 권리를 확보한 그리스도교인 명단을 대조하여 비교했습니다. 노예와 외국인, 그리고 유아는 그리스도교인 명단에는 포함되어 있었지만 시민 명부에는 제외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이집트에서의 그리스도교의 발전

알렉산드리아는 광범위한 교역을 했으며, 지리적으로도 팔레스타인과 가까웠기 때문에 새로운 종교가 쉽게 유입될 수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처음으로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마레오티스 호반에 살던 테라페우타이파, 즉 에세네파의 대다수 교도들이었습니다. 에세네파 교도들의 금욕적인 생활, 금시과 파문, 재산의 공유, 독신주의, 순교에 대한 열정, 비록 순수하지 않았지만 열렬한 신앙심은 초기 그리스도교의 계율과 매우 비슷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교 신학이 정식으로 학문의 형태를 취하게 된 것도 알렉산드리아 학파에서부터 였습니다. 따라서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이집트를 방문했을 때 유대인과 그리스인으로 구성된 이 교회는 이미 유력한 교회로 성장해 있었습니다. 

2세기 말까지만 해도 데메트리우스의 전임자들만이 이집트 교회의 유일한 성직자들이었습니다. 데메트리우스는 3명의 주교들을 임명했으며, 그의 후계자 헤라클라스 때는 20명으로 늘어났다고 합니다. 알렉산드리아 사람들은 완고한 기질이어서 새로운 교리를 마지못해 냉담하게 받아들였으나, 국교로 지정되자 압력에 굴복하여 이집트의 여러 도시에는 주교들이 넘쳐나고 테베의 사막에는 은자들이 떼지어 몰려들었다고 합니다.

 

로마에서의 그리스도교의 발전

 로마 교회는 로마 제국 내에서 신도의 수가 가장 많은 교회였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그 당시 성직자들은 1명의 주교와 46명의 장로, 7명의 부제, 7명의 부제보, 42명의 시종, 50명의 낭독자, 기도사 및 잡역부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로마의 그리스도교인들을 논리적으로 유추해봤을 때 대략 5만 명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 로마의 인구를 100만 명으로 추정했을 때 그리스도교인들의 비율은 20분의 1 정도로 추산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와 서방 속주들에서의 그리스도교의 발전

서방의 속주민들은 로마에 영향을 받았던 것처럼 그리스도교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로마의 선교사들은 라틴 속주들을 여러 차례 방문했지만 실제로 바다를 건너거나 알프스 산맥을 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지나서였습니다. 

 추운 갈리아 지방에서는 복음의 침투가 완만했던 것과는 달리 아프리카의 뜨거운 사막 지대에서는 복음이 열광적으로 수용되었다고 합니다. 

3세기 동안에 아프리카의 그리스도 교회는 열성적인 테르툴리아누스의 신앙으로 활기를 띠게 되었으며, 유능한 키프리아누스의 지도를 받았으며. 락탄티우스의 설득력 있는 웅변으로 더욱 힘을 얻었습니다. 

반면에 갈리아는 마르쿠스 안토니누스 시대에 있었던 리옹과 비엔나의 미미한 통합 교회 정도가 있었고, 데키우스 황제 때도 아를, 나르본, 툴루즈, 리모주, 클레르몽, 투르, 그리고 파리에만 소수의 신도로 유지되는 몇몇 교회가 흩어져 있었다고 합니다. 저자는 갈리아에서 처음 3세기 동안 단 한명의 교회 저술가도 배출하지 못한 것에 대해 큰 실망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저자는 갈리아에서도 더 멀리 떨어진 에스파냐와 브리타니아의 복음은 미미했자만, 에스파냐의 야고보에 대해서는 언급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예수 그리스도의 열두 사도 가운데 한 사람으로 사도 중에 최초로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44년에 예루살렘에서 그리스도인을 탄압하던 헤로데 아르리파 1세에 의하여 체포되어 파스카 축일 전날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야고보의 유해는 처음에는 예루살렘에 안장되었으나, 정확히 어디에 묻혔는지에 대해서는 행방이 묘연하여 찾을 길이 없었는데, 9세기 즈음에 하늘에서 한 별빛이 내려와 숲 속의 한 동굴을 비추어 사람들이 그 안으로 가보니 야고보의 무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후 야고보의 유해는 에스파냐 서북부 지역 갈리시아의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로 이장되어 모셔졌고, 당시 국앙 알폰소는 그 묘지 위에 150년에 걸쳐 웅대한 대성당을 건축하였습니다.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 대성당 안으로 들어가보면 그의 유골함이 전시되어 있다고 합니다.

성 야고보(사망 서기44년), (그림: 루벤스)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스페인 소재)

 

로마 제국의 경계를 넘어선 그리스도교의 발전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의 사망 후 100년도 되지 않아 세상 구석구석에 전파되었습니다. 순교자 유스티누스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리스인이든 야만인이든 또는 어떤 다른 종족이든지, 그들이 어떤 명칭이나 풍습으로 구별되든지, 제아무리 기술이나 농업에 무지한 사람들이든지, 천막을 치고 사는 사람들이든지 아니면 포장마차를 타고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이든지 간에 그들 가운데 만물의 아버지이신 창조주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지 않는 민족은 아무도 없다.

순교자 유스티누스(서기 약100년~약165년)
순교자 유스티누스의 참수(모자이크)

저자는 유스티누스의 주장은 과장되어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스키타이와 게르만족들은 이교 신앙을 믿고 있었으며, 이베리아, 아르메니아 또는 에티오피아에서 시도된 개종 노력도 콘스탄티누스 황제 집권 후에야 어느 정도 성공했다는 것입니다. 

유프라테스 강의 너머의 에데사는 일찍부터 굳건한 신앙을 고수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교의 교리는 이 에데사에서부터 그리스와 시리아의 여러 도시들로 순조롭게 전파되어 갔습니다. 그러나 페르시아인들의 종교 체제가 사제단의 노력으로 견고하게 구축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교리가 쉽게 전파되기는 어려웠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스도교와 이교도의 전체적인 비율

저자는 명확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초기 그리스도교인의 수를 정확하게 추정하기는 어렵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만 안티오크와 로마의 사례로 미루어 볼 때 아무리 호의적으로 추산한다 하더라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개종하기 이전의 그리스도교 신도의 수는 전체 로마 제국 인구의 20분의 1을 넘지는 못했을 것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의 신도 수가 몇 배로 많게 과장된 이유는 신앙심이 깊고, 열성적인 그리스도교인들로 인한 착시현상이라는 것입니다. 

 

초기 그리스도교도들은 비천하고 무지했는가

그리스도교는 상류 계급보다 하류 계급의 개종자가 더 많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노예 출신의 교사들은 공개 석상에서는 말이 없었지만 사사로운 자리에서는 말이 많고 독단적이었다고 합니다. 그들은 철학자들과의 만남은 조심스럽게 피하는 반면, 배우지 못하여 무지한 대중과는 어울리면서 연령, 성별, 교육 정도로 보아 미신적인 공포에 영향을 받기 쉬운 사람들의 환심을 샀다고 합니다.

 

학식에 관한 몇 가지 예외

 그리스도교 신앙이 널리 전파되어 감에 따라, 몇몇 사회 지도층 인사들도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하드리아누스 황제에게 호교서를 바친 아리스티데스는 아테네의 철학자였습니다. 

순교자 유스티누스는 제논, 아리스토텔레스, 피타고라스, 플라톤 등 여러 학파에서 신에 대한 지식을 추구하던 중 그리스도교인 한 노인을 만났는데, 그는 인간이 신을 알기 위해서는 명상적 생활에서 이성적인 탐구만으로는 불충분하고, 신으로부터 계시를 받아야 비로서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어 유대인 예언자들에 관한 연구로 관심을 돌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는 여러 가지 그리스 문헌을, 테르툴리아누스는 비록 서로 문체는 매우 다르지만, 두 저술가 모두 유명한 수사학 교사였다고 합니다. 

클레멘스(좌)는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기독교 신학자 / 테르툴리아누스(우)는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가장 먼저 사용함.

 

결국 그리스도교인들 사이에도 철학 연구가 도입되었지만, 그 결과가 항상 바람직한 것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지식은 때때로 신앙 형성의 근원일 뿐만 아니라 이단 발생의 근원이었기 때문입니다. 저자는 아르테몬파의 추종자들에 대한 묘사(철학과 세속의 학문에 빠져 교회의 학문을 등한시 하는 태도를 비판)는 배교자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지위와 재산에 관한 몇 가지 예외

초기 그리스도교인이라고 해서 대부분 하층민이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비티니아 속주의 총독 플리니우스는 법정에서 이미 각계 각층의 수많은 사람들이 전통의 종교를 버리고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기독교의 교부이자 신학자인 아프리카 출신 테르툴리아누스는 아프리카 총독에게 그리스도교인들을 처벌하려면 카르타고 시민 가운데 10분의 1일을 살육해야 할 것이며, 그 가운데는 원로원 의원들과 명문가 귀부인들, 그리고 총독의 친구와 친척들이 포함될 것이라고 협박했다고 합니다.   발레리아누스 황제는 257년과 258년에 소위 '쌍둥이 칙령'이라고 불리는 두 번의 칙령을 통해 로마 사회 내 기독교 근절 및 상류층의 기독교 근절을 위해 기독교인들을 박해했습니다. 이런 정황으로 보아 로마 내의 각계 각층에서 심지어 군대 안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교인임을 숨긴 채 현세의 이익과 내세의 기대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빈민들과 하층민들이 가장 호의적으로 받아들였던 그리스도교 

초기 그리스도교 개종자들이 무지하고 비천하다는 오명을 불식시키기에는 상층민 신자들은 너무 적었고 시기적으로도 너무 늦게 개종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인들의 이미지 개선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무지하고 비천한 상태가 종교적 교화로서 드라마틱한 결과를 드러내는 데 도움이 되기도 했습니다. 즉 천국은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약속되어 있다는 점과, 현세의 재난과 멸시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기쁜 마음으로 내세의 행복에 관한 신의 약속에 부지런히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의무가 주어진 것입니다.또한 현세의 부귀에 만족하며, 무익한 이성과 지식을 회의적인 논쟁으로 남용하고 있는 현자들을 기억해야 할 의무도 부과되었습니다.

 

서기 1,2세기에 일부 상층민들이 거부했던 그리스도교 

세네카, 플리니우스 부자, 타키투스, 플루타르코스, 갈레노스, 노예인 에픽테토스, 그리고 황제 마르쿠스 안토니누스 등 시대의 자랑거리이며 인간 본성의 위엄을 드높인 사람들 조차 그리스도교 교리의 완전성을 간과했거나 배격했다고 합니다.그들은 그리스도교에 대한 멸시를 드러냈으며 그리스도교도들을 완고하고 편협한 광신도들이라고 폄하했으며, 불가사의한 교리에 맹목적으로 순종하기를 강요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언을 무시했던 일부 상층민들 

저자는 유능한 그리스도교 옹호자들이 호교론을 변론하지 못했다는 것을 한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다신교의 부조리성이나 박해받은 교우들의 무고함에 동정심을 호소했지만, 정작 그리스도교의 기원이 신의 섭리에서 비롯되었음을 설명할 때는 메시아의 출현을 전한 예언들을 크게 강조할 뿐 거기에 수반된 여러 가지 기적들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저자는 거짓말과 궤변으로 계시를 변론하는 것은 불사신인 영웅들에게 성가시고 부서지기 쉬워서 쓸모없는 갑옷을 입히는 시인들의 분별없는 행동을 상기시킨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순교자들의 마지막 기도  (  Jean-Léon Gérôme  , 1883)

 

기적을 무시했던 일부 상층민들 

그리스도 시대에는 절름발이가 걷고, 장님이 눈을 뜨고, 병자가 치유되고, 죽은 자가 일어나고, 마귀가 쫓겨나고, 교회를 위해서는 자연의 법칙마저 빈번하게 일시정지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와 로마의 이교도와 철학자들은 이런 기적들에 관해서는 무시한 채 일상생활과 학문에만 전념하였을 뿐 세상의 변화에는 무관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티베리우스 황제 치세 때 로마 제국 내의 어느 속주가 3시간 동안 초자연적인 암흑에 휩싸인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현상은 대플리니우스와 세네카의 생애 중에 일어났는데도 이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박물지」의 저자로 유명한 플리니우스는 카이사르가 암살된 후 계속 이어진 햇빛 부족 현상에 대해서 기록했고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리스도가 수난당한 날에는 그보다 더 초자연적인 암흑에 휩싸였지만 주목을 끌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대 플리니우스(AD 23~79, 박물지의 저자)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죽음(빈센초 카무치니,18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