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제국쇠망사 2권 17장 Part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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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저서 읽기/로마제국 쇠망사(에드워드 기번, 윤수인_김희용 옮김)

로마제국쇠망사 2권 17장 Part 2

콘스탄티노플 대궁전: 제국의 중심부
콘스탄티노플 중심지 지도

콘스탄티노플 대궁전은 약 천 년 동안 비잔틴 제국의 의례적 심장부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 궁전은 히포드롬과 해벽 사이에 경사진 부지에 위치했으며, 오늘날 술탄 아흐메트 지역에 해당합니다. 대궁전은 대략 600x500m에 달하는 거대한 복합 단지로, 남동쪽으로는 마르마라 해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궁전은 서쪽으로 히포드롬, 북쪽으로 레기아(Regia), 아우구스타이온(Augustaion), 원로원 건물에 인접했으며, 남쪽과 동쪽으로는 해벽에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그 규모와 전반적인 특성상, 대궁전은 수많은 건물, 개인 항구, 대로, 광장, 테라스, 경사로, 계단, 정원, 분수 등 다양한 편의 시설을 갖춘 "도시 속의 도시"와 같았습니다.  

술탄 아흐메트 공원

궁전의 건설은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시작되었으며, 가장 오래된 부분인 다프네 궁전(Palace of Daphne)은 4세기와 5세기에 콘스탄티누스와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 건설되었습니다. 이 복합 단지는 현재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가 서 있는 부지를 차지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다프네 궁전에는 히포드롬과 인접한 궁전들, 제욱시포스 목욕탕, 아우구스타이온, 하기아 소피아, 하기아 이레네 등 여러 교회, 밀리온(Milion)과 메세(Mese)의 시작점, 도서관과 페리스타일 안뜰인 '바실리카' 등이 포함되었습니다. 궁전에는 메세로 통하는 기념비적인 현관인 칼케(Chalke)가 있었는데, 이 건물은 532년 니카 폭동으로 파괴된 후 유스티니아누스 1세에 의해 재건되었습니다. 칼케는 이후 감옥이나 법원으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1200년 이후로는 언급되지 않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궁전을 더욱 확장하고 벽을 강화했으며, 크리소트리클리노스(Chrysotriklinos)와 같은 중요한 접견실과 홀들이 추가되었습니다. 테오필로스 황제와 바실리우스 1세 황제도 각각 트라이콘코스(Trikonchos), 시그마(Sigma), 카이누르기온(Kainourgion), 네아 에클레시아(Nea Ekklesia; 새 교회), 치카니스테리온(Tzykanisterion; 폴로 경기장)과 같은 새로운 건물과 시설을 추가하며 궁전의 규모와 화려함을 더습니다.  

 

그러나 대궁전은 1204년 제4차 십자군에 의한 약탈과 라틴 제국의 점령 기간 동안 심각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팔레올로고스 왕조 시대에 궁전은 점차 쇠퇴하여, 오스만 제국에 정복될 무렵에는 네아 에클레시아를 제외하고는 거의 남아있는 것이 없었습니다.  

 

대궁전의 고고학적 유적은 상대적으로 제한적이며, 그 이해도도 부분적입니다. 발굴된 유적에는 테라스 시스템, 부콜레온 궁전의 해안 쪽 정면, 방어벽의 일부, 그리고 화려한 바닥 모자이크로 장식된 페리스타일 안뜰이 선행하는 앱시드 홀의 잔해가 포함됩니다. 이러한 고립된 발견과 문헌 자료의 모호성으로 인해, 19세기 이후 여러 시도에도 불구하고 궁전의 포괄적인 건축적 재건은 어려운 실정입니다. 현재는 9세기에서 10세기경의 모습이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대궁전은 대칭적으로 계획된 복합 단지라기보다는 다양한 시기의 건물들이 정원과 운동장으로 분리된 불규칙한 집합체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이스탄불 모자이크 박물관에는 대궁전 발굴 시 발견된 모자이크 컬렉션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제욱시포스 목욕탕: 공공 편의 시설과 예술적 웅장함

제욱시포스 가상이미지

목욕탕은 서기 100년에서 200년 사이에 건설되었으며, 서기 196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에 의해 비잔티움이 파괴된 후 재건되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서기 330년경 콘스탄티노플이 새로운 수도로 봉헌될 무렵 이 목욕탕을 확장하여 완성했습니다. 목욕탕은 수많은 고대 조각상들로 장식되어 유명했으며, 역사적 인물과 신화 속 인물들을 묘사한 조각상들이 풍부하게 소장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메세(Mese)를 따라 상점과 다른 사업체들이 있었고, 그 임대료는 건물의 유지 보수에 사용되었습니다.  

 

서기 532년 니카 폭동(Nika Revolt)으로 인해 콘스탄티노플의 절반이 폐허가 되고 수천 명이 사망하는 최악의 봉기가 발생했을 때, 제욱시포스 목욕탕은 파괴되었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몇 년 후 이 단지를 재건지만, 이전의 유명한 조각상들이나 다른 유물들을 복원하거나 재창조할 수는 없었습니다. 7세기 초에는 비잔틴 제국에 대한 군사적, 정치적 압력으로 인해 공중 목욕이 흔한 사치 시설에서 드물고 그 이용도 불규칙하게 됨으로써, 많은 공공 시설들이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제욱시포스 목욕탕이 목욕 시설로 사용되었다는 마지막 기록은 713년에 나타나며, 이후 다른 용도로 전환되었습니다. 목욕탕의 일부는 누메라(Noumera)라는 감옥이 되었고, 다른 일부는 비단 공장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입니다. 1460년대에는 제욱시포스 목욕탕의 일부가 파티흐 모스크(Fatih Mosque) 건설에 재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거의 천 년 후인 1556년, 오스만 건축가 미마르 시난(Mimar Sinan)은 같은 부지에 하세키 휘렘 술탄 하맘(Haseki Hürrem Sultan Hamamı)을 건설하였습니다.  

하세키 휘렘 술탄 하맘(Haseki Hürrem Sultan Hamamı) (터키탕)

1925년 술탄 아흐메트 메드레세(Sultan Ahmed Medrese) 주변 작업 중 대규모 아치형 방의 잔해가 발견되었고 , 1927-1928년 발굴 조사에서는 6세기 벽의 잔해와 조각상 받침대가 발견되어 이 장소가 제욱시포스 목욕탕임을 확인하는 데 기여하였습니다. 발굴된 유물 중에는 토기와 유약 도기 등이 포함되어 콘스탄티노플의 건축 디자인과 사회적 관심사에 대한 독특한 통찰력을 제공하였습니다.  

 

인구

인구 추정치에 따르면, 4세기에서 5세기에는 도시 인구가 25만에서 100만 명에 달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1204년 제4차 십자군이 도시를 약탈하기 전에는 인구가 약 30만 명으로 추정되었는데, 이는 당시 베네치아(약 8만 명)나 파리(약 2만 명)보다 훨씬 큰 규모였습니다. 이러한 인구 증가는 도시의 급속한 성장을 반영하며, 콘스탄티누스 성벽의 확장이 필수적이었음을 시사합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새로운 수도의 다른 매력과 더불어, 옛 성벽 너머의 빈터에 정착하는 이주민들에게 무료 빵과 시민권을 부여했습니다. 또한 기독교인들에게 환영받았고, 다른 신앙에 대한 관용과 유대인에 대한 자비가 있었습니다. 4세기 말에 글을 쓴 성 요한 크리소스톰은 많은 귀족들이 10~20채의 집을 소유하고 1,000~2,000명의 노예를 가졌다고 언급하였습니다. 문은 종종 상아로 만들어졌고, 바닥은 모자이크나 값비싼 양탄자로 덮여 있었으며, 침대와 소파는 귀금속으로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도시가 함락될 무렵에는 인구가 5만 명으로 감소하였습니다. 그러나 정복자 메흐메트 2세는 펠로폰네소스, 살로니카(현 테살로니키), 그리스 섬들과 같은 다른 정복 지역의 인구를 이주시켜 도시를 재건하기 시작습니다. 이로 인해 1480년경에는 인구가 6만~7만 명으로 증가하였습니다.  

 

겹겹이 쌓인 역사와 지속적인 유산

콘스탄티노플은 비잔틴 제국의 수도로서 천 년 이상 지속되며, 단순한 행정 중심지를 넘어 문화, 종교, 경제의 허브 역할을 수행하였습니다. 보스포루스 해협에 위치한 전략적 입지 덕분에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주요 교역로를 통제하며 중요한 경제적 중심지가 되었고 , 견고한 성벽은 도시의 오랜 요새로서의 역할을 가능하게 하였습니다. 특히 아랍 세력의 확장에 대한 저항의 보루로서, 674-678년과 717-718년의 아랍 포위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내며 유럽 문명의 흐름을 바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포룸, 콘스탄티누스 기둥, 히포드롬, 대궁전, 제욱시포스 목욕탕과 같은 건국 기념물들은 콘스탄티노플의 초기 도시 계획과 제국적 이념을 구현한 핵심 요소들이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포룸의 독특한 원형 디자인과 그 위에 세워진 콘스탄티누스·아폴론 조각상은 황제의 복합적인 종교적 정책과 제국적 상징주의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히포드롬은 단순한 경기장을 넘어 권력의 시현과 공공 생활의 중심지였으며, 델포이의 뱀 기둥과 같은 고대 유물들의 이전은 콘스탄티노플이 '신 로마'로서 고대 세계의 유산을 흡수하려는 의지를 나타냅니다. 대궁전과 제욱시포스 목욕탕은 제국의 웅장함과 시민들의 편의를 위한 인프라를 상징하며, 도시가 제공하는 풍요로운 삶의 질을 엿볼 수 있게 합니다.

뱀기둥_머리가 있는 상태(좌),
머리가 잘린 뱀기둥
잘린 뱀머리(이스탄불 고고학 박물관)
콘스탄티누스 기둥

콘스탄티노플의 역사는 문헌 기록과 고고학적 증거의 상호 작용을 통해 이해될 수 있습니다. 대궁전처럼 고고학적 유적이 제한적인 경우, 문헌 자료가 주요 정보원이 되지만 , 콘스탄티누스 기둥이나 뱀 기둥처럼 현존하는 유적은 문헌 기록을 보완하고 때로는 수정하며 더 깊은 이해를 가능하게 합니다. 1920년대와 1930년대의 발굴 작업은 제욱시포스 목욕탕과 콘스탄티누스 포룸의 일부를 확인하는 데 기여하였으며, 이는 고고학이 과거의 물리적 흔적을 통해 역사적 서사를 풍부하게 만드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함을 보여줍니다.  

 

오늘날 콘스탄티노플의 많은 웅장함은 사라졌지만 , 콘스탄티누스 기둥(쳄베를리타쉬)과 히포드롬 부지(술탄 아흐메트 공원)처럼 변형된 형태로 남아있는 비잔틴 시대의 중요한 유적들은 여전히 이 도시의 영광스러운 과거를 엿볼 수 있게 합니다. 이 유적들은 단순한 돌덩이가 아니라, 고대 로마 제국의 유산을 계승하고 기독교 문명을 보존하며 동서양 문화 교류의 용광로 역할을 했던 콘스탄티노플의 겹겹이 쌓인 역사를 증언하는 살아있는 증거입니다. 현대 이스탄불의 도시 경관 속에서 이러한 비잔틴 시대의 흔적을 발견하는 것은 과거와 현재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강력한 기억 자료가 됩니다.  



히포드롬

비잔티움시대의 가상이미지(오른쪽에는 대궁전 단지가 있음)by https://wiki.onul.work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