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제국쇠망사 1권 16장 Part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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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저서 읽기/로마제국 쇠망사(에드워드 기번, 윤수인_김희용 옮김)

로마제국쇠망사 1권 16장 Part 4

서기 303년 2월 23일, 니코메디아 교회의 파괴

그리스도교인들에게 닥쳐올 시련은 이미 예고되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겨울 내내 황제의 비밀회의가 반복되고 있다는 소문에 불안해하며, 그 결과가 언제 자신들에게 닥칠지 근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로마 제국의 축제일인 테르미날리아, 2월 23일이 되자 그날이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전환점이 될 운명의 날이 됩니다.

새벽 무렵, 민정총독은 여러 장군과 군 장교, 징세관들을 이끌고 니코메디아 시내 중심에 있던 가장 아름답고 웅장한 중앙교회를 향해 갔습니다.


그들은 교회의 출입문을 강제로 부수고 안으로 난입했으며, 예배에 사용되던 성물을 찾으려 했지만 찾지 못하고, 결국 성서 몇 권을 꺼내 불태우는 것으로 분풀이를 해야 했습니다.

이때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명령을 수행하던 관리들무장한 병사들과 함께 교회를 공격할 준비를 철저히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마치 전쟁을 수행하듯 전투 태세로 도시 중심의 교회를 향해 밀고 들어갔습니다.

이 공격으로 인해, 로마 궁정에서도 바라보이던 거대한 교회당, 그리고 오랫동안 이교도들의 분노와 질투를 받아온 신성한 장소한순간에 무너져 폐허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교회 파괴가 아니라, 그리스도교에 대한 본격적인 국가적 박해의 신호탄이었으며, 이후 이어지는 대박해의 서막을 알리는 일이었습니다.

 

서기 303년 2월 24일, 그리스도교 박해 칙령 공포

니코메디아 교회가 파괴된 바로 다음 날, 서기 303년 2월 24일, 로마 제국은 마침내 그리스도교 전체를 겨냥한 첫 공식 박해 칙령을 공표합니다. 이 칙령은 단순한 제재를 넘어선 전면적인 종교 탄압의 시작이었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여전히 유혈 사태에는 조심스러운 입장을 취했지만, 그의 공동황제 갈레리우스의 격노와 강경한 주장은 이내 상황을 뒤바꿔 놓습니다.


갈레리우스는 희생 제물을 거부하는 자는 모두 화형에 처하라고 주장했고, 그 결과 그리스도교인들에게 가해진 처벌은 혹독하고도 철저했습니다.

  • 제국 전역의 교회를 뿌리까지 파괴하라는 명령
  • 비밀 예배를 드리는 자는 모두 사형에 처하라는 지침
  • 그리스도교 경전과 종교 문헌을 모두 몰수하여 공개 화형
  • 교회 재산 몰수 및 처분: 경매, 황실 귀속, 지방 자치단체에 하사

이 박해에는 철학자들과 지식인들조차 앞장섰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교 교리를 분석한 끝에, 예언자와 사도들의 글이 핵심임을 간파하고, 이를 제거하는 것이 교회를 해체하는 핵심이라 주장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인에 대한 시민권 박탈 조치도 동시에 시행되었습니다.

  • 자유민은 공직과 영예 박탈
  • 노예는 해방 금지
  • 신자 전체가 법의 보호에서 제외됨
  • 그리스도교인은 피해를 입어도 법적으로 호소할 수 없음

즉, 법적 보호는 제거되고, 처벌만 남은 체제가 수립된 것입니다. 이는 죽음보다도 길고 고통스러운 새로운 순교의 형태였고, 많은 신자들에게는 육체적, 정신적 피로를 안기는 정책이었습니다.

일반 시민들도 황제의 의도에 동조하게 되었고, 사회 전반에 그리스도교를 향한 냉대와 적대감이 확산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행정관들이 무분별한 폭력을 허용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로마 정부 내부에서도 일부는 공정함과 자제력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으며, 황제들 역시 통제를 벗어난 잔학 행위까지는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이 칙령은 단순한 법령이 아니라, 로마 제국 역사상 가장 조직적이고 치밀하게 구성된 박해의 기점이었습니다. 이후 그리스도교인들은 수년간 법적으로, 사회적으로 철저히 고립된 존재가 되었으며, 이 박해는 313년 밀라노 칙령 이전까지 지속적인 압박과 공포의 시대를 만들어냈습니다.

 

한 그리스도 교도의 열정과 처벌

— 진심이 불러온 순교의 불길

서기 303년, 박해의 칙령이 니코메디아의 광장에 게시되자마자,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한 그리스도교도 청년이 달려들어 칙령문을 찢어버리고, 그 자리에서 불경한 황제들을 향해 거침없는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그의 말은 단순한 불만이 아니라 신랄한 독설과 반역의 언사였습니다.
게다가 그가 신분이 높고 학식까지 갖춘 인물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그의 행동은 단순한 분노 표출을 넘어선 심각한 정치적 도전으로 간주되었습니다.

황제의 칙령문을 찢는 그리스도교도 청년

🔥 서서히 타오른 불꽃

결국 그는 사형을 선고받아 약한 불에 천천히 태워졌습니다.
사형집행인들은 단지 법을 집행하는 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황제에 대한 모욕에 대한 복수심으로 더욱 잔인한 형벌을 가했습니다.

그러나 고통 속에서도 그는 한결같은 미소와 조롱 섞인 침묵으로 맞섰습니다.
그의 몸은 타들어갔지만, 그 믿음은 끝내 꺾이지 않았습니다.

✝ 신중하지 못했지만, 찬란했던 열정

신중한 그리스도교인들조차 그의 행동이 무모했다는 점은 인정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순수하고 강렬한 신앙의 열정에는 경탄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는 단순한 순교자가 아니라, 영웅이자 전사로 추앙받게 되었고, 신자들은 그를 신앙의 불꽃으로 기억하며 찬사를 보냈습니다.

🛑 황제의 공포심을 자극하다

이 한 사람의 용기 있는 행동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마음속에 깊은 불안을 심어주었습니다.
신자들이 보내는 과도한 존경과 찬미는 황제를 두려움과 증오로 물들게 했고, 이는 곧 더 가혹하고 조직적인 박해의 불씨로 번졌습니다.


💭 짧은 묵상

그의 행동은 분명 무모했고, 한 사람의 저항이 제국의 박해를 바꾸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의 열정은 많은 이들에게 신앙의 불꽃이 되었고, 그 불꽃은 불길 속에서도 꺼지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 교도들의 탓으로 돌려진 니코메디아 궁전의 화재

서기 303년,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불안은 니코메디아에서 발생한 의문의 화재로 극에 달하게 됩니다.

불길은 황제의 궁정과 침실까지 두 차례나 덮쳤고, 비록 큰 물질적 손실 없이 진화되었지만, 사람들은 이 연속된 화재를 단순한 우연이나 실수가 아닌, 누군가의 ‘계획된 방화’로 보았습니다.

😠 혐의는 그리스도 교인들에게

그리스도교인들이 범인이라는 소문이 퍼졌습니다.

절망적인 박해 상황 속에서 분노한 그리스도교인들이 공정 내 황관들과 손잡고 디오클레티아누스와 갈레리우스 황제를 암살하려 했다는 설이 퍼졌고, 이로 인해 황제들은 공포와 분노에 휩싸였습니다.

그 결과, 공직에 충실했던 그리스도교 신자들조차 무차별적으로 체포되었고, 니코메디아 궁정은 고문과 처형으로 피로 물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대규모 처형은 끝내 진범을 밝혀내지 못했고, 오늘날까지도 그 진실은 미궁에 남아 있습니다.


🩸 황제들의 공포, 그리고 도피

갈레리우스 황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니코메디아를 떠났습니다.

그는 “이 도시에서 신앙 깊은 자들의 분노로 목숨을 잃을 것 같다”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떴습니다. 그리스도교인에 대한 그의 경계심과 증오는 이미 임계점에 도달해 있었습니다.

👀 서로 다른 시선: 콘스탄티누스 vs 락탄티우스

니코메디아 화재에 대해 직접 목격한 두 사람도 전혀 다른 해석을 남깁니다.

  •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이를 신의 경고로 받아들였고,
  • 교부 락탄티우스는 오히려 갈레리우스가 자작극으로 불을 질렀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화재가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교 박해가 극단으로 치달은 계기이자, 로마 제국 내부의 갈등과 공포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습니다.


📜 칙령의 집행


— 신속하게 퍼진 칙령과 신앙을 지킨 자와 꺾인 자들

서기 303년, 그리스도 교인을 겨냥한 박해 칙령이 전 로마 제국의 일반법으로 공표되었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와 갈레리우스 황제는 서방 황제들의 공식 동의를 기다리지 않았지만, 그들 또한 찬성할 것이라 확신했기에 제국 전역에 동시에 칙령이 발표되도록 비밀 지시를 내린 것으로 보입니다.

로마 제국은 국도와 역참 시스템이 잘 정비되어 있었기 때문에, 니코메디아 궁전에서부터 멀리 떨어진 속주까지 특급 속도로 명령을 전달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시리아에 명령이 도달하는 데 50일, 아프리카 도시에 도달하는 데 4개월이 걸릴 수는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칙령 전달이 지연된 이유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신중함 때문으로 추정됩니다.
그는 박해로 인한 혼란과 불만을 직접 눈앞에서 먼저 시험해 보고자 했던 것입니다.

🩸 초기에는 유혈을 피하려던 행정관들

처음에는 행정관들조차 피의 박해를 주저했습니다.
하지만 그 외의 가혹한 조치들—예배 금지, 성서 불태우기—는 허용되었고,
심지어 박해에 열의를 보이는 것을 장려하기도 했습니다.

✝️ 신자들의 갈등과 용기

신자들은 교회 장식품은 기꺼이 포기했지만, 성서를 불태우라는 명령 앞에서는 깊은 갈등에 빠졌습니다.

특히 아프리카의 펠릭스 주교는 완강하게 성서를 넘기길 거부했습니다.
그는 도시 관리에게 체포되어 속주 총독을 거쳐 이탈리아의 민정총독에게 이송되었고, 결국 루카니아의 베누시아에서 처형되었습니다.

그는 "거짓말로 둘러대는 답변조차 떳떳하지 않다"는 생각으로 끝까지 신앙을 지켰습니다.

펠릭스 사건은 황제의 새로운 조치로 이어졌습니다.
이후 속주 총독들은 성서 제출을 거부하는 자를 사형에 처할 권한을 부여받게 됩니다.

이 조치는 많은 신자들에게 순교의 기회로 여겨졌고,
반면 일부는 생존을 위해 성서를 넘기며 굴욕적인 배교를 택했습니다.

😔 배교의 상처, 교회의 분열

배교자는 단지 일반 신자들만이 아니었습니다.
수많은 주교들과 성직자들도 치욕을 감수하며 성서를 넘겼고, 그 결과 ‘배교자’라는 수치스러운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런 배교자들의 존재는 아프리카 교회에 깊은 불명예를 남겼고, 훗날 심각한 내부 분열과 불화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교회 파괴

— 신앙을 잃느니, 불 속으로 들어가겠다

로마 제국은 교회를 단순한 건축물이 아닌,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중심으로 인식하였고, 이에 따라 교회를 제거하는 정책을 강행하였습니다.
이미 성서의 번역본과 사본이 제국 전역에 널리 퍼져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철저히 색출하고 파괴하더라도 그 본질적인 영향력을 근절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정부는 배교한 신자들의 협조를 받아, 예배에 사용되던 성가집이나 문서까지 제거하고자 하였지만, 이는 오히려 교회 내부의 갈등과 분열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속주마다 정책의 집행 방식은 달랐습니다. 어떤 곳에서는 예배 장소를 봉쇄하는 선에서 멈췄지만, 어떤 지역에서는 교회의 문, 의자, 설교단을 꺼내어 장작처럼 불태우고, 건물 전체를 철저히 파괴하기도 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매우 비극적인 사건도 발생하였습니다. 프리기야의 한 작은 마을에서는 행정관과 주민들 다수가 그리스도교 신자였던 것으로 보이며, 박해 칙령을 실행하려는 총독은 병력을 동원하여 진입을 시도하였습니다.

이에 마을 주민들은 모두 교회 안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함께 죽기로 결의하였습니다. 이들은 어떠한 설득에도 교회를 떠나지 않았고, 결국 격분한 병사들은 교회 주변에 불을 지르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주민들이 아내와 자녀들과 함께 불에 타 숨지는 끔찍한 집단 참사가 벌어졌습니다.

이 사건은 특정한 이름이나 장소를 완전히 알 수는 없으나, 그리스도교 박해 시기의 실상과 신자들의 결연한 신앙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전해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