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제국쇠망사 2권 18장(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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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저서 읽기/로마제국 쇠망사(에드워드 기번, 윤수인_김희용 옮김)

로마제국쇠망사 2권 18장(2)

콘스탄티누스의 아들과 조카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세 아들과 두 명의 조카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아들 크리스푸스가 사망한 후, 남은 세 아들(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티우스 2세, 콘스탄스)을 차례로 부황제로 임명하여 제위를 잇게 했습니다. 이는 아들들에 대한 사랑으로 볼 수 있지만,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황제는 조카인 달마티우스와 한니발리아누스까지 부황제로 임명하는 이해하기 어려운 결정을 내렸습니다. 이로 인해 잠재적인 권력 다툼의 소지를 만들어 가문과 나라를 위험에 빠뜨렸습니다.

특히 한니발리아누스에게는 '노빌리시무스'라는 새로운 칭호와 함께 '왕(Rex)'이라는 파격적인 칭호까지 부여했습니다. 당시 로마에서 '왕'이라는 칭호는 폭군을 의미하는 매우 부정적인 단어였기 때문에, 이러한 조치는 매우 기이하고 부적절한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https://blog.aladin.co.kr/ 콘스탄티누스 대제 가계도
  • 콘스탄티누스는 세 아들을 후계자로 삼았습니다.
  • 더 나아가 두 조카까지 부황제로 임명하여 잠재적인 갈등을 유발했습니다.
  • 특히 조카 한니발리아누스에게는 로마에서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던 '왕'이라는 칭호를 부여하는 이례적인 결정을 내렸습니다.

 

아들과 조카들의 교육

1. 후계자 교육: 이상과 현실

  • 이상적인 교육: 황제는 5명의 후계자(아들 3명, 조카 2명)를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했습니다.
    • 신체 단련: 전쟁과 격무에 대비할 수 있도록 강도 높은 군사 훈련을 실시했습니다.
    • 학문 교육: 기독교, 철학, 법학 등 각 분야 최고 학자들을 고액으로 초빙해 가르치게 했습니다.
    • 정치 교육: 황제 자신이 직접 정치와 인간 사회에 대한 지식을 가르쳤습니다.
  • 교육의 한계:
    • 황제 자신은 역경 속에서 생존하며 실전 정치 감각을 익혔지만, 후계자들은 안락한 황궁에서 아첨꾼들에게 둘러싸여 성장했습니다.
    • 이들은 현실의 어려움을 겪어보지 못했고, 어린 나이에 정치에 참여한 것은 사실상 '국민의 희생을 대가로 한 정치 실습'이었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2. 권력의 분할과 통제

  • 영토 분할: 제국을 5개 권역으로 나누어 아들들과 조카들에게 통치를 맡겼습니다.
    • 콘스탄티누스 2세: 갈리아
    • 콘스탄티우스 2세: 동방 속주
    • 콘스탄스: 이탈리아, 서부 일리리쿰, 아프리카
    • 달마티우스 (조카):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그리스 (고트족 방어선)
    • 한니발리아누스 (조카): 폰투스, 카파도키아 등 (새로운 '왕국' 형태)
  • 견제 장치:
    • 각 부황제에게 독자적인 정부와 군대(호위대, 군단)가 주어졌습니다.
    • 하지만 황제는 자신의 최측근들을 고위 관료로 파견하여 이들을 보좌함과 동시에 감독하게 했습니다.
    • 부황제들의 권한은 점차 커졌지만, 제국의 유일한 최고 통치자를 의미하는 '아우구스투스' 칭호는 오직 콘스탄티누스 황제만이 사용하며 절대 권력을 유지했습니다.

3. 말년의 제국 상황

  • 이러한 통치 시스템 아래, 콘스탄티누스 황제 말기 14년은 키프로스의 소규모 반란과 국경 분쟁 개입 외에는 큰 사건 없이 평화와 안정이 지속되었습니다.

사르마티아인들의 관습

사르마티아인들

1. 정체와 생활 방식

  • 정체: 아시아계의 야만적인 관습을 가졌지만, 외모는 유럽인과 비슷한 유목 민족입니다.
  • 생활: 소가 끄는 이동식 마차(막사)에서 생활하며, 가축을 키우고 사냥과 약탈을 일삼았습니다.
  • 주력군: 주력 부대는 모두 기병으로, 여분의 말을 끌고 다녀 기동성이 매우 뛰어났습니다.

2. 독특한 무기와 방어구

  • 갑옷(흉갑): 철이 부족했기 때문에, 말발굽 조각을 비늘처럼 얇게 잘라 천에 꿰매어 갑옷을 만들어 입었습니다.
  • 무기: 주 무기는 긴 창과 활이었습니다.
  • 치명적인 독: 가장 큰 특징은 무기 끝에 물고기 뼈로 만든 촉에 맹독을 발라 사용했다는 점입니다. 이 독 때문에 작은 상처도 치명적이었습니다.

3. 외모와 로마인의 시각

  • 외모: 덥수룩한 수염과 헝클어진 머리, 온몸을 덮은 모피 등 거칠고 험상궂은 모습이었습니다.
  • 로마인의 평가: 로마인들은 사르마티아인의 외모때문에 그들을 잔인하고 야만적인 민족으로 여기며 매우 두려워했습니다.
 

사르마티아인들은 유목 생활과 기병 중심 전투를 중시한 민족으로, 특이한 무기와 복장을 갖춘 채 로마인에게는 두려움과 야만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서기 331년, 고트 전쟁 

로마와 고트족의 전쟁

1. 전쟁의 원인

  • 고트족과 사르마티아족의 다툼: 당시 고트족과 사르마티아족은 영토 문제로 끊임없이 싸우고 있었습니다.
  • 로마의 개입: 군사적으로 우세한 고트족에게 밀리던 사르마티아족이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 콘스탄티누스의 결정: 황제는 고트족의 힘이 너무 강해지는 것을 경계하고 있었기에, 약자인 사르마티아족을 돕기로 결정합니다.

2. 전쟁의 전개: 두 차례의 전투

  • 고트족의 선제공격: 로마가 참전한다는 소식에 고트족의 왕 아라리크는 기다리지 않고, 먼저 도나우 강을 건너 로마 영토(모에시아 속주)를 침략하고 약탈했습니다.
  • 1차전 (로마의 패배): 노령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섰지만, 예상외로 패배하여 굴욕적으로 후퇴해야 했습니다.
  • 2차전 (로마의 승리): 로마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다시 전투에 나서, 뛰어난 전술과 규율을 바탕으로 승리하며 명예를 회복했습니다.

3. 전쟁의 결과

  • 고트족 격퇴: 패배한 고트족은 도나우 강 너머로 완전히 쫓겨났습니다.
  • 승리의 영광: 이후 지휘권은 콘스탄티누스의 맏아들에게 넘어갔지만,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끈 최종적인 공로는 모두 아버지인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전략 덕분으로 여겨졌습니다.

 

서기 332년 4월

1. 새로운 동맹: 케르소네수스인들

  • 동맹 체결: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고트족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크림반도에 있던 케르소네수스인들과 동맹을 맺었습니다.
  • 동맹 배경:
    • 케르소네수스인들은 과거 고트족에게 침략당한 경험 때문에 적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 반면, 로마와는 소금, 모피 등을 수출하고 곡물, 가공품을 수입하는 등 무역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 군사적 지원: 이들은 로마의 원군 요청에 기꺼이 응해, 대규모 군대를 보내 고트족을 공격함으로써 로마군의 작전을 도왔습니다.

2. 고트족의 완전한 패배

  • 결정적 패배: 로마와 케르소네수스 연합군의 공격으로 사방에서 패배한 고트족은 산으로 도망쳤습니다.
  • 엄청난 피해: 이 과정에서 약 10만 명에 달하는 고트족 병사들이 추위와 굶주림으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 항복: 결국 고트족은 평화 조약을 애원했고, 왕의 맏아들을 로마에 인질로 보내는 조건으로 화해가 이루어졌습니다.

3. 동맹국에 대한 보상과 계산

  • 케르소네수스인에 대한 후한 보상:
    • 황제는 동맹의 충성심에 크게 만족하여, 지휘관 디오게네스에게 왕족에 버금가는 명예를 부여했습니다.
    • 또한, 그들의 무역선에 대한 관세를 영구히 면제해주고, 철, 곡물 등 필요한 물자를 정기적으로 지원하기로 약속했습니다.
  • 사르마티아족에 대한 계산적인 처리:
    • 반면, 전쟁의 원인이었던 사르마티아족에 대해서는 '멸망에서 구해준 것만으로도 충분한 보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따라서, 이들에게 매년 주던 지원금에서 이번 전쟁 비용을 제외하고 지급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서기 334년, 사르마티아인의 추방 

1. 로마에 대한 배신과 그 대가

  • 원인: 로마로부터 지원금이 깎이는 등 무시를 당했다고 생각한 사르마티아인들은 분노에 차서 로마 영토를 침략하는 어리석은 결정을 내립니다.
  • 결과: 격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직접 이들을 공격함과 동시에, 이들을 보호하던 방패를 거두고 고트족이 사르마티아를 공격하도록 내버려 둡니다.

2. 고트족의 침략과 예상치 못한 노예 반란

사르마티아 노예들의 반란

  • 고트족의 침공: 새로운 왕 게베리크가 이끄는 고트족이 쳐들어와 사르마티아 군대를 격파합니다.
  • 필사적인 반격: 궁지에 몰린 사르마티아인들은 자신들의 노예(리미간테스)들에게까지 무기를 주어 함께 싸우게 했고, 이들의 분투 덕분에 간신히 고트족을 몰아내는 데 성공합니다.
  • 내부의 적: 그러나 승리에 고무된 노예들은 자신들이 지켜낸 땅의 주인이 되겠다며 반란을 일으켰고, 주인인 사르마티아인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맙니다.

3. 나라를 잃고 흩어지는 사르마티아인

결국 사르마티아인들은 자신들의 노예들에게 쫓겨나 나라를 잃고 세 갈래로 흩어지는 난민 신세가 됩니다.

  1. 고트족에게 귀순: 일부는 차라리 옛 적이었던 고트족 밑으로 들어갔습니다.
  2. 콰디족에게 정착: 더 많은 수는 카르파티아 산맥을 넘어 콰디족의 영토에 정착했습니다.
  3. 로마 제국에 투항: 가장 많은 수(약 30만 명)는 로마 제국으로 눈을 돌려 황제에게 용서와 보호를 구했습니다.

4. 로마 제국의 흡수

  • 로마는 이들 난민의 요청을 받아들였습니다.
  • 30만 명에 달하는 사르마티아인들은 판노니아,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이탈리아 등 로마의 여러 지역에 땅을 받아 정착하게 되었고, 평시에는 로마의 국민으로, 전시에는 병사로 충성을 맹세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