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제국쇠망사 2권 18장(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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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저서 읽기/로마제국 쇠망사(에드워드 기번, 윤수인_김희용 옮김)

로마제국쇠망사 2권 18장(3)

콘스탄티누스의 죽음과 장례식/ 서기 337년 5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죽음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그의 통치 말년에 로마 제국의 강력한 힘을 대내외에 과시했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저항하는 고트족은 응징하고, 충성을 맹세한 부족은 너그럽게 받아들였습니다. 에티오피아, 페르시아, 인도 등 먼 나라에서도 사절단이 와서 제국의 평화와 번영을 축하할 정도였습니다.

그는 로마 역사상 아우구스투스 황제 이래 처음으로 30주년 기념 축제를 열 정도로 오랜 기간 통치하며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이 성대한 축제가 끝난 지 약 10개월 후, 그는 6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가벼운 병을 앓은 뒤 니코메디아의 아퀴리온 궁전에서 요양하던 중이었습니다.

그의 죽음 이후, 전례 없는 대규모 애도 행사가 열렸습니다. 로마 시민들은 그의 시신이 로마에 머물기를 원했지만, 황제의 유언에 따라 그가 세운 도시인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졌습니다.

콘스탄티노플 궁전에 안치된 그의 시신은 마치 살아있는 황제처럼 대우받았습니다. 황금 침상에 눕혀지고 왕관과 자색 옷으로 장식되었으며, 신하들은 매일 정해진 시간에 찾아와 살아있을 때와 똑같이 무릎을 꿇고 경의를 표했습니다. 이러한 연극 같은 절차는 정치적인 의도로 한동안 계속되었고, 일부 아첨꾼들은 이를 두고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신의 특별한 은총으로 죽어서도 나라를 다스린다"는 소문을 퍼뜨리기도 했습니다.

 

궁정의 파벌 싸움

죽은 콘스탄티누스 황제를 살아있는 듯 모시는 화려한 의식은 사실 공허한 겉치레에 불과했습니다. 황제가 죽자마자 그의 유언은 더 이상 힘을 발휘하지 못했고, 물밑에서는 이미 냉혹한 권력 투쟁이 시작되었습니다.

황제의 시신 앞에서 경건하게 고개를 숙이던 고위 관료와 장군들은 뒤에서 비밀스러운 음모를 꾸미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1차 목표는 황제가 후계자로 지목했던 그의 두 조카, 달마티우스와 한니발리아누스를 권력에서 제거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음모의 진짜 속내는 바로 황제의 절대적인 총애를 받던 최고 실세, 총독 아블라비우스(Ablabius)에 대한 극심한 질투와 복수심이었습니다. 아블라비우스는 황제의 두 조카를 후원하는 막강한 후견인이었고, 경쟁자들은 그의 권력을 무너뜨리기 위해 그의 정치적 기반인 조카들을 반드시 제거해야만 했습니다.

이를 위해 음모자들은 겉으로 다음과 같이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워 군대와 여론을 움직였습니다.

  • 황제의 친아들들이 계승 서열에서 우선이다.
  • 통치자의 수가 너무 많아지면 제국이 위험해진다.
  • 후계자들 간의 불화는 국가적 재앙을 초래할 수 있다.

결국 이 명분은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군대는 "오직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친아들들만이 제국을 통치해야 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자신들이 제거 대상이 된 것을 알게 된 두 조카는 저항하거나 도망칠 기회도 없이 무력하게 사로잡혔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운명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아들인 콘스탄티우스가 도착하면서 최종적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이는 결국 황제의 아들이 자신의 사촌들을 제거하는 것을 승인함으로써, 아블라비우스의 정적들이 그의 세력을 완전히 파괴하고 권력을 장악했음을 의미합니다.

 

학살 당한 황실가

콘스탄티누스 대제 가계도

콘스탄티누스 황제 사후, 그의 아들 콘스탄티우스가 동방 속주에서 가장 먼저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도착했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불안에 떠는 친척들에게 안전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하며 모두를 안심시켰습니다.

그러나 이 약속은 잔인한 계획을 실행하기 위한 위선에 불과했습니다. 콘스탄티우스는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할 교묘한 명분이 필요했고, 이때 위조된 유언장이 등장합니다.

  • 가짜 유언장: 그는 부왕 콘스탄티누스가 남긴 친필 유언장이라며 두루마리를 하나 공개했습니다.
  • 충격적인 내용: 그 유언장에는 "나의 동생들(즉, 콘스탄티우스의 숙부들)이 나를 독살한 것 같으니, 아들들이 복수해달라"는 거짓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 가짜 유언장이 공개되자 군대는 즉각 격분했습니다. 숙부들을 포함한 친척들은 필사적으로 자신들의 무고함을 주장했지만, 분노한 군인들의 함성 앞에 모든 변명은 묵살되었습니다. 법과 절차는 완전히 무시된 채, 무차별적인 학살이 시작되었습니다.

  • 희생자들: 이때 콘스탄티우스의 두 숙부, 사촌 일곱 명, 고모부인 귀족 옵타투스, 그리고 이전에 이야기했던 총독 아블라비우스 등 수많은 황족과 고위 관료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숙청이 더욱 끔찍했던 이유는, 콘스탄티우스가 희생자 중 한 명인 율리우스 숙부의 사위였고, 그의 여동생 역시 희생된 사촌 한니발리아누스의 아내였다는 점입니다. 가문의 결속을 위해 맺었던 겹사돈 관계조차 피의 숙청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이 끔찍한 대학살 속에서 살아남은 황족은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의 두 어린 아들, 갈루스와 율리아누스(훗날 황제가 됨) 단 두 명뿐이었습니다.

훗날 콘스탄티우스 황제는 이 사건에 대해, 자신이 어렸고 신하들의 거짓된 조언과 군대의 폭력에 휩쓸려 어쩔 수 없이 저지른 일이라며 잠시 후회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고 전해집니다.

 

서기 337년 9월, 제국의 분할

Ian Mladjov 자료 제공

 

친척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살아남은 세 아들은 회담을 열어 로마 제국을 세 조각으로 나누어 가졌습니다. 이 영토 분할은 군대의 동의를 얻었으며, 로마 원로원은 세 형제에게 공식적으로 황제(아우구스투스) 칭호를 부여했습니다.

당시 이들의 나이는 매우 어렸습니다.

  • 맏아들 콘스탄티누스 2세 (21세): 갈리아, 브리타니아 등 제국의 서쪽 지역을 맡았습니다.
  • 둘째 아들 콘스탄티우스 2세 (20세):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포함한 트라키아와 동방의 모든 속주를 차지했습니다. 그가 바로 이전의 학살을 주도한 인물입니다.
  • 막내아들 콘스탄스 (17세): 이탈리아, 아프리카를 포함한 제국의 중앙 지역을 다스리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20대 초반과 10대 후반에 불과한 젊은 세 형제가 피의 숙청 위에서 제국의 새로운 공동 통치자로 등극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