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제국쇠망사 2권 18장(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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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저서 읽기/로마제국 쇠망사(에드워드 기번, 윤수인_김희용 옮김)

로마제국쇠망사 2권 18장(1)

2권 18장의 주요내용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품성 · 고트 전쟁 ·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사망 · 세 아들에 의한 제국 분할 · 페르시아 원정 · 콘스탄티누스 2세와 콘스탄스 황제의 비극적인 죽음 · 마그넨티우스의 찬탈 · 내전 · 이탈리아의 정복 · 콘스탄티우스 황제의 승리

 

콘스탄티누스의 품성

콘스탄티누스 1세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제국의 수도 이전과 행정·종교 제도 변화를 이끈 인물로, 그의 성격에 대한 평가가 극명하게 갈립니다. 기독교인들은 그를 구원자이자 성인으로 칭송하는 반면, 반대자들은 잔인한 폭군으로 비난했습니다. 이러한 상반된 평가는 후대까지 이어져 그를 풍자와 찬양의 대상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가장 열렬한 반대자들조차 인정하는 미덕들을 종합하면, 그의 비범한 면모를 공정하게 평가할 수 있습니다. 궁극적으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복합적인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생애 각 시기를 개별적이고 적절한 관점에서 조명해야 합니다.

콘스탄티누스의 덕목

콘스탄티누스 1세(재위기간: 306~337_31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뛰어난 신체적, 정신적 자질을 모두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는 위풍당당하고 우아한 풍채를 지녔으며, 남성적인 용기와 활동성을 겸비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절제의 미덕을 꾸준히 지키며 강인한 체력을 유지했습니다.

황제는 사교 생활에서 치밀하고 능숙한 대화를 구사했으며, 때로는 자신에게 위험하거나 무례한 농담을 던지는 이들에게도 너그럽고 정중한 태도로 대했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그의 우정은 진실하고 굳건하여 오래 지속되는 관계를 형성했습니다.

비록 정규 교육을 충분히 받지는 못했지만, 학문의 가치를 정확히 평가하고 우수한 재능을 알아보는 능력이 탁월했습니다. 이 때문에 당시 학자들과 학문은 황제의 비호를 받으며 크게 번성했습니다. 복잡한 업무를 처리할 때 황제의 능력이 더욱 돋보였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피로를 모르는 강인한 정신력으로 끊임없이 독서와 연구에 몰두하고, 외국 사절들을 접견하며 국민들의 고충을 경청하는 등 다양한 업무를 처리했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정책에 비판적이었던 사람들조차 황제가 어렵고 힘든 계획들을 흔들림 없이 수립하고 실행하는 능력을 인정했습니다.

콘스탄티누스의 변화 (서기 324~337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초기에는 국민의 사랑을 받았으나, 단독 통치권을 확립한 후 점차 변화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324년 리키니우스를 물리치고 제국의 유일한 통치자가 된 후 13년간(324-337년)은 그의 권위가 절정에 달했지만, 동시에 논란의 여지가 많은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이 시기 콘스탄티누스는 동방적인 화려함과 궁정 의례를 도입했으며, 각종 의상과 장신구로 치장하며 이전의 소박한 군인 황제의 모습과는 다른 면모를 보였습니다. 또한 정적들에 대해서는 무자비한 처벌을 가했는데, 막시미아누스(310년)와 리키니우스(325년)의 처형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특히 그는 의심이 많아져 잠재적 위협으로 간주되는 인물들을 제거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으며, 이는 그가 초기에 보여준 "현명한 황자이자 소박한 로마 군인"의 모습과는 대조적입니다.

콘스탄티누스의 가족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두 번 결혼했습니다. 첫 번째 결혼은 미네르비나(Minervina)와 했으며, 그들 사이에서 크리스푸스가 태어났습니다. 두 번째 결혼은 막시미아누스의 딸 파우스타(Fausta)와 했으며, 그들 사이에서 콘스탄티누스 2세, 콘스탄티우스 2세, 콘스탄스 등 세 아들과 콘스탄티나, 헬레나 등 두 딸이 태어났습니다.

그의 형제들로는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 달마티우스, 한니발리아누스가 있었으며, 이들은 황실의 중요한 지위를 차지했습니다. 특히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의 아들 갈루스와 율리아누스는 후에 황제가 되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에게는 두 명의 누이동생 아나스타시아와 콘스탄티아가 있었으며, 콘스탄티아는 리키니우스 황제의 미망인이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 가문은 플라비우스 가문 출신이었습니다. 337년 콘스탄티누스가 사망한 후 황실 내 대숙청이 벌어졌는데, 이때 달마티우스와 한니발리아누스를 비롯한 많은 황족들이 살해되었습니다. 이 대숙청에서 콘스탄티우스 2세와 율리우스 콘스탄티우스의 두 아들 갈루스, 율리아누스가 살아남았으나, 갈루스는 후에 354년 콘스탄티우스 2세에 의해 처형되었고, 결국 율리아누스만이 최종적으로 생존하여 황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크리스푸스의 미덕

크리스푸스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장남이자 초기 제국의 유력한 후계자였습니다. 그는 뛰어난 교육을 받았으며, 특히 군사적 재능이 탁월했습니다. 318년부터 갈리아에서 게르만족 침입을 성공적으로 막아냈고, 324년 리키니우스와의 전쟁에서는 헬레스폰트 해전을 승리로 이끌며 아버지의 최종 승리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이러한 군사적 성과로 인해 크리스푸스는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궁정과 군대, 그리고 국민들의 존경과 애정을 한몸에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제국의 미래 지도자로 기대했으며, 그의 덕목과 능력은 널리 인정받았습니다.

서기 326년, 콘스탄티누스의 의혹

크리스푸스의 뛰어난 능력과 인기는 역설적으로 그에게 위험이 되었습니다. 324년 단독 통치가 시작된 후, 황제의 권위에 대한 잠재적 위협을 우려한 콘스탄티누스는 점차 의심의 눈초리로 아들을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역사가들은 이 시기 황실 내부의 복잡한 정치적 갈등을 추측하고 있습니다. 크리스푸스가 계모 파우스타와 그녀의 아들들에 대해 불만을 품었을 가능성, 그리고 파우스타가 자신의 아들들의 지위를 위해 크리스푸스를 견제했을 가능성이 제기됩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경위는 당시 기록들이 이 사건을 거의 언급하지 않아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결국 326년 봄, 콘스탄티누스는 크리스푸스를 반역 혐의로 체포하여 처형했습니다. 이는 황제가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친아들까지 제거하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서기 326년 5-6월, 크리스푸스의 죽음

(? ~ 326)

크리스푸스는 326년 5월 중순경 이스트리아 반도의 폴라(현재 크로아티아 풀라)에서 처형되었습니다. 역사적 기록에 따르면 그는 독살로 생을 마감했으며, 이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즉위 20주년 기념 행사가 진행되던 시기였습니다.

이 사건은 황제에게 매우 치명적인 과오로 여겨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크리스푸스의 결백을 믿었으며, 심지어 기독교인들조차도 교회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친아들 살해를 쉽게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크리스푸스의 죽음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명성에 큰 오점을 남겼습니다.

같은 시기에 리키니우스의 아들 리키니아누스도 처형되었으며, 크리스푸스의 생모 미네르비나 역시 이 비극을 견디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황후 파우스타의 운명

항후 파우스타(289~326)

크리스푸스의 죽음 이후 몇 달 뒤인 326년 7월, 황후 파우스타 역시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습니다. 그녀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명령으로 과열된 목욕탕에서 질식사했다고 전해집니다.

파우스타의 죽음에 대한 정확한 이유는 논란이 많습니다. 일부 역사가들은 그녀가 크리스푸스를 모함한 것이 밝혀져 처형되었다고 주장하며, 다른 이들은 그녀가 황실 노예와 불륜을 저질렀다는 혐의로 사형을 당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들의 진위 여부는 확실하지 않으며, 황실 내부의 복잡한 권력 다툼과 콘스탄티누스의 의심 많은 성격이 이 비극을 초래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저자 기번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인 헬레나가 크리스푸스의 죽음을 안타까워하여 파우스타의 죽음에 연루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연이은 황실 내 처형 사건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으며, 기독교도와 비기독교도 모두 황제의 이러한 행동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았습니다. 파우스타의 죽음은 많은 의혹과 추측을 남겼으며, 황실 내부의 어두운 면모를 드러낸 사건으로 역사에 기록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