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루타르크 영웅전_누마 폼필리우스(NUMA POMPILIUS, BC 715 로마 673 재위, 홍사중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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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저서 읽기/플루타르크 영웅전

플루타르크 영웅전_누마 폼필리우스(NUMA POMPILIUS, BC 715 로마 673 재위, 홍사중 옮김)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그나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 가 주조한 로마 주화에 나오는 누마 폼필리우스의 모습. 피소는 자신이 누마 임금의 후손이라고 주장하였다(위키디피아)

누마 폼필리우스는 폼필리우스의 넷째 아들로 서민 출신입니다. 그는 타티우스의 딸, 타티아와 결혼하였고, 외국인 신분으로 타티우스와 함께 로마 공동의 왕이 되었습니다. 시민들을 전투적으로 훈련시켰으나 민주적이고 평화적인 정치의 기틀을 세운 현명한 사람으로 뮤즈의 사랑을 받았다고 합니다. 
 
작가 플루타르크는 영웅들의 실제 살았던 시기를 알아내는 데 어려움을 겪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누마 폼필리우스도 그중 한 명이었는데, 작가는 나름대로의 고증을 통하여 그 시기를 추측하고 있습니다.
 
당시 로마를 지배하고 있던 로물루스가 원로원들과 로마 시민들과 같이 제사를 지내던 도중 사라져 버린 사건으로 인해 귀족들은 시민들로부터 의혹의 눈초리를 받고 있었습니다. 귀족들이 로물루스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여 죽였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당황한 귀족들은 로물루스를 신격화하여 바람을 타고 승천했다고 주장하였고, 프로쿨루스라는 사람을 시켜 로물루스가 승천하면서 자신을 '퀴리누스'라고 부르라고 명령하는 것을 직접 들었다고 맹세하게 합니다.
 
이제 로물루스에 대한 의혹이 사라지자 새로운 왕을 정하는 문제로 또 다른 갈등이 생겨납니다. 왕은 없지만 나라의 질서를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 150명의 원로들이 서로 밤낮으로 6시간씩 신에게 제사 지내며, 중요한 정무를 보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시민들은 또 의심스러운 눈으로 귀족들을 바라봅니다. 왕을 정하지 않고 귀족정치를 하려는 것이 아니냐는 의구심을 품은 것입니다.
 
당황한 귀족들은 서둘러 왕을 뽑으려 합니다. 그런데 로마를 구성하고 있는 사비니 인과 로마 인들 사이에 갈등이 생깁니다. 서로 자신들과 같은 출신의 왕을 뽑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회의를 열어 궁리 끝에 사비니 인은 로마인들 중에 한 사람을 뽑고, 로마인들은 사비니인들 중에 한 사람을 뽑기로 한 것입니다. 궁리 끝에 생각해 낸 방법입니다.
 
그 결과 사비니 부족 사람으로, 누마 폼필리우스가 왕이 됩니다. 누마는 로마 인들에 의해 선출되었지만, 사비니 인들에게도 뜨거운 환영을 받습니다. 누마는 폼피리우스 가문의 4형제 중 막내로, 4월 21일에 태어났다고 하는데, 우연히도 로마가 세워진 날과 일치합니다. 
 
누마는 성품이 온화했으며, 검소한 생활을 하는 것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이러한 성품이 알려지자, 로물루스와 공동왕이었던 타티우스는 자신의 외동딸을 누마와 결혼시켜 사위로 삼습니다. 누마와 결혼한 타티아는 결혼 전 화려하게 살았던 삶을 포기하고 남편의 철학에 맞추어 검소하고 조용한 생활에 적응합니다. 그러나 결혼한 지 13년 만에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누마가 왕으로 선출되었을 때 로마에서 온 대표자들(프로쿨루스, 벨레루스)이 그를 찾아가 왕이 되어달라고 요청했으나, 그는 자신은 유유자적하게 사는 것을 좋아하며, 왕이 되면 각종 의혹에 휩싸이게 될 텐데 자신은 그런 생활이 맞지 않는 평범한 사람일 뿐이며, 전쟁을 싫어하고 평화를 좋아하기 때문에 로마의 왕으로 적합하지 않음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두 부족이 원하는 사람은 누마뿐이었기 때문에 대표자들이 간곡하게 부탁하였고, 옆에서 보고 있던 그의 아버지와 친척인 마르키우스의 설득으로 마지못해 요청을 받아들입니다. 
누마의 아버지는 누마가 앞으로는 로마가 전쟁보다 질서와 안정을  추구할 수도 있으며, 중용을 지키는 사람이 왕위에 있으면 전쟁으로 생긴 사나운 마음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다고 하며 설득했다고 합니다. 
 
누마는 만장일치로 왕이 됩니다. 누마가 왕이 되어 처음 한 일은, 로물루스를 최측근에서 보좌하던 호위병들 3백 명을 해산한 것입니다. 자신에게 적대적인 사람이 없었던 누마이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일인 것 같습니다. 또한 유피테르와 마르스를 섬기는 사제 외에 로물루스를 섬기는 사제(플라미네스)를 지정합니다. 
 
이는 로마시민들이 로물루스의 죽음으로 인한 의혹을 해소하는 데 도움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렇듯 왕이 되기 싫었던 누마였지만 막상 왕이 되고 난 후에는 자신의 철학을 하나씩 실행에 옮겨갑니다.
 
누마는 플라톤이 '열기로 불타오르는 도시'라고 표현했던 로마를 평화롭게 만드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이라 예상하고 종교적인 행사로 뜻을 이루어보려 합니다. 그는 시민들이 종교에 대한 경외심을 갖게 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여러 가지 신비한 경험을 퍼뜨렸고, 시민들은 초자연적인 두려움으로 호전적인 기질을 누그러뜨리게 됩니다.
 
누마가 로마 인들에게 사람이나 동물의 형상으로 신의 조각상을 만들어서 숭배하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에 무려 170년 동안 어떤 신상도 세워지지 않은 상태로 로마의 신전이나 사원이 순수하게 보존될 수 있었다고 합니다.
 
피타고라스와 누마는 서로 친분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는데, 그 근거로는 두 사람의 철학이나 정책에서 서로에게 영향을 끼친 것으로 여겨지는 부분들이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로마의 시민권 명부에는 피타고라스라는 이름이 기록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누마의 4명의 아들 중 한 명의 이름과 피타고라스의 아들(마메르쿠스)의 이름이 같았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누마는 '폰티피케스'라고 부르는 사제 제도를 처음 만들었고, 그 자신이 첫 번째 제사장이 됩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내용으로는 제사장의 권위와 명령에도 한계가 있음을 명시했다는 점입니다.
 
누마는 신을 섬길 처녀들을 뽑아서 영원히 꺼지지 않는 성화를 지키게 하는 제도를 처음 시행했다고 합니다. 아이를 낳지 않은 처녀는 타오르면서도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 불과 닮았다고 생각했다고 전해집니다. 이들은 신녀의 임무(30년)가 끝나면 결혼을 할 수 있었지만, 대부분은 결혼을 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엄격한 규율 속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결혼한 신녀들의 생활이 대부분 불행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성화를 모셔둔 베스타 신전을 처음 지은 사람은 누마였는데, 베스타 신전의 모양이 둥근 것은 우주 전체의 모습을 모방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 당시 피타고라스 학파와 만년의 플라톤은 지구가 고정되어 있으며 하늘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믿지 않았다고 합니다. 
 

베스타신전(위키디피아제공)
베스타신전의 구조(Google)

누마는 장례절차와 상복 입는 기간 등을 정하기도 합니다. 로마를 평화의 국가로 만들고 싶었던 누마는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여러 제사장 제도를 마련합니다. 그중에서 살리와 페키알레스 제도에 대해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페키알레스는 평화의 수호자들로, 대화와 중재로써 모든 분쟁을 멈추게 하고, 도저히 타협할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기 전까지는 무기를 들고 싸우는 일을 허락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는 평화를 중요시하는 누마의 철학이 들어간 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 인들에게 있어서 평화란 전쟁이 아니라 대화를 통해 분쟁을 해결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페키알레스의 승인 없이는 왕이든 군인이든 무기를 드는 것은 불법이었다고 합니다. 책에서는 로마의 페키알레스의 신분으로 클루시니안과 갈리아의 전쟁을 중재하러 나선 파비우스 암부스투스라는 사람에 대한 기록이 나옵니다. 그는 클루시니안을 포위하고 있는 갈리아 인들을 중재하러 나섰으나 자신의 뜻이 관철되지 않자, 화가 나서 선전포고도 없이 휴전조약을 깨고 클루시니안 편에 서서 갈리아와 전쟁을 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갈리아 인들은 사절단을 통해 그들의 불만을 전달합니다. 원로 회의 결과 파비우스를 갈리아 인에게 넘겨주기로 결정되었으나, 그가 결정에 따르지 않고 숨어버렸기 때문에 화가 난 갈리아 인들이 로마를 쳐들어와서, 카피톨리누스 이외의 모든 것을 파괴하고 로마를 점령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다음은 살리라고 부르는 제사장의 기원에 대한 내용입니다. 누마가 로마를 통치한 지 8년째 되던 해, 엄청난 전염병이 이탈리아 전역을 덮쳐 로마 도시가 혼란에 빠졌던 때의 이야기입니다. 이때 하늘에서 청동으로 만든 방패가 내려왔는데, 누마는 그 방패가 로마의 전염병을 치료해 줄 것이라고 하였고, 그 방패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그와 똑같은 방패를 열한 개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대부분의 장인들은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으나, 마르무리우스 베트리우스라는 뛰어난 장인이 진짜와 가짜의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똑같이 만드는 데 성공합니다. 누마는 진짜를 포함한 12개의 방패를 지키는 일을 살리라는 제사장에게 맡겼던 것입니다. 
 
제사장 제도를 정한 누마는 베스타 신전 근처에 레기아라는 왕궁을 세웁니다. 그는 이곳에서 종교적인 일처리 등 정무를 보았으며, 혼자만의 명상시간을 갖기도 합니다. 아마도 누마는 명상을 통해 마음의 평정심을 유지하고 통치를 하는 데 전념할 수 있었던 같습니다.
 
누마는 종교적인 훈련을 엄격하게 시행했는데, 이는 호전적이었던 로마 인들을 순종적인 기질로 바꾸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작가는 누마에 대한 신화적인 내용을 예를 들어 소개하고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믿을 수 없는 이야기라고 소개하는 것은 누마와 유피테르가 대화를 나누었다는 내용입니다. 누마는 시민들이 종교에 대한 경외심을 갖도록 하기 위해 여러 가지 신기한 이야기들을 만들어내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누마는 땅의 경계선을 처음으로 정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로마를 건국한 로물루스는 왜 땅의 경계선을 정하지 않았을까요? 이는 로마가 다른 영역의 땅을 정복할 때 자신의 부정을 드러내는 증거가 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로물루스는 다른 지역 영토를 계속 정복하여 확장하면서도, 부정적인 이미지는 갖고 싶지 않았었던 것 같습니다. 누마는 로물루스가 열심히 점령한 토지를 어려운 시민들에게 모두 나누어주었다고 합니다.  그는 비참한 삶을 사는 사람을 구제하고 농사를 지으면서 그들의 마음이 땅처럼 순화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그런 혜택을 주었다고 합니다. 
 
누마는 모든 땅을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 '파구스'라는 이름을 붙이고, 각 구역마다 감독관을 둡니다. 많은 수확을 한 사람에게는 칭찬과 상이 주어졌으며, 농사를 소홀히 지은 사람에게는 비난과 질책이 가해졌습니다.
 
누마가 실시한 정책 중에 또 눈여겨볼 필요가 있는 부분은 직업에 따라 조합을 결성한 것입니다. 작가는 기록에서 이 정책을 칭송받을만하다고 극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누마의 지혜가 돋보이는 부분은 시민들을 작은 단위로 나누어 커다란 부족 간의 분열을 없애버렸다는 점입니다. 
 
누마는 달력법도 개정합니다. 그동안의 통일되지 않았던 달력법을 개선하여 태음력은 1년이 354일, 해를 기준으로 한 태양력은 365일이므로 그 차이가 11일임을 계산해 냅니다. 이 차이를 없애기 위하여 2년마다 2월 다음에 11의 두 배수인 22일을 가진 달을 끼워 넣었고 이 윤달을 메르케디누스라고 부릅니다. 그러나 이 달력법도 불완전하여 나중에 다시 개정하게 됩니다.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각 달의 이름의 어원을 설명하고 있는데, 대부분 신이나 황제의 이름에서 유래했습니다. 
 
두 얼굴을 가졌던 것으로 표현되고 있는 야누스 신전은 입구가 두 개입니다. 이 신전을 전쟁의 문이라고 하였는데, 전쟁이 발발하면 문을 열고 평화를 되찾으면 닫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로마는 거의 전쟁 상황에 놓여있었기 때문에 문은 거의 열려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문은 누마가 왕위에 있던 43년 동안은 굳게 닫혀있었다고 합니다. 아무리 평화를 사랑하는 누마였지만, 재위기간 동안 한 번도 전쟁을 치르지 않은 것은 대단한 일이라고 느껴졌습니다. 로마로부터 시작된 평화의 바람은 이웃 부족들의 마음에도 변화를 주었다고 합니다.

야누스의 문

전쟁이 없던 시기를 표현한 시가 있는데 이 시에서는 전쟁의 두려움에서 해방된 도시의 평화가 느껴집니다.

  방패에는 검붉은 거미의 거미줄이 엉켜 있고
  시퍼런 양날의 날카로운 검은 녹슬고
  청동의 사나운 나팔 소리 사라졌으니
  꿀처럼 달콤한 졸음이 눈꺼풀 위로 쏟아진다.

 
누마 왕은 80세에 노환으로 자연사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누마의 장례식은 그의 인기를 실감하듯 이웃 나라에서 가지고 온 화환과 예물로 가득 찼습니다. 그리고 시민들은 큰소리로 통곡하였다고 합니다. 
 
누마의 시신은 화장을 하지 않고 두 개의 돌관에 넣어 야니쿨룸 산에 매장했다고 합니다. 관 하나에는 그의 시신이 들어 있고, 다른 하나에는 그가 저술한 서적들을 넣었다고 합니다. 그가 서적을 묻게 한 것은 신성하고 비밀스러운 가르침은 실천에 의해 체화되어야 하지 문자로만 존재하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시대 이미 실천의 중요성을 설파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현대사회에도 100가지를 아는 것보다 1가지 실천이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는데 '실천'은 시대를 초월한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누마의 돌관에 들어간 서적은 총 24권인데 종교 서적 12권과 그리스 철학서적 12권이었다고 합니다. 누마는 죽어서도 시민의 사랑을 잃지 않은 왕으로 기억되었습니다. 후대 왕들의 비참한 죽음으로 인해 누마에 대한 시민들의 사랑은 더욱 빛이 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