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쿠르고스는 스파르타의 정치가로서 원로원을 창시했으며, 토지를 재분배하고 공동 식사, 청년 교육, 결혼 등의 법률을 제정하여 스타르타의 기초를 다지는 데 공헌하였습니다. 그는 아버지인 에우노모스의 두 번째 아내 디오나사의 아들로 헤라클레스의 11대 손입니다.
스파르타의 리쿠르고스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기록이 있는데 내용들마다 차이가 있어서 어떤 것이 정확한지는 확실하지 않다고 합니다. 특히 그가 살았던 시대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고 저자는 서술하고 있습니다.
플루타르크스는 여러 가지 추측을 종합하여 리쿠르고스의 계보를 추측했습니다.
정리를 하면, 아리스토데무스-파트로클레스-소우스-에우리폰-에우노무스-리쿠르고스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리쿠르고스의 아버지, 에우노무스는 두 명의 부인이 있었는데 리쿠르고스는 두 번째 부인의 아들입니다.
리쿠르고스 조상들 중에 가장 존경받았던 인물은 '소우스'라고 합니다. 소우스 왕에 대한 흥미로운 일화가 있는데 스파르타 군이 클리토리아 군에게 포위되었을 때 스파르타군은 갈증으로 고통을 겪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때 소우스 왕이 적군에게 가까운 샘에서 모든 군이 물을 마실 수 있게 해준다면 자신이 정복한 땅을 모두 돌려주겠다고 서약합니다. 병사들을 소집한 그는 누구든 물을 마시지 않는 사람에게는 왕위를 물려준다고 했으나 물을 마시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소우스 왕은 샘물을 마시지 않고 온몸에 붓고 돌아와서 모든 사람이 물을 마신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정복한 땅을 돌려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리쿠르고스의 아버지는 정치적 혼란 속에서 민중의 폭동을 막으려다가 백정의 칼에 찔려 죽었고, 그의 첫 번째 부인의 아들인 폴리텍테스(리쿠르고스의 이복형)가 왕위를 물려받게 됩니다. 그러나 폴리텍테스도 왕위에 오른지 얼마 되지 않아 죽게 되자, 리쿠르고스가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형수가 임신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스스로 왕위에서 물러납니다. 리쿠르고스는 아이의 후견인으로서 섭정(프로디쿠스)을 하게 됩니다.
그의 형수는 뱃 속의 아이를 사산시키고 자신과 결혼하여 왕과 왕비의 자리에 오르자고 유혹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형수에 대한 역겨운 속마음을 숨기고 사산시키면 형수의 건강을 해칠 수 있으니 아이를 출산하면 자신이 아이를 죽이겠다고 형수를 속입니다.
시간이 흘러 왕비가 아들을 낳게 되자 리쿠르고스는 아기를 안고 이렇게 말합니다.
"스파르타 인이여, 그대들의 왕이 태어나셨소."
리쿠르고스는 아기를 왕좌에 눕히고, 아기의 이름을 ' 온 백성의 기쁨'이라는 뜻의 '카릴라우스'라고 부릅니다.
사람들은 리쿠르고스의 정의로운 성품과 포용력에 감탄하였고 그를 존경하게 됩니다. 그가 왕위에 있었던 기간은 고작 8개월이었습니다.
리쿠르고스는 왕비의 가족들로부터는 질시와 의심을 받게 되었고 그들이 퍼뜨린 나쁜 소문으로 상처를 받고 괴로움을 겪기도 합니다. 결국 그는 조카가 크고 대를 이을 왕자를 낳을 때까지 스파르타를 떠나려는 마음을 먹습니다.
리쿠르고스는 크레타에서 현명한 정치가 탈레스를 알게 되었고, 그의 요청에 의해서 탈레스가 스파르타에 갔을 때는 '떠돌이 서정 시인'으로 평가되었다고 합니다. 그의 아름답고 온화한 언어는 사람들의 정서에 깊은 영향을 끼쳤고, 리쿠르고스가 교육 제도의 기초를 다지는 데 영향을 끼쳤다고 합니다.
리쿠르고스는 크레타에서 소아시아로 갔고, 그곳에서 호메로스의 시를 처음 접했다고 합니다. 호메로스의 시에 매료된 그는 고국으로 돌아가서 그의 시를 정리합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호메로스의 시를 세상에 처음 알려 유명하게 만든 사람은 바로 리쿠르고스였다고 합니다.
이집트로 간 리쿠르고스는 이집트의 군체계를 모델링하여 스파르타 국가의 계급을 체계화시킵니다.
리쿠르고스가 스파르타를 떠나 있는 동안 스파르타 사람들은 리쿠르고스를 무척 그리워하게 되었고, 그 시기에 스파르타의 왕의 권위는 바닥에 떨어졌기 때문에 왕들조차 그가 돌아오기를 희망하게 됩니다.
결국 리쿠르고스는 스파르타에 돌아왔고 전면적인 개혁을 시작합니다. 리쿠르고스는 델포이의 아폴론에게서 자신의 개혁에 대한 긍정적인 신탁을 받고 돌아옵니다.
리쿠르고스의 개혁에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은 아르티미아다스입니다. 왕들도 리쿠르고스의 개혁에 동참하게 됩니다.
리쿠르고스는 원로원제도를 마련하여 정치 권력을 분산시켜 왕과 민중의 세력균형을 조율하는 역할을 하게 합니다. 원로원의 수는 개혁에 가담한 28명이라고 합니다. 두 명의 왕을 포함하면 30명이 됩니다.
작가는 정치 권력의 조율에 실패해서 왕좌에서 쫒겨난 나라(아르고스, 메세나)의 예를 들면서 리쿠르고스의 개혁을 옹호합니다.
리쿠르고스의 두 번째 개혁은 토지 개혁입니다. 어느 시대나 그렇듯이 토지 개혁은 위험 부담이 많은 개혁입니다. 토지는 소수의 사람들이 거의 다 차지하고 있는데 그들의 권력이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부자들이 리쿠르고스의 개혁에 찬성하게 되었고, 그는 개혁을 실행에 옮기게 됩니다.
리쿠르고스는 라코니아 지방의 토지를 3만 개의 구역으로 똑같이 나누었고, 스파르타 수도에 속한 토지는 9천 조각으로 나누었다고 합니다. 토지 분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다른 의견이 있지만 시민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는 것은 대단한 개혁으로 평가되기에 충분하다고 생각됩니다.
리쿠르고스는 금화와 은화를 없애고 구리 동전만 사용하게 했으며, 사치스러운 예술도 모두 추방하겠다고 선포합니다.
리쿠르고스는 사람들을 한곳에 모여 함께 식사를 하게 하였고, 똑같은 빵과 고기를 먹드록 합니다. 이렇게 그는 부의 의미자체를 없애버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정책이든지 너무 과하면 부작용이 생기는 것 같습니다. 부자들이 그의 정책에 불만을 가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부자들의 부정적인 선동으로 인해 리쿠르고스는 젊은 청년에게 막대기로 공격당해 한 쪽 눈을 잃게 됩니다.
리쿠르고스는 자신의 한쪽 눈을 멀게 한 알칸데르라는 청년을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가서 시중을 들게 했으며, 가까이에서 리쿠르고스의 생활을 보게 됩니다. 그는 리쿠르고스에게 존경심과 경외감을 가지게 되었으며, 겸손하고 자제력 있는 사람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이 대목에서 리쿠르고스의 모범적인 실천의 철학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공동 식사는 아주 오랫동안 엄격하게 지켜졌으며, 왕도 예외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리쿠르고스가 행한 일 중에 특이한 것은 스파르타의 모든 법을 문자로 기록하지 않으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실천을 통해 체화하여 자율적인 실천으로 나라를 이끌어 가야한다는 신념때문이었습니다.
리쿠르고스는 같은 나라와 여러 번 싸우는 것을 금했는데 스파르타의 전술이 노출된다는 것이 이유였다고 합니다.
리쿠르고스는 여자들도 남자들 못지 않게 신체단련을 강조했으며, 건강한 아이를 순산하기 위해서 신체단련을 독려합니다. 또한 결혼을 장려하기 위해 미혼인 젊은이들에게 법적인 불이익을 줍니다. 심지어 추운 겨울에 벌거벗고 광장을 돌아다니는 수모를 겪게 합니다.
리쿠르고스는 아이들이 부모의 소유가 아니라 국가의 공유물이라고 여깁니다. 특이한 점은 아내들이 남편말고도 좋은 혈통을 가진 남자 사이에 아기를 낳는 것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지금 정서로서는 받아들 수 없는 제도인 것 같습니다. 그때 당시는 전쟁을 많이 해야하는 상황이라 그런 생각을 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스파르타에서는 허약한 아이를 아포세테라는 바위틈에 버리기를 강요받았다고 합니다. 스파르타 여인들은 갓 태어난 아기의 온몸에 물이 아니라 포도주를 부어 건강함을 시험했다고 합니다. 아이를 기를 때는 강하게 기르려고 노력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학원가에서 유행하는 스파르타식 교육이 나온 것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스파르타에서 아이들을 단련시키는 과정을 살펴보면 지금의 시각으로 본다면 아동학대로 비춰질 만한 소지가 많아 보입니다.
스파르타는 도시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군대와 같은 생활을 합니다. 리쿠르고스는 상업이나 기술을 배우는 일을 천하다 하여 시민들에게 배우지 못하게 합니다.
스파르타 젊은이들은 올림픽 경기에서 우승의 면류관을 받으면 전쟁터에서 항상 왕의 옆에서 진군할 수 있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에 아무리 많은 돈으로 경기에 불참하게 하려고 유혹해도 소용이 없었다고 합니다.
스파르타에서는 금과 은이 사라짐과 동시에 법적인 소송이 사라졌으며, 더 이상 탐욕과 가난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에서는 상상으로만 존재하는 나라로 느껴집니다.
리쿠르고스는 자신은 외국에서 배운 좋은 제도를 스파르타에 적용시켰는데, 정작 시민들에게는 외국의 나쁜 관습이나 야만적인 생활이 스파르타로 들어온다는 이유로 외국에 나가는 것을 금지시켰으며, 스파르타에 있는 외국인들을 특별한 이유없이 추방했다고 합니다.
특히 스파르타에서는 헬롯 인들에 대한 학대와 살해가 공공연하게 자행되었는데, 그 이유는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헬롯 인들이 메세니아 사람들과 공모해서 폭동을 일으키고 스파르타를 황폐화시켰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리쿠르고스는 아폴론 신에게 자신이 정한 법률에 대한 평가를 물었고, 아폴론 신은 스파르타의 법은 매우 훌륭하며 잘 지킨다면 스파르타의 명성이 대대손손 영원할 것이라는 신탁을 내립니다. 리쿠르고스는 신탁의 내용을 적어서 스파르타로 보내고 난 후 음식을 끊고 그곳에서 조용히 생을 마감합니다.
스파르타는 리쿠르고스의 법률을 500년 동안이나 준수합니다. 그런데 아기스가 왕위에 있을 때, 리산데르라는 사람이 전쟁에서 돌아오면서 처음으로 금과 은을 가지고 들어오게 되면서 스파르타 사람들은 곧 사치와 욕심에 눈이 멀어버립니다. 욕망을 누르는 것도 어려운 일이지만, 고삐 풀린 욕망을 다시 억누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울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델포이에서 조용히 숨을 거둔 리쿠르고스의 유해가 스파르타로 보내졌을 때 갑자기 번개가 떨어져서 무덤이 사라져버렸는데, 이렇게 무덤이 사라진 또 다른 사람은 유명한 비극작가인 에우리피데스였다고 합니다. 무덤이 사라진 것은 신에게 사랑받았다는 증거라고 합니다. 그 시대에는 무엇보다 신으로부터 사랑을 받는다는 것이 최고의 영광으로 여겨졌었던 것 같습니다.
리쿠르고스는 안티오루스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자식 없이 죽었기 때문에 대가 끊겼다고 합니다. 리쿠르고스의 친구와 친척들은 리쿠르고스를 위해서 매년 제사를 지냈는데, 이날을 '리쿠르기데스'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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