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제국쇠망사 2권 17장 Part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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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쇠망사 2권 17장 Part 1

·로마제국쇠망사 2권 17장에서는 콘스탄티노플의 창건·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후계자들의 정치 체계 · 군율· 궁정 ·재정· 일반 조세· 자발적 기부금에 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마지막 경쟁자였던 리키니우스를 물리치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그는 제국을 안정시키고 성공적인 통치를 이룬 뒤, 새로운 수도와 정책, 종교 제도를 도입하여 제국을 개혁하였습니다. 이후 그의 후계자들은 이 개혁들을 제도로 정비하며 계승하게 됩니다.

저자 기번은 콘스탄티누스 이후의 시대는 사건이 매우 복잡하고 다양하여 단순히 시간 순서대로만 정리해서는 전체 흐름을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제국의 멸망이나 전쟁, 혁명을 다루기 전에, 먼저 제국의 통치 구조와 정치 제도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고대인들은 구분하지 못했던 정치와 종교 문제를 명확히 나누어 살펴보는 시각이 필요하며, 기독교의 승리와 교회 내부의 혼란 또한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 모두를 살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324년 새로운 수도의 설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서기 324년, 비잔티움을 새로운 수도로 정하고, 이 도시를 자신의 이름을 따 ‘콘스탄티노플’로 개칭한 뒤 본격적인 도시 건설에 나섰습니다. 그는 단순히 행정적 중심지를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제국의 정치·군사·종교·경제 모든 기능이 통합된 미래형 수도를 구상하였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의 입지는 매우 전략적이었습니다. 이 도시는 유럽과 아시아를 가르는 보스포루스 해협에 위치해, 동서양의 경계이자 연결 지점이라는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서방의 라틴 세계와 동방의 그리스·이슬람권 사이에 서 있는 이 도시는 양 문명의 중간 지대로서 이상적인 위치였으며, 페르시아 제국을 가까이서 견제할 수 있는 군사적 장점도 갖추고 있었습니다. 기존의 로마는 이러한 점에서 지리적으로도 한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콘스탄티누스는 비잔티움이 새 시대의 수도로 더 적합하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이 결정에는 또한 그가 디오클레티아누스에 대해 가졌던 혐오감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황제를 신격화하고 동방식 권위주의를 도입했던 것을 깊이 경멸하였습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금과 비단으로 장식된 복장을 하고, 황제를 향해 땅에 엎드리는 궁정 의례를 도입하는 등 로마 황제의 권력을 신성한 존재처럼 꾸미려 했습니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는 기독교적 겸손과 절제를 강조하며, 이처럼 사치스럽고 권위주의적인 통치를 거부했습니다.
또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추진했던 사두정(네 명의 황제가 분할 통치하는 체제)는 혼란과 분열을 가져왔고, 콘스탄티누스는 하나의 통합된 권위 아래 제국을 재건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콘스탄티노플은 단순한 도시 이전이 아니라, 과거 황제의 전제적 정치와 이교적 문화에서 벗어나, 통합과 기독교적 질서를 상징하는 새 제국의 상징이었습니다.
이 도시는 콘스탄티누스가 그리고자 했던 ‘새로운 로마’였고, 로마 제국의 중심이 서방에서 동방으로 완전히 옮겨졌음을 보여주는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비잔티움의 상황 

비잔티움은 본래 그리스의 식민지로 출발했지만, 탁월한 해상 지리와 상업적 이점 덕분에 독립된 도시국가로 오랜 시간 번성해왔습니다.
특히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해 유럽과 아시아, 흑해와 에게해를 잇는 해상 교류의 요충지로 기능하면서 해상 지휘권을 확보한 것이 도시 성장의 핵심 요인이었습니다.

비잔티움은 군사적·전략적 요새로서의 가치뿐 아니라, 국제 무역의 중심지로서 제국 내외와 교류하는 거점이었으며, 이런 지리적 조건은 훗날 콘스탄티누스가 이곳을 새 수도로 선택하는 결정적 배경이 되었습니다.

 콘스탄티노플

콘스탄티노플로 불리게 된 비잔티움은 부등변 삼각형 형태의 반도 위에 세워졌습니다.
동쪽은 아시아 해안 방향으로 둥글게 돌출된 지형이며, 트라키아 보스포루스의 곡선과 만나는 지점에서 자연스러운 경계선을 형성합니다.
북쪽은 황금뿔 항구, 남쪽은 프로폰티스(마르마라 해)가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서쪽은 유럽 대륙과 접한 육지로 성벽이 세워졌습니다.
육지와 바다가 교차하는 이 지형은 정치적, 군사적으로 매우 우수한 입지를 보여줍니다.


 보스포루스

보스포루스 해협은 흑해와 마르마라 해를 잇는 굽이진 바닷길로, 고대부터 군사·무역의 핵심 경로였습니다.
빠르게 흐르는 물살은 끊임없이 흑해의 물을 지중해 쪽으로 흘려보냈으며, 그리스 항해자들의 공포심과 신앙심은 해안에 세운 수많은 신전과 제단에서 드러납니다.

해협 주변에는 피네우스의 궁정을 더럽힌 하피, 아르고호의 항해, 권투에서 패배한 아미쿠스의 전설 등 다양한 신화가 전해졌습니다.
키아네아 암초는 신화에서 흑해를 지키는 신성한 문턱으로 여겨졌고, 해협의 전체 길이는 약 16마일, 폭은 1.5마일 정도입니다.

양쪽 해안에는 세라피스 신전과 유피테르 우리우스 신전을 중심으로 성벽이 세워졌으며, 마호메트 2세도 이 방어선을 보수해 사용했습니다.
그는 자신보다 거의 2000년 전 다리우스가 이곳을 선교용 다리 건설지로 택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보스포루스를 건너 맞은편 아시아 해안에는 크리소폴리스(스쿠타리)라는 소도시가 있었으며, 콘스탄티노플의 외곽 도시처럼 여겨졌습니다.
그 아래에는 칼케돈이 위치했는데, 이곳은 비잔티움보다 몇 년 앞서 건설된 그리스 식민지였습니다.
그러나 칼케돈의 건설자들은 바다 건너편 비잔티움의 우월한 지리 조건을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에, 후대에는 “눈이 먼 자들의 도시”라며 경멸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프로폰티스

프로폰티스는 현재의 마르마라해를 가리키는 고대 명칭으로, 보스포루스와 헬레스폰투스(다르다넬스) 해협 사이에 위치한 바다입니다.
유럽과 아시아의 해안선이 이 바다를 양쪽에서 둘러싸고 있어, 고대 항해자들에게도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였습니다.

보스포루스 어귀에서 헬레스폰투스 입구까지의 항해 거리는 약 120마일(약 193km)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프로폰티스를 통과해 서쪽으로 항해하는 사람들은, 동시에 트라키아와 비티니아의 고지대, 그리고 만년설이 덮인 올림푸스 산의 봉우리까지도 볼 수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항해자들은 왼쪽에 깊이 들어간 만을 지나게 되는데, 그 아래쪽이 바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머물렀던 도시, 니코메디아입니다.

니코메디아

이후 항로는 키지쿠스와 프로콘네수스라는 작은 섬들 사이를 통과하며 이어지고, 마지막에는 유럽 쪽의 갈리폴리 항구에 도달하게 됩니다.

갈리폴리 항구를 지나면 바다가 좁아지며 헬레스폰투스 해협(다르다넬스 해협)이 시작되고, 이 해협은 아시아와 유럽을 다시 분리시키는 지리적 경계선 역할을 합니다.

 

헬레스폰투스

헬레스폰투스는 오늘날 다르다넬스 해협에 해당하며, 아시아와 유럽을 가르는 중요한 해역입니다. 이 해협의 길이는 약 60마일, 평균 폭은 약 3마일로 측정됩니다.

하지만 가장 좁은 구간은 세스토스(Sestos)와 아비두스(Abydos) 사이이며, 그 너비는 약 500보(약 750m)에 불과합니다.

바로 이곳에서 레안드로스는 연인을 만나기 위해 해협을 수영해 건넜고, 크세르크세스 대왕170만 대군을 이끌고 유럽으로 향하기 위해 거대한 부교를 설치했습니다.

히로와 레안드로스

이 해협은 폭이 좁기 때문에 ‘광대한’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행자나 시인에게는 이 해협이 끝없는 자연의 흐름처럼 느껴지며, 강처럼 숲을 지나 넓은 바다로 흘러가는 듯한 인상을 받았을 것입니다.

고대 트로이는 헬레스폰투스 어귀, 이다산의 고지대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시모이스 강과 스카만데르 강에서 물을 공급받았습니다.

그리스군의 진영은 시게안 곶에서 로에테안 곶까지 약 12마일에 걸쳐 있었고, 아킬레우스는 시게안 곶, 아이아스는 로에테안 곶에 진을 쳤습니다.

아이아스는 죽은 후 영웅으로 숭배되었고, 그의 무덤은 신흥도시 로에테안 시민들에게 신전처럼 여겨졌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처음에 헬레스폰투스 인근, 고대 트로이 평원에 제국 수도를 세우려 했습니다.

로에테안 곶과 아이아스 묘지를 향한 넓은 평원을 새로운 수도 후보지로 삼았지만, 건설은 중단되었고 미완성 상태의 성벽과 탑만이 남았습니다. 그 유적은 지금도 헬레스폰투스를 지나는 배들에서 선명히 보인다고 합니다.

 

콘스탄티노플의 이점 

콘스탄티노플

콘스탄티노플은 수도로 선택될 만큼 탁월한 입지를 지닌 도시였으며, 그 유리한 위치 조건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북위 41도에 위치한 이 도시는 높은 지대에 자리잡아 유럽과 아시아의 맞은편 해안을 동시에 조망할 수 있습니다.

기후는 온화하고 건강에 좋으며, 토양은 비옥하고 항구는 깊고 안전합니다. 해안은 널찍하고 평화로운 반면, 대륙에서의 접근 통로는 좁기 때문에 방어하기에 매우 유리한 구조를 가졌습니다.

보스포루스 해협과 헬레스폰투스 해협은 콘스탄티노플의 양쪽을 감싸는 전략적 관문으로, 황제는 이 통로를 장악하여 적의 접근은 철저히 차단하고, 아군 선박에게는 개방된 통제권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지리적 이점은 군사적 요충지로서 콘스탄티노플의 위상을 높였고, 실제로 콘스탄티누스가 이곳을 제국의 수도로 정한 뒤, 주변의 이민족들은 도시를 침략 대상에서 제외하거나 공격 시도를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는 난공불락의 방어력과 지형적 안정성 때문으로, 단순한 전략적 위치를 넘어선 상징적인 위협 억제력을 보여줍니다.

또한 헬레스폰투스와 보스포루스 해협은 설령 폐쇄된다 하더라도, 두 해역의 넓은 지역 안에서 도시의 거주민들에게 필요한 식량과 생필품을 자체적으로 조달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고대 트라키아와 비티니아 지역은 지금의 터키 북서부로, 포도와 농산물이 풍성하게 자라며, 프로폰티스(마르마라 해) 연안은 생선 자원이 풍부하여 매우 중요한 보급지 역할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흑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수로가 무역로로 개방되면, 북쪽의 스키타이·게르마니아·보리스테네스강 유역에서 내려오는 천연 자원과 제조품들이 유입되고, 이집트의 곡물과 인도에서 생산된 보석, 향료, 고급 물품들이 해로를 통해 콘스탄티노플로 들어오게 됩니다.

이 모든 지리적·군사적·경제적 조건들이 어우러져, 콘스탄티노플은 수세기 동안 동서양을 연결하는 고대 제국의 중심지로 번영할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