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365년 9월, 프로코피우스의 반란
프로코피우스는 율리아누스 황제의 인척이었습니다. 요비아누스가 황제가 되었을 때 그는 의심을 피하기 위해 카파도키아 속주에서 사유지를 경작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동방 황제가 된 발렌스 정권은 프로코피우스를 잠재적 위협으로 간주했는지, 병사들을 보내 평생 감옥에 갇히든지 아니면 죽음을 택하라는 전갈을 전했습니다.
프로코피우스는 울고 있는 가족들과 인사할 시간을 달라고 했고, 병사들에게는 풍성한 주연을 제공해 긴장을 풀게 한 뒤 흑해의 해변에서 보스포루스로 탈출했습니다.
외진 곳에서 궁핍과 불안 속에 절망스러운 나날을 보내던 그는, 결국 자신의 운명에 맞서 정면돌파하기로 결심하고 콘스탄티노플로 향했습니다.
그는 비티니아에서 거처와 외관을 바꾸며 숨어 지냈습니다. 그에게 도움을 준 원로원 의원과 환관의 인도를 받아 콘스탄티노플로 이동하던 중, 민심의 불만이 커지고 있음을 듣고 용기를 얻었습니다.
동로마의 여론은 율리아누스 치하에서 민정총독을 지냈던 살루스티우스가 면직된 것을 아쉬워했고, 새롭게 황제가 된 발렌스를 교양이 부족하고 나약하다고 경멸하는 시선도 적지 않았습니다.
특히 발렌스의 장인 페트로니우스는 과거에 걷지 못한 세금까지 소급해 징수할 정도로 탐욕스럽고 잔인하다는 평판을 얻었고, 그 때문에 민심은 더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때마침 페르시아 쪽에서도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포착되어, 발렌스는 동방 전선 대응을 위해 이동해야 했습니다.
프로코피우스는 이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갈리아 보병대 두 부대에 후한 하사금을 미끼로 설득했고, 율리아누스를 그리워하던 병사들은 프로코피우스가 율리아누스의 친족으로서 ‘권리’를 회복하려 한다는 주장에 동의했습니다.
프로코피우스가 황제의 복장으로 콘스탄티노플 한복판에 나타나자, 그를 지지하기로 약속했던 병사들이 환호로 맞이했습니다.
기대와는 달리 시민들의 반응이 처음에는 무덤덤하자, 현장에는 긴장과 동요가 함께 흘렀습니다. 그러나 이 반란을 두고 가난한 자들은 희망에 들떴고, 부자들은 약탈을 두려워했습니다.
불안과 기대가 공존하던 몇 시간 만에 그는 새로운 황제가 되었습니다. 그는 대중을 상대로 여론전을 펼쳤고, 가짜 사절들을 동원해 대중을 현혹하기도 했습니다.
트라키아의 도시들과 도나우 강 하류의 요새 군대가 반란군에 합류했으며, 고트족의 왕들까지 지원에 동의했습니다.
프로코피우스의 군대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 비티니아와 아시아 속주들을 비교적 쉽게 점령했습니다.
찬탈자를 막으라는 명령을 받은 군대 일부까지 가세하면서, 프로코피우스의 세력은 발렌스의 세력에 못지않은 힘을 갖게 되었습니다.
콘스탄티우스 2세의 미망인 파우스티나도 프로코피우스에게 자신과 딸의 운명을 걸며 명분을 실어 주었습니다.
다섯 살에 불과했던 콘스탄티아를 본 병사들은 콘스탄티누스 가문의 영광을 떠올리며 마지막까지 충성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서기 366년 5월, 프로코피우스의 죽음
당시 게르만족과 전쟁을 치르고 있던 서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는 동로마의 소식을 듣고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또한 프로코피우스가 발렌스를 죽이고 황제가 되었다는 소문이 일파만파 퍼지고 있었습니다.
발렌스는 두려움에 휩싸여 퇴위를 언급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대신들의 굳은 의지 덕에 황제의 지위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이때 면직되었던 살루스티우스가 국가의 위험을 알고 전면에 나서면서 분위기는 반전됩니다.
게다가 발렌스를 위해 싸우는 루키피누스 장군과 아린테우스의 활약이 이어졌고, 콘스탄티누스 대제 치하의 집정관이었던 노장 아르베티오까지 전장에 나와 반란군에 맞섰습니다.
과거의 업적과 권위를 가진 인물들이 병사들을 회유하자, 프로코피우스는 급속히 궁지에 몰립니다.
결국 프로코피우스는 신하들에 의해 발렌스에게 넘겨져 처형되었습니다. 그 처형은 잔인했고, 때문에 사람들의 동정과 공분을 샀습니다.
반란 이후: 공포정치의 시간
그러나 반란이 끝났다고 해서 제국의 불안이 끝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 사건은 발렌스 정권에게 제국은 소문과 명분만으로도 뒤집힐 수 있다는 뼈아픈 교훈을 남겼습니다.
그 뒤로 권력이 가장 두려워한 것은, 눈앞의 군대보다도 ‘다음 황제’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사람들은 전쟁보다 소문을 더 빠르게 퍼뜨렸고, 소문은 다시 권력을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불안은 곧 수사로 이어졌습니다.
이 시기부터 ‘마법’과 ‘점술’은 단순한 미신이 아니라, 정권을 뒤흔드는 반역의 단서로 의심받기 시작합니다. 누가 미래를 묻고, 누가 황제의 이름을 입에 올렸는지, 누가 그 말을 들었는지—이런 질문들이 국가의 문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서기 370년대에 이 공포는 폭발합니다. 로마와 안티오크에서 ‘마법의 범죄’라는 이름으로 대규모 심문이 이어졌고, 혐의는 개인에서 끝나지 않고 친족과 후원자, 지인으로 번져 사건을 눈덩이처럼 키웠습니다.
이 여파로 부유한 가문들이 몰락했고, 선량한 시민들도 불안에 떨었습니다.
프로코피우스의 반란은 한 사람의 야망으로 시작됐지만, 그 여파는 한 세대의 공포로 남았습니다. 정권은 찬탈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 더 많은 감시와 더 가혹한 심문을 선택했고, 그 과정에서 법은 정의가 아니라 불안을 관리하는 도구로 변질되었습니다.
역사는 종종 전쟁의 승패로만 기록되지만, 제국을 위험에 빠뜨린 것은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서로를 믿지 못하게 된 순간, 부유한 가문도, 선량한 시민도, 누구도 안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발렌스 시대가 남긴 가장 음울한 유산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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